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가 괴롭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일체가 괴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새벽이다. 눈을 떠서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3시 반이다. 좋은 시간이다.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다. 온전히 내시간이다. 편안한 자세로 사유한다. 떠 오른 생각을 지켜본다. 결국 “어떻게 쓸까?”에 대한 것이다.
잠을 더 잘 수 있다. 더 자면 쓸데없는 꿈만 꾸게 된다. 때로 좋은 꿈도 꾸지만 대개 허망한 것이다. 차라리 깨 있는 것이 낫다. 그래서 선사들이 입적할 때 이 세상을 꿈속의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좋은 생각이 올라오면 글로 남겨 놓고자 한다. 생각은 한번 지나가면 끝이다. 꿈속에서도 좋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잡을 수 없다. 생각나는 즉시 잡아야 한다.
새벽에 쓰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이럴 땐 엄지에 맡겨야 한다. 엄지 가는 대로 치는 것이다. 단 6시까지이다. 6시가 넘으면 아침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행복한 시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종종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에 지배받는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아꾸살라(akusala)라고 한다. 흔히 십악으로 표현된다. 천수경에서 말하는 십악참회를 말한다. 신업, 구업, 의업, 이렇게 삼업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순간 업를 짓는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선업도 있지만 악업이 더 많은 것 같다. 내버려 두면 더 큰 악업을 지을 것이다. 스톱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멈추는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 지금 여기서 나의 모습은 과거의 원인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 행복해도 과거의 결과이고 지금 괴로워도 과거의 결과에 대한 것이다.
결과는 바꿀 수 없다. 지금 행복하다면 즐거움이라는 과보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괴롭다면 괴로운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괴롭다면 괴로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길 바란다. 행복한 자나 괴로운 자나 바라는 것은 행복이다.
지금 괴로움의 과보를 받고 있다. 지금 괴롭다는 것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결과를 바꿀 수 있을까? 괴로움이 행복으로 바뀔 수 있을까? 지금 불행하다고 하여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며 노래한다고 해서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결과는 바꿀 수 없다. 원인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려면 새로운 원인을 지어야 한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원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라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지금 이 모습은 과거의 원인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행복도 불행도 과거 지은 행위에 따른 것이다. 이를 업(kamma)라고 한다. 그것이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내가 지은 것이다. 조건발생한 나의 업이다. 그래서 나는 업의 상속자이다. 좋든 싫든 나는 나의 업의 상속자이다.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업을 지으면 나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A10.48)
나는 업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해지기 위한 새로운 업을 지을 수 있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지금 괴로움이 즐거움이 될 수 없다. 어떻게 해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 결과는 결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한 이유라고 본다.
사성제의 구조를 보면 원인과 결과 순서가 뒤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가 먼저 나오고 다음에 원인이 나온다. 그래서 고성제가 앞서 나오고 뒤에 집성제가 따른다. 마치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인 것처럼 보인다. 인과가 아니라 과인(果因)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왜 결과로서 나타나는 고성제를 먼저 설했을까? 그것은 지금 괴롭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과 같다. 지금 결과로서 나타나는 괴로움을 인정하라는 말과 같다. 괴로움을 과거 자신이 지은 행위(業)의 결과로서 받아들일 때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 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노병사에 대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결과로서 괴로움을 먼저 인정할 것을 말씀하셨다.
생노병사는 큰 괴로움이다. 너무 크고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괴로움인 줄 모른다. 특히 태어남과 죽음은 경험되지 않는다. 다만 노와 병은 생의 과정에서 괴로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괴로움은 일상에서 겪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모두 괴로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괴로움은 바꿀 수 없다.
결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괴롭다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결과로서 나타난 괴로움을 수긍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결과를 수용해야 그 다음 단계가 성립된다. 이렇게 괴로움을 인정하는 것이 집성제이다.
중병환자가 있다. 환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용한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과로서 나타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그렇다.
부처님은 과보로 나타난 괴로움을 먼저 받아들이라고 했다. 결과로서 나타난 괴로움에 대하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괴로움을 수용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괴로움을 인정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괴로움에서 행복으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사성제이다.
고성제는 결과로서의 괴로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괴로움을 철저히 알면 나머지도 꿰뚫어 알 수 있다고 했다. 고성제를 철견하면 나머지 진리도 꿰뚫을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수학을 잘 하는 학생이 영어도 잘하고 국어도 잘하는 것과 같다.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알면 나머지 것들도 자동으로 알게 된다. 그것은 원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0)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 소멸, 길도 본다고 했다. 사성제 중에서 어느 것 하나이든지 꿰뚫으면 나머지 것들도 꿰뚫음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고성제의 꿰뚫음을 예로 들었다.
지금 괴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즐겁고 행복하더라도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느낌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를 괴롭다고 보았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아,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행복해도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해야 한다. 오욕락은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도 괴로움이라고 보아야하는 것은 우리가 오취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취온적 존재는 괴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고성제를 설한 것은 결국 우리가 오취온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21-04-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