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가타를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더니
테라가타를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더니
저녁시간이다. 저녁이 되면 약간 흥분되는 것 같다. 약간 들뜬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도시의 불빛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도시에서 네온싸인은 화려하다.
어둠이라 하여도 같은 어둠이 아니다. 새벽 어둠은 차분하다. 곧 여명이 밝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녁의 어둠은 혼돈과 혼란의 어둠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들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눈으로 귀로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TV시청하는 것이 고작이다.
집에서 뛰쳐나왔다. 저녁시간이라도 집에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사무실로 향했다. 작은 일인사무실이야말로 피난처이다. 저녁에 할 일 없어도 시간 보내기 좋다. 대개 유튜브시청으로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오늘은 자제했다. 그 대신 경전을 펼쳐 보았다.
테라가타에 손이 갔다. 아무곳이나 열어 보았다. 짤막한 사구게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게송을 읽어 보았다. 읽자 마자 마음이 움직였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게송이 있다니!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만 아름다우 게송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게송을 보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못지 않다.
“다섯 문의 초암에
원숭이가 들어가
똑 똑 노크하면서
문마다 돌아다닌다.”(Thag.125)
“원숭이여, 멈춰라, 달리지 말라.
예전처럼 그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지혜로 제어되었으니
여기서 결코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Thag.126)
발리야 존자가 읊은 게송이다. 다섯 문의 초암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한다. 원숭이가 다섯 문을 드나들듯이, 마음 역시 시각이나 청각 등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을 드나드는 것이다.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끊임 없이 눈을 두리번 거린다. 그리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닌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끊임 없이 감각의 대상을 찾아 다닌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욕망대로 사는 것이다.
발리야 존자는 “원숭이여, 멈춰라”라고 했다. 마음을 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원숭이 같은 마음을 멈출 수 있을까? 이는 제어로서 가능하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악한 것이다. 중생들은 본래 탐, 진, 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제어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제어하려면 먼저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 앉아서 좌선을 하면 마음을 멈출 수 있다. 호흡을 따라 가다 보면 미쳐 날뛰는 듯한 마음은 제어된다.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마음에 대하여 “예전처럼 그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길(道)에 대한 지혜로써 오염에 의해 조작된 취착들을 끊음으로써 궁극의 제어에 도달했다.”(ThagA.II.7)라고 했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탐, 진, 치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의 속성을 알아 제어할 수 있다. 마치 코끼리 조련사처럼.
“일찍이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이 마음은 즐거움을 쫓아다녔다.
사나운 코끼리를 조련사가 갈고리로 제어하듯,
오늘 나는 그것을 철저히 제어하리라.”(Thag.77)
하타로하뿟따 존자가 읊은 게송이다. 마음은 탐욕 등이 일어날 때마다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감각적 대상을 쫓아다닌다. 마치 발정난 코끼리와도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발정난 코끼리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 유능한 조련사는 몰이막대를 이용하여 발정난 사나운 코끼리를 제어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라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으로(yonisomanasikarena)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라까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괴로운 것이다.
에라까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
에라까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구하는 자는
괴로움을 구하는 것이다.
에라까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구하지 않는 자는
괴로움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Thag.93)
에라까 존자가 읊은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감각적 욕망은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왜 괴로운 것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물질적 쾌락의 욕망과 정신적 쾌락의 욕망을 토대로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 생겨나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삼고는 고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에서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위험은 더 많다고 설했습니다.”(M22)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여러 비유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해골의 비유가 있다. 개가 해골을 먹이로 하지만 살점이 없음을 말한다. 먹음직해 보이지만 먹을 것이 없음을 말한다. 마치 뼈다귀해장국집에서 뼈를 발라 먹는 것과 같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마치 개와 같은 것이다. 개가 개뼈다귀를 먹기 위해서 애써 보지만 살코기가 거의 없어서 먹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개와 같아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 보지만 만족이 없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하여 즐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가르침이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괴롭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상윳따니까야 ‘본다면의 경’에 따르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했다. 이것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에라까 존자는 결론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구하는 자는 괴로움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도 괴롭고 미래도 괴롭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지금 괴로운 것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괴롭고, 미래 괴로운 것은 지옥고의 원인이고 윤회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저녁에 들뜬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한다.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다 보면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 든다. 남는 것은 없다. 일시적으로 즐거울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불만족이 된다. 그래서 또 다시 즐길거리를 찾는다. 마치 원숭이가 눈을 두리번 거리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가는 것과 같다.
감각대상을 찾아 다니는 것은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과 같다. 감각적 쾌락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니까야 도처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현명한 제자라면 감각적 쾌락을 개뼈다귀처럼 보아야 한다.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먹을 것이 없는 개뼈다귀 같은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개가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원숭이가 되는 것 같다. 감각을 추구하는 삶은 본능적 삶과 같은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물적 삶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적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이렇게 멈추어서 관찰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반대로 보게 된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들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한,
모두가 그들에게 갖고 싶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다.”(Stn.759)
“그들은 신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이것들이야말로 즐거움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질 때에는
그것을 괴로움이라 생각한다.”(Stn.760)
“고귀한 님들은 존재의 다발을
소멸시키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본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
이것은 정반대이다.” (Stn.761)
“다른 사람들이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즐거움이라고 안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Stn.762)
2021-06-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