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귀천없다 하지만
직업에 귀천 없다 하지만
오랜만에 일감이 제대로 걸렸다. 이번에는 난이도가 높은 것이다. 아침 일찍 일에 매달렸으나 진도는 느리다. 일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힘을 쓰려면 잘 먹어야 한다. 저녁에 설렁탕 한그릇을 먹었다. 설렁탕 먹은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어떤 일이든지 소화해 내야 한다. 못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야 '프로페셔널'이다. 인쇄회로기판설계도 그렇다.
담당자로부터 도면을 받았다. 두손가락 만한 사이즈에 핀이 빼곡하다. 한눈에 보아도 설계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거래를 유지하려면 어떻게해서든지 해내야 한다. 6층 기판설계로 실마리를 찾았다.
이 담당은 까칠하다. 주고객사에서 여러 담당이 있지만 실수했을 때 무안을 주기도 한다. 딸뻘 되는 담당이지만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잘 맞추어 주어야 한다. 이번에 신뢰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담당도 고난이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럴 때 무언가 보여주어야 한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할 때 신뢰를 줄 것이다. 야간작업, 주말작업을 해서라도 납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
이 나이에 일이 있는 것에 안도한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허드렛일이라도 일이 있으면 정신건강에도 좋다. 하물며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일감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연결된다는 것은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한다. 귀촌하여 농사짓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농촌에 살다 보면 하다못해 마당에 난 풀이라도 뽑을 것이다. 최악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때 되면 밥만 먹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선업을 짓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무료와 권태를 참지 못해서 즐길거리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술을 마신다.
노동을 해야 한다. 어떤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해야 한다. 일을 하고 나면 상쾌하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밥값 하는 것 같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동료들과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모습을 보면 거룩해 보이기도 한다.
일 하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한다. 장수촌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다. 일이 있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은 하기 싫은 것이지만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일을 한다. 일을 하면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일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일에 매달렸다. 난이도가 높아서 진척은 느렸지만 그래도 해 놓고 나니 상쾌하다. 마치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귀가한 것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다.
흔히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귀천이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그러나 제아무리 고위직에 있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천한 일이 된다.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도 자신의 것이라면 귀한 것이다. 노동을 해서 스스로 벌어먹고 산다면 생존능력이 있는 것이다.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벌어먹고 산다면 숭고한 일이다. 다만 계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오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은퇴해서 소일거리로 농사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네 시간은 수행하고 하루 네 시간은 의무노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도시에서도 가능하다. 반은 노동하고 반은 자기계발 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왔다.
어쩌면 나는 농사 짓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호미들고 밭매듯이 마우스로 수천, 수만번 클릭하기 때문이다. 모니터를 밭으로 하고 마우스를 호미로 하여 농사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도 농부라고 볼 수 있다.
수천, 수만번 클릭하여 패턴 형성하는 것은 밭매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작품이다. 완성해 놓으면 마치 예술품처럼 작품이 된다. 마치 그림 그려 놓는 것 같다. 그래서 인쇄회로기판 설계작업을 '아트워크(Artwork)'라고 한다. 다만 고객사 하나 만을 위한 작품이다.
밭만 매서는 안될 것이다. 마음 밭도 매야 한다. 하루일과 중의 반은 노동하고, 나머지 반은 자기계발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논밭도 매고 마음밭도 매는 한 나는 살아 있다.
2021-03-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