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곡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9. 06:25
곡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왔다." KBS 방송에서 본 것이다. 깊은 산중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마치 제비집을 연상케 하는 암자가 있다. 스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은퇴해서 산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써 새로운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개 나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살아도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번뇌와 망상이기 쉽다.
스님들은 대개 홀로 살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홀로 치열한 정진을 하며 사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스님도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막걸리 얘기를 써 놓았다. 매일 막걸리를 몇 통 마시는 스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술은 좋아도 마시고 술은 슬퍼도 마신다. 술 마시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마치 커피 마시듯이, 차 마시듯이 마시는 것이 술이다. 고된 노동을 끝낸후에도 마신다. 스트레스가 쌓여도 마신다.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사람도 마신다. 재가의 삶에서 술은 사실상 일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개 삶이 고단할 때 마신다. 그럼에도 출가의 삶을 살아가는 스님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불교에서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술마시지 말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불음주는 정언명령이 아니라 학습계율이다. 트레이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일이나 곡물로 만든 취기가 있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키워드는 삼가 하는 것과 학습계율이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스님이 술 마시는 것은 이해가 된다. 언젠가는 그만 둘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술을 곡차라고 한다. 곡식으로 만든 차라고 해서 곡차인 것이다. 다만 취기가 있는 곡차이다. 수많은 종류의 차를 마시는데 그 중에는 곡차도 있는 것이다.
스님이 곡차를 마시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 것 같다. 술은 스트레스 쌓일 때 마시거나 고된 노동 끝에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곡차를 즐겨 마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스님도 스트레스가 쌓여 서 마시는 것일까?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해야 함에도 번뇌를 야기하는 술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무료해서 마시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불음주가 오계 중의 하나로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가수행자가 매일 곡차를 마신다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재가자가 술 마시는 것을 비난하지 않지만 출가자가 마시는 것은 비난한다. 이는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음주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있다.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날씨가 더운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집중에 방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좌선할 수 없을 것이다. 술을 마시고 행선하면 어떻게 될까? 비틀거리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술 마시고 일 할 수 없다. 점심 때 낮술 마시면 그날 오후에는 아무일도 안된다. 집중이 안되기 때문이다. 공부도 그렇다. 공부는 집중을 필요로 하는데 술 마신 다음에 하면 어떻게 될까?
스님이 곡차를 마시는 것은 넌센스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함에도 취해 있다면 수행자라고 볼 수 있을까?
음주행위는 계를 깬 것이다. 계가 파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된다. 곧바로 복원시켜 놓아야 한다. 포살법회에서 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가 파한 상태로 있다면 수행자의 직무유기에 해당돤디.
매일 술을 마신다면 더 이상 스님으로 볼 수 없다. 늘 취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수행자로 볼 수 있을까? 계가 파한 상태로 있는 스님을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스님들은 번뇌를 야기하는 곡차를 마셔서는 안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 올 것이다. 참회하고 다시 계를 받아지닐 것이다. 그래서 불음주계를 학습계율이라고 한다. 불음주계는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평생 걸려 완성되는 것이다.
2021-03-29
담마다사 이병욱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왔다." KBS 방송에서 본 것이다. 깊은 산중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마치 제비집을 연상케 하는 암자가 있다. 스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은퇴해서 산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써 새로운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개 나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살아도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번뇌와 망상이기 쉽다.
스님들은 대개 홀로 살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홀로 치열한 정진을 하며 사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스님도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막걸리 얘기를 써 놓았다. 매일 막걸리를 몇 통 마시는 스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술은 좋아도 마시고 술은 슬퍼도 마신다. 술 마시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마치 커피 마시듯이, 차 마시듯이 마시는 것이 술이다. 고된 노동을 끝낸후에도 마신다. 스트레스가 쌓여도 마신다.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사람도 마신다. 재가의 삶에서 술은 사실상 일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개 삶이 고단할 때 마신다. 그럼에도 출가의 삶을 살아가는 스님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불교에서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술마시지 말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불음주는 정언명령이 아니라 학습계율이다. 트레이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일이나 곡물로 만든 취기가 있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키워드는 삼가 하는 것과 학습계율이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스님이 술 마시는 것은 이해가 된다. 언젠가는 그만 둘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술을 곡차라고 한다. 곡식으로 만든 차라고 해서 곡차인 것이다. 다만 취기가 있는 곡차이다. 수많은 종류의 차를 마시는데 그 중에는 곡차도 있는 것이다.
스님이 곡차를 마시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 것 같다. 술은 스트레스 쌓일 때 마시거나 고된 노동 끝에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곡차를 즐겨 마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스님도 스트레스가 쌓여 서 마시는 것일까?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해야 함에도 번뇌를 야기하는 술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무료해서 마시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불음주가 오계 중의 하나로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가수행자가 매일 곡차를 마신다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재가자가 술 마시는 것을 비난하지 않지만 출가자가 마시는 것은 비난한다. 이는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음주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있다.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날씨가 더운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집중에 방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좌선할 수 없을 것이다. 술을 마시고 행선하면 어떻게 될까? 비틀거리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술 마시고 일 할 수 없다. 점심 때 낮술 마시면 그날 오후에는 아무일도 안된다. 집중이 안되기 때문이다. 공부도 그렇다. 공부는 집중을 필요로 하는데 술 마신 다음에 하면 어떻게 될까?
스님이 곡차를 마시는 것은 넌센스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함에도 취해 있다면 수행자라고 볼 수 있을까?
음주행위는 계를 깬 것이다. 계가 파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된다. 곧바로 복원시켜 놓아야 한다. 포살법회에서 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가 파한 상태로 있다면 수행자의 직무유기에 해당돤디.
매일 술을 마신다면 더 이상 스님으로 볼 수 없다. 늘 취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수행자로 볼 수 있을까? 계가 파한 상태로 있는 스님을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스님들은 번뇌를 야기하는 곡차를 마셔서는 안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 올 것이다. 참회하고 다시 계를 받아지닐 것이다. 그래서 불음주계를 학습계율이라고 한다. 불음주계는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평생 걸려 완성되는 것이다.
2021-03-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