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상베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상베가
“당신은 살아오면서 남을 감동시킨 적이 있는가?” 이 말은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나온 말이다. 수많은 대사 중에서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과연 나는 남을 간동하게 한 적이 있을까?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1순위는 히말라야 등정이다. 그 많고 많은 것 중에서 하필이면 히말라야일까? 죽기 전에 꼭 해 보아야 할 것,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것이 많은데 왜 히말라야가 1순위일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경외이다. 이를 외경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쾌한 자연의 경이에 감동하지 않을 자 어디 있을까?
살아오면서 종종 경이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동반한 경이는 느끼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전율을 동반한 감동은 극히 드물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체가 된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경외라고 해야 할까 외경이라고 해야 할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경외(敬畏)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를 대할 때 이런 느낌이다. 유일신교 종교에서 자신의 신을 생각할 때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외경은 어떨까?
외경(畏敬)은 두려워하고 공경함이다. 경외와 같은 뜻으로 보이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이런 것이다. 섬 사람들이 어느 날 시뻘건 불을 내뿜는 화산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그것은 아마도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이일 것이다. 이를 외경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대자연의 경이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를 기쁨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눈물날 정도로 감동을 주었다면 이를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두려움-전율-감동”이라는 복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살아오면서 두려움-전율-감동을 느낀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한번도 느끼지 못하고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적 즐거움을 말하지 않는다. 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며 두려움-전율-감동을 느낄 기회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자연을 접하면 숨이 멎을 듯한 감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두려움과 전율을 동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자연은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한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 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실크로드 순례였다. 2013년 돈황에서부터 시작하여 선선, 하미, 투루판을 경유하여 우루무치까지 이어지는 2주간의 장정을 말한다. 비록 패키지 여행이긴 했으나 잠시 대자연의 경이를 맛보았다.
자연의 경이는 인공의 경이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백층이 넘는 빌딩을 보면서 감탄하지만 초원 끝에 아스라히 보이는 설산과 비할 바가 아니다. 투르판 베제크리크천불동 가는 길에서 본 사막의 오아시스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중국 명산 잔도를 따라 가다 눈앞에 펼쳐 지는 진경산수화 같은 자연 앞에서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은 쾌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칸트에 따르면 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또 하나는 ‘숭고’라고 했다.
대자연을 접하면 아름다움을 넘어서 숭고함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대자연도 '두려움-전율-감동'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그럴까? 이를 칸트는 숭고함으로 표현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는 어떤 것일까?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수학적 숭고이고, 또 하나는 역학적 숭고이다.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면서, 밤하늘에 수많은 별을 보면서 느끼는 쾌를 수학적 숭고라고 한다. 그리고 아찔한 절벽 앞에서,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우 속에서 느끼는 쾌를 역학적 숭고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아름다움, 수학적 숭고, 역학적 숭고를 말한다.
수학적 숭고란 무엇일까? 이런 것이다. 숫자를 세는 것에는 한정이 있다. 조단위를 넘어 가면 경이 될 것이다. 그 너머는 무엇일까? 아무리 큰 자연수를 상상하더라도 그 보다 큰 자연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슬슬 좌절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때 이성이 등장한다.
아무리 큰 수를 상상해도 그것 보다 큰 수가 있다. 숫따니빠따 ‘꼬깔리야의 경’(Sn.3.10)에 따르면 1꼬띠가 있다. 1꼬띠는 10에 7승이다. 1빠꼬띠는 10의 14승이고, 1꼬끼빠꼬띠는 10의 21승이고, 1나후따는 10의 26승이고, 1닌나후따는 10의 35승이고, 1압부다는 10의 42승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큰 수를 상상해도 그 것보다 더 큰 수가 항상 있다. 이럴 경우 절대적으로 가장 큰 수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연수를 하나의 총체적인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무한이다. 그래서 “가장 큰 자연수는 무한수이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어떤 대상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무한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머리로는 잘 알 수 없다. 이럴 경우 이성도 좌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불쾌한 감정에 지배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이라는 것을 우리가 포착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한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불쾌의 감정은 쾌의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타나는 감정을 수학적 숭고라고 말한다.
수학적 숭고의 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이나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 크기에 압도되어 상상력과 이성이 그것을 포착하지 못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이성을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역학적 숭고는 어떤 것일까? 아찔한 절벽에 섰을 때 공포 같은 것이다. 무시무시한 폭풍우 같은 것이다. 자연의 힘에 완전히 압도된 것을 말한다. 또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은 이런 거대한 힘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두 다리를 잃은 퇴역 장교가 폭풍우 맞서는 장면이 있다. 폭풍우속에서 신하고 한판 붙어 보는 것이다. 공포스런 상황속에서도 인간은 공포에 굴하지 않을 수 있다. 퇴역장교는 거대한 힘에 압도되어 공포와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힘과 맞장을 뜨고 있는 자신의 내면에 힘을 보면서 쾌를 느낀다. 이처럼 불쾌함 속에서 나타나는 쾌를 역학적 숭고라고 한다.
역학적 숭고를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은 숭고함은커녕 불안에 떨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숭고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보다 안전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 안전한 장소에서 이러한 공포스런 상황을 목격할 때, 예를 들어 아찔한 절벽 앞에서 또는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우를 안전한 건물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역학적 숭고를 느낀다는 것이다.
경외, 외경, 두려움-전율-감동, 수학적 숭고, 역학적 숭고 이런 것들은 자연에만 있는 것일까? 종교적 감동도 자연의 감동 못지 않다. 오히려 그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이 있다. 신을 보았다든가 천상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특별한 정신적 상태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행으로 체험된 경험은 보편적이라는 사실이다. 명상중에 니밋따(表象)가 대표적이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적 체험은 자연에서 본 경이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자연의 예를 들어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를 말했다. 이와 같은 숭고라는 용어는 불교에서도 발견된다. 빠알리어 ‘상베가(saṃvega)’라는 말이 그것이다.
초기불교용어에 상베가가 있다. 한마디로 두려움을 포함하는 경이감, 외경, 경외감을 말한다. 어쩌면 칸트가 말하는 숭고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베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현세에서 많은 행복과 희열을 느끼며, 번뇌의 부숨을 위하여 근원적 노력을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다.”(It.30)
현명한 수행자는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한다고 했다. 또 두 가지 원리를 갖추었을 때라고 했다. 여기서 두 가지 원리는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살면서 경외를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생명의 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죽어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어서 악처에 태어날 수도 있다. 이는 다름아닌 윤회에 대한 경외라고 볼 수 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말한다. 그래서 태어남 등의 경외의 토대를 조건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언제나 해법을 제시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방편에 맞게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말한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줄어들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늘어나게 함을 말한다. 이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초기경전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세상에 고민하던 것들에 대한 해법이 모두 들어 있는 것 같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모르고 사는 것과 같다. 마치 자신의 옷에 진귀한 보물이 있음에도 있는 줄조차 모르고 사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경이로움 그 자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수학적 숭고 이상이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에서 무한을 본다. 마치 비행기에서 본 무한의 우주 같은 것이다. 또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것이다.
무한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는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알고 나면 두렵지 않다. 마치 역학적 숭고와 같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화산이 분출해도 안전지대에 있다면 경이로운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다.
누구든지 부처님 설법을 들으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고 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사자의 경’을 보면 천신들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서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었다. 왜 떨었을까?
천신들은 오래 산다. 인간의 백년은 삼십삼천의 반나절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겁단위로 사는 색계와 무색계 천신들은 너무 오래 살아서 영원히 산다고 착각했다. 이런 사실을 알려 주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는 경에서 천신들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S22.78)
천신 중에 바까 하느님(baka brahma)이 있다. 색계 초선천에 사는 망상적 하느님을 말한다. 하느님 바까는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영원히 사는 자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바까에게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은 존재임을 알려 주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S22.78)이라고 한 것이다.
영원주의자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에게 자아는 본래 없는 것이고, 세상은 항상 하지 않다고 말했을 때 충격에 빠질 것이다. 이어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자아가 상실되는 듯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부처님 설법을 들으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떤다. 이를 ‘지혜에 의한 두려움(ñāṇabhaya)’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처음에는 떨게 되어 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했을 때 이를 부정할 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여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특히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 그렇다. 하물며 영원히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천신들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 등으로 인한 두려움의 지혜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설법은 두려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감동도 준다. 어떤 감동인가? 그것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감동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불사(不死: amata)법문을 말한다.
사성제에서 멸성제에 대한 법문이 있다. 갈애를 소멸하면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에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법문을 말한다. 이것이 감동이다. 전율을 동반하는 감동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 설법을 들으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를 접하고 감동에 빠졌다.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탁월한 선택에 속한다. 매일 감동의 연속이다. 가르침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경외감부터 시작 되었다.
태어나면 죽기마련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죽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회함을 말한다. 그것도 육도윤회이다. 그러나 믿는 바가 있다. 가르침을 따라 이 길로 가면 틀림없이 끝이 보일 것 같다는 확신을 말한다.
존재의 두려움은 다름 아닌 윤회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윤회의 두려움 때문일까 사람들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영원주의에 빠진다. 또 “몸이 무너져 멸하면 몸에서 파생된 정신도 멸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라고 보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부처님은 해법도 제시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감로의 가르침, 즉 불사의 가르침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그 중에서도 도성제이다.
부처님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가르침을 설 했을 때 희망이 보였다.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불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의 메세지와 같은 것이다. 이는 감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냐나상베가(ñāṇasaṃvega), 즉 ‘지혜에 의한 감동’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감동의 도가니라 아니 할 수 없다. 초기경전 어디를 열어 보아도 감동적 문구로 가득하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경이적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종교적 정서(religious emotion)을 상베가라고 한다.
상베가는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지혜에 의한 감동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지혜에 의한 감동은 자연의 경이와 비할 바가 아니다. 칸트가 말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와도 비할 바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를 한마디로 상베가(saṃvega)라 해야 할 것이다.
2021-04-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