진흙속의연꽃

1박2일 남도 여행길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16. 06:51

1박2일 남도 여행길에서

 


끊임없이 달렸다. 이번 1박2일에서 달린 기억만 있는 것 같다. 만남은 짧다. 결국 늘 혼자 달렸다. 길 위의 인생이라 해야 할까?

달린다는 것이 반드시 차로 주행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삶도 달리는 것이다. 해와 달이 가서 여기 이렇게 있는 것도 달려 온 것이다. 참으로 많이 달려 왔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hp 60)

 

어리석은 자에게 왜 윤회는 아득할까? 그것은 윤회를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37조도품이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모르는 한 윤회는 계속되는 것이다.

윤회의 길 위에 있다. 이 생이 끝나면 다음 생이 시작될 것이다. 이생의 나와 다음생의 나는 같은 것일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다만 연기적 흐름일 뿐이다. 조건발생 하는 상속의 흐름이다.

나는 이생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남들처럼 먹는 것에 열중했던 것 같다. 일종의 생존투쟁을 말한다. 굶지 않기 위해 살아온 것이다. 하루 세 끼 찾아 먹는 행위를 계속해 왔다. 살기 위해 먹은 것이다.

먹기 위해 살 것인가 살기 위해 먹을 것인가? 어느 경우이든 먹는 것은 거룩한 행위이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공양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 거룩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먹지 않는다면 엔트로피법칙에 따라 붕괴되고 말것이다.

삶의 목적성이 있어야 한다. 이번 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생도 있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그것은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시키는 삶이다.

아무리 달려도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없다. 달리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생사를 거듭하며 맹목적으로 달려 간다. 그러나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방법이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내면여행을 떠나야 한다. 정신적 여행에는 가이드가 필요하다. 가이드로서 부처님이 있다.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무리에 있어서 우두머리 같은 것이다. 신과 인간의 스승(Sattha devamanussanam: 天人師)으로서의 부처님이다.

이번 남도순방 때 장거리를 뛰었다. 불과 999cc밖에 되지 않은 경차로 달린 것이다. 달리는 내내 불안했다. 사람이라도 태우고 가면 더 불안했다. 차체가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잘 달렸다. 요즘에는 경차도 잘 만든 것 같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교통체증과 관련이 있다. 남쪽으로 달릴수록 차가 보이지 않았다. 잘 만들어 놓은 시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밀도가 낮은 지방에 과잉투자한 것이 아닌지도 생각해 보았다.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혜택 받았을지도 모른다.

도로가 뻥 뚫렸을 때 달리는 맛이 난다.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늘 막히는 수도권에 살다 남쪽에 내려오니 널널했다. 제한최고 속도를 초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생길은 평탄하지 않다. 거친 가시밭길이기 쉽상이다. 그래서 "세상의 삶은 어렵고 재가의 삶은 고통스럽다.”(Dhp.302)라고 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누군가는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바탕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갈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마치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힘들면 쉬어가야 한다. 졸음이 쏟아질 때 잠시 눈을 붙여야 한다. 졸음과 싸워가며 억지로 가려다가 사고 날 수 있다.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면 새로 힘이 솟아난다. 산뜻한 기분으로 새출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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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동안 계속 달렸다. 머무는 기간 보다 달리는 기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지금도 달리고 있다. 해가 뜨면 또 달려야 한다. 세상 끝까지 달려야 한다. 걸어서는 갈 수 없다. 이 작은 몸 안에 세계의 생성과 소멸이 있다. 대상(sattha)의 우두머리가 이끄는 대로 달려야 한다. 황량한 사막을 잘 건너기 위해서.


2021-03-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