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노년에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자는 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19. 07:38

노년에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자는 데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누구나 다 아는 민요이다. 젊고 건강할 때 즐기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늙어지면 몸이 망가져서 즐기고 싶어도 못 즐긴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행복관을 잘 표현한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카톡방에 뜬 것이 하나 있다.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은 법우님이 올린 것이다. 각종 건강정보에 관한 것을 잘 올리고 교훈이 되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올린다. 모두 남의 글이다. 어제 올린 장문의 글을 보니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라는 구절이 떠 올랐다.

글의 제목은 ‘1948년생 소설가김훈(74) 노년철학으로 되어 있다. 부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나이 80에 이른 작가의 노년관이 담겨져 있다. 작가는 주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현실속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화장장에서 관이 작은 함에 담긴 뼛가루로 변한 모습을 보고서 죽음의 가벼움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삶의 무거움도 말한다.

작가는 삶은 죽음보다 무겁다고 말한다. 죽음은 화장장의 뼛가루처럼 가벼운 것이지만 삶은 천근만근보다 무겁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거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가가 내린 결론은 글의 말미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즐기며 살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눈으로, 입으로, 귀로, 몸으로 즐기며 살자고 했다.

어떻게 즐기며 살자는 것일까? 작가는 눈이 즐거우려면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해외여행을 말하는 것 같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재산이 있다면 철마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이야말로 눈과 입, , 몸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입이 즐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입이 즐거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식도락가가 되라는 말과 같다. 여유가 있다면 맛집순례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세번째는 귀가 즐거워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음악을 즐기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네번째로 몸이 즐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운동을 해서 체력관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그치면 안될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베풀고 나누는 삶을 강조했다.

작가는 다섯 가지 즐거운 삶을 강조했다. 그러나 포커스는 네 가지 즐기는 삶이다. 시각적으로, 미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즐기는 삶이다. 한마디로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오욕락을 말한다. 다섯 가지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삶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베풀고 나누는 삶이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되 봉사하는 삶도 함께 하자는 것이다.

김훈 작가의 노년의 인생관을 보면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행복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죽으면 한줌의 재밖에 되지 않는데 인생을 무겁게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메세지로 보인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즐기며 살다 죽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복관은 내생 또는 내세를 생각하지 않는 단멸론적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언젠가 유원지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 어떤 노인은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나는 거지 뭐.”라며 큰 소리쳤다. 의외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돌아가셨다.”라는 말로 잘 표현된다. 어디로 돌아간 것일까?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 같다. 좀더 유식하게 말하면 지, , , 풍 사대로 흩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외도 스승 중에도 죽음을 사대의 흩어짐으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물론자 아지따 께싸깜발린을 말한다. 그는 내세가 없다고 했다. 보시의 공덕도 없다고 했다. 내세가 없으니 보시공덕이 없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오로지 이 생만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힘 닿는 한 힘껏 즐겨야 한다.

노년이 되어서 몸의 기능이 약화된다면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함을 강조했다. 운동을 해서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잘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노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각능력이 상실되면 해외여행을 갈 수 없을 것이다. 미각능력이 상실되면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할 것이다. 청각능력이 상실되면 아름다운 음악도 들을 수 없다. 촉감능력이 상실되면 신체적으로 즐길 수도 없을 것이다.

노년을 단지 즐기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었을 때 재난에 빠질 수 있다. 건강할 때는 즐기는 삶이 가능하지만 기능이 하나라도 퇴화되면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기능이 퇴화되기 때문에 병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즐기고 싶어도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즐기는 삶에 올인 하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다. 화장장의 한줌의 재를 보고서 죽음을 가벼운 것으로 보아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종국에는 허()와 무()만 남을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할지 모른다. 죽음은 한줌의 재에 지나지 않은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사람들은 죽게 되었을 때 껄껄껄한다고 말한다. “좀더 즐기며 살껄” “좀더 잘해 줄껄하며 후회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한 아쉬움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감각을 즐기며 사는 삶은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감각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능이 저하되는 순간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못할 때 살아야 할 이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어떤 노년이 되어야 할까? 80이 다 된 작가는 감각을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살자고 했다. 물론 베풀고 나누는 삶도 강조했다. 그러나 작가의 말 대로 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며 살 것이 아니라 감각을 알아차리며 사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일 때나 괴로운 느낌일 때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괴로운 느낌은 본래 괴로운 것이라서 괴로운 것이고, 즐거운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아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래저래 괴롭기 때문에 일체가 괴로운 것이다. 어느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노년의 삶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운동으로 몸 관리하여 감각적 쾌락을 즐기려 하지만 한계에 이른다. 결국 화장장의 한줌 재 밖에 되지 않는다. 한줌의 재를 보고서 죽음은 가벼운 것이고 삶은 무거운 것이다.”라고 본다면 이는 감각을 즐기는 삶이 된다. 감각에만 의존하면 동물적 삶이 된다. 그 결과는 허와 무이다. 감각을 즐기면 종국에는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한줌의 재를 보고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보아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더이상 즐기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극단적 선택하는 이유라고 본다.

젊었을 때 놀자고 말한다. 늙어지면 못 논다는 것이다. 그런데 늙어서도 놀자고 말한다. 과연 이런 주장이 타당할까? 대부분 사람들이 따른다고 하여 따라가야 할까?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은 거부할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면 괴로움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각을 알아차리며 살고자 할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안다면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80이 다 된 작가의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말하네.”(S35.136)


2021-03-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