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간은 본래 깨끗한 존재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16. 13:23

인간은 본래 깨끗한 존재일까?


어떤 이들은 인간은 본래 깨끗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문이 있다. 본래 깨끗한 존재라면 죄악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은 본래 깨끗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기만 하면 깨끗해질까? 어떤 이들은 거울에 묻어 있는 먼지를 닦아 내듯이, 마음도 닦으면 깨끗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닦을 것도 없다고 말한다. 마음 한번 돌이키면 번뇌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언어적 개념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언어가 없는 소나 개처럼 살면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 외도와 같다.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언어적 사유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분별하지 않으면 나도 없고 남도 없을 것이다. 언어적 분별없으면 번뇌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런 삶이 가능할까?

생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말 하는 것과 생각은 다르다. 생각은 자신의 의지와 관련없이 일어나지만 말은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사유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생각한 것을 말하고 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말이나 글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함을 말한다.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통제 바깥에 있음을 말한다. 이를 어떤 이는 양자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극미시적 양자의 세계에서는 예측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제멋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 세계에서는 인과의 적용을 받는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는 것과 같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마음이 있어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눈이 없다면 보지 못할 것이다. 귀가 없다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각이 없다면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혐오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통제불능의 생각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이다. 만약 그가 지각을 혐오하는 수행을 하다 죽었다면 무상유정천에 태어날 것이다. 색계 사선천을 말한다. 신체는 있으나 지각이 결여된 채로 태어나는 것이다. 지각 장애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무상유정천 존재를 '아산냐삿따'라고 한다. 지각없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인식작용이 없음을 말한다. 지각이 없으니 살아도 산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일생을 살아도 지각이 없으니 죽은 것처럼 보인다. 식물인간과 같은 것이다. 분별이 번뇌라 하여 무분별을 말한다면 무상유정천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각이 없는 무상유정천은 오래 산다. 한량없이 오래 살다 수명이 다하면 새로운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그가 만약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무인론자 또는 우연론자가 되기 쉽다. 그가 수행을 하여 전생을 기억해 내려 해도 이전 생을 기억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살았기 때문이다.

무상유정천 존재는 죽어야만 지각할 수 있다. 지각이 없는 상태에서 살았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죽어야 비로서 지각하게 된다. 지각하게 되었을 때 바로 이전 생은 기억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연히 태어난 것으로 본다. 우연론자가 되는 것이다.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분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분별하지 말라고 하여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무상유정천 중생처럼 살 수 없다.

언어적 개념을 부정하여 무분별을 주장한다면 소나 개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무분별로 살고자 한다면 무상유정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적 무분별은 가능하지 않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어난 생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어떤 이들은 본래 마음이 깨끗하다고 말한다. 분별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언어적 분별을 말한다. 정말 그럴까?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부처님은 마음의 경향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오염된 채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일곱 가지 경향성을 들었다. 이를 1)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2)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 3) 적의(분노)의 잠재성향, 4) 자만의 잠재성향, 5) 사견의 잠재성향, 6) 의심의 잠재성향, 7) 무명의 잠재성향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은 태어날 때 흰 천처럼 깨끗한 상태가 아니다. 일곱 가지 잠재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아기가 천진무구해 보이지만 자아의식이 생겨남에 따라 잠재의식은 발현된다. 사춘기때 최고조로 발현될 것이다. 요즘 말하는 중이(중학교 2학년)때이다.

감각적 욕망, 성냄 등 일곱 가지 잠재성향은 본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외도들은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번뇌를 언어적 분별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못하는 아기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이른바 '천진불사상'을 말한다. 과연 그럴까?

부처님은 천진불사상에 대해서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라고 물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말룽끼야뿟따는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는 외도의 견해이다. 부처님은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 아니다. 번뇌는 잠재되어 있다. 언어적 분별을 멈춘다고 하여 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이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언어적 분별만 멈추면 번뇌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상태를 '견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설령 언어적 분별을 멈추어 견성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재성향으로 남아 있어서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발현된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을 거울 닦듯이 깨끗이 닦으면 본래 깨끗한 마음이 드러난다고 보는 견해는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잠재성향이 있어서 번뇌가 일어난다고 했다.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의 뿌리를 뽑는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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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뭇 삶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뭇 삶에 대한 분노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분노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말룽끼야뿟따여, 이들 이교도의 출가자들은 아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


2021-03-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