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우리는 코끼리 등 위에 탄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 07:47

우리는 코끼리 등 위에 탄 사람


사람들은 왜 감각에 민감할까? 사람들은 왜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될까? 내마음이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마음을 나의 마음이라 하지만 나의 마음이 아니다. 나의 마음에는 나의 마음이 너무 많다.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내가 있다.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흔히 마음공부한다고 말한다. 불교공부하는 것을 마음공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는 마음을 탐구하는 공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들어 보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잘 알 수 없다. 소위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책상을 ", "치며 이것을 말한다. 이것만 알면 견성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어떤 교리나 수행은 필요치 않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생각을 어떻게 때려잡을 수 있는지 말한다. 좋게 말하면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언어적 사유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어떻게 언어적 사유를 하지 않을까? 인간이 축생과 다른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다. 언어가 있어서 이성적 판단을 한다. 그럼에도 언어로써 생각을 하지 말라니! 그러는 그들은 언어로써 "이것"을 말한다.

그들은 모든 번뇌의 원인을 생각에 두었다. 언어로써 분별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언어로 개념화하기 때문에 개념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죽음도 없다. 말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로 분별하지 않으면 본래 죽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있다면 지금 여기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을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것은 결국 현존이다. 오로지 이것뿐이라고 했을 때 오직 지금여기를 말한다. 지금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 나의 참모습이라고 한다. 이를 본래나 또는 진짜나, 참나라고 한다. 때로 본래불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죄악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죄악도 언어적 개념이기 때문에 본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말 그들 말대로 "몰라, 몰라"하며 멍때리기하면 되는 것일까?

이것과 현존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언어적 존재임에도 분별하지 말자 하여 언어적 분별을 떠나서 살자고 했을 때 이는 축생으로 살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축생은 언어적 분별이 없어서 본능대로 살아간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마치 소처럼, 개처럼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이야말로 최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본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면 될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대로 사는 것이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정상이다. 속된 말로 "꼴리는대로"사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에게서는 교리도 없고 수행도 없다.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된다. 이들에게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과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본래 마음은 깨끗하다고 말한다. 분별로 인해 마음이 혼탁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분별하지 않으면 본래 깨끗한 마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 우리 마음은 본래 악하고 불건전한 것임을 말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오온에 집착된 마음을 깨야 한다. 잠재적 성향을 뿌리 뽑아야 하는 것이다. 담마를 공부하고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언어적 분별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소처럼, 개처럼 살 수 없다. 마음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놀랍게도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지도를 만들어 놓았다. 아비담마 논장을 보면 마음에 대해서 89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마음의 지도를 가지고 있으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지도가 없으면 헤매일 것이다. 테라와다에서는 언어로써 분별하여 마음의 지도를 완성해 놓은 것이다. 이는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시대 최고 수행지침서는 청정도론이다.

청정도론은 마음의 지도이자 수행지침서와 같다. 경전에 근거한 것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담마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접하면 "이것이 불교이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마음에 대하여 본래 깨끗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다르다. 이는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고,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고,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구경에 따르면, 마음은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마치 물고기가 땅바닥에 던져진 것처럼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34)라고 했다. 이런 마음은 제어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힘으로 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 하지만 제어되지 않으면 나의 마음이 아니다. 부처님은 통제 되지 않은 마음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나온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한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본능이나 감정에 지배받고 있음을 말한다.

이성적 판단을 할때는 마음은 통제된다. 그러나 대상을 접하면 마음은 동요된다. 마음 저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의식은 어떤 것일까?

흔히 무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드러난 의식보다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이 엄청나게 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무의식에 대해 코끼리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석정현 선생의 무의식연구소가 그것이다.

석정현 선생은 무의식을 코끼리 비유로 설명했다. 아마도 요즘 현대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비유라고 본다. 의식은 코끼리 위에 탄 주인이고 무의식은 코끼리와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이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고 코끼리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동물적 요소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통제가 되지 않는 동물적 본능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들 수 있다. 이를 무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석정현 선생의 코끼리 비유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적절하다고 본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코끼리 비유로 마음을 설명했다는 사실이다.

 


"
수행승들이여, 코끼리 조련사에 의해서 훈련된 코끼리는 달리더라도 한 방향,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으로 달린다. 수행승들이여, 말 조련사에 의해서 훈련된 말은 달리더라도 한 방향,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으로 달린다.” (M137.23)

 


부차님은 코끼리 조련사의 비유를 들어 마음을 설명했다. 우리 마음에는 여러 마음이 있는데 그 중에는 통제 되지 않는 마음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코끼리 같은 마음이다. 코끼리는 동물을 상징한다. 우리 마음에는 동물의 마음이 있음을 말한다.

코끼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코끼리가 날뛰기 시작하면 통제 되지 않는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무의식 저편에 있는 본능은 잘 통제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처럼 통제 되지 않는 마음에 대한 게송이 있다.


"
마음이여, 어떠한 경우이든 그대의 말을 들었다.
다생에 걸쳐 그대는 내게 항복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생겨난 것은 그대의 은혜를 입었고,
그대로 인한 고통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윤회했다.” (Thag.1132)

마음이여, 그대가 우리를 사제로 만들고,
그대가 전사도, 왕도, 선인도 만드는 것이니,
언젠가 우리가 평민이 되고 노예가 되고
하늘사람이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 (Thag.1133)

우리가 그대 때문에 아수라가 되고
그대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니,
언젠가 축생의 존재가 되고
아귀의 존재가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 (Thag.1134)

시시각각 가면놀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대는 거듭해서 나를 해치려 하지 않겠는가?
광인을 희롱하듯, 나를 희롱하지 않겠는가?
마음이여, 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 (Thag.1135)


통제되지 않는 마음을 잘 설명해 놓았다. 이는 마음의 그림자로서 무의식의 마음이다. 또한 본능적이고 감정적 마음이다. 이는 다름아닌 동물적 마음이다.

인간은 여러개의 마음이 있다. 어느 경우에는 이성적 판단을 하지만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도 있다. 무의식 저편에 있는 마음이 영향을 주었을 때 자신도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럴때 "내마음 나도 몰라."가 될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의식이 있을 때는 분별하지만 무의식이 작용할 때는 이성이 마비 되어 무분별 상태가 된다. 동물적 본능이 발현되는 것이다. 누군가 무분별을 말하며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을 말한다면 이는 소처럼, 개처럼 살자는 말과 같다.

본능에 충실한 삶은 감각에 의존하는 삶과 같다. 감각적 욕망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동물적 삶이다. 생각이 모든 번뇌의 원인이라 하여 "몰라, 몰라"하며 멍때리는 삶을 산다면 동물적 삶이나 다름 없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현존을 말한다. 무분별의 현존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코끼리 등 위에 탄 자들이다. 코끼리는 거대하고 힘이 세지만 등에 탄 코끼리 주인은 왜소하고 힘도 약하다. 평소 코끼리는 주인이 하자는대로 한다. 그러나 매번 그러는 것이 아니다. 통제에서 벗어났을 때 어떻게 할 수 없다. 코끼리 힘을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코끼리 같은 것이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잘 통제 되지 않는다. 또 코끼리처럼 힘이 세서 압도당한다.

무의식은 마음의 그림자이다. 이에 대해 무의식연구소 석정현 선생은 "의식은 코끼리 위에 앉은 주인으로 비유하여 코끼리를 잘 훈련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의식은 거대한 쓰레기통과 같은 무의식을 예의 주시하면서 긴밀히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무의식은 쓰레기와 같다고 한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동물적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마음의 찌꺼기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의식은 오물장 같은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과의 관계는 코끼리 등에 탄 주인과 코끼리 관계와 같다. 주인은 사람이고 코끼리는 동물이다. 사람은 이성적이지만 힘이 약하다. 동물은 본능적이지만 힘이 강하다. 힘으로는 코끼끼를 당해낼 수 없다. 매번 감각적 욕망에서 패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욕망을 다스려야한다고 말했다.

부처님의 열가지 명호중의 하나는 조어장부이다. 이 말은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로는 뿌리사담마사라티(purisadammas
ārathī)이다. 뿌리사는 사람을 뜻하고, 담마는훈련된'의 뜻이고, 사라티는 전차를 모는 사람 또는 마부를 뜻한다. 코끼리 조련사로서의 부처님이다.

우리는 코끼리 등 위에 탄 사람과 같다. 코끼리는 동물로서 힘이 세고 본능적이다. 마음은 마치 코끼리 같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고, 이런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고, 이런 마음은 제멋대로 이고, 이런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치 조련사가 미쳐 날 뛰는 코끼리를 조련하듯이 다스려야 한다.


"
이제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코끼리조련사가 미친 코끼리를 길들이듯,
그대를 힘으로 나의 지배 아래 두리라.” (Thag.1145)

조련사가 곧바로 달리는 말을 길들이듯,
그대를 잘 길들이고 확고하게 정립시켜
마음을 수호하는 님들에 의해 항상 섬겨지는
지복의 길에 내가 들어설 수 있으리라.” (Thag.1146)

코끼를 강한 밧줄로 기둥에 묶듯,
그대를 힘으로 명상대상에 붙들어 매리니,
잘 방호하고 새김으로 잘 닦아서
그대에게 일체 존재에의 의착이 없게 하리라.” (Thag.1147)

"
삿된 길을 따르는 자를 지혜로써 물리치고
노력으로 제어하고, 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고,
원인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보아서,
그대는 위없는 것을 설하는 님의 상속자가 되라.” (Thag.1148)

마음이여, 네 가지 전도에 지배되어
야인처럼, 그대는 나를 끌고 다녔다.
그대는 결박의 밧줄을 끊어주는
연민의 위대한 성자를 섬기지 않겠는가?” (Thag.1149)


2021-04-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