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가 정의롭지 않으면, 봉은사 승려들의 집단폭행과 인분 투척 사건
리더가 정의롭지 않으면, 봉은사 승려들의 집단폭행과 인분 투척 사건
역사는 진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역사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퇴행이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까?
정치에서 퇴행이 발생했다.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탐욕이 치성할 때 퇴행할 수밖에 없다.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분야에서 퇴행이 진행되는 것 같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봉은사에서 똥물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공중파 방송에서 저녁 메인뉴스에 나오기에 충분하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또 한번 망신을 당했다.
한때 승려들이 도박을 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게 했다. 이번에는 재가불자에게 발길질을 한 것이다. 오물을 부은 것은 결정적이다. 세상에 이런 종교가 어디 있을까? 한국불교 조계종단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제 봉은사 앞에서 열린 규탄대회에 참가했다. 참가자는 많지 않다. 1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은 경찰버스를 네 대 보냈다. 봉은사 승려와 신도들의 폭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시위를 제한 하는 것 같았다.
규탄집회는 계속된다. 매주 일요일 오전에 모여서 확성기를 이용하여 알린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폭행가담 승려가 사과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번 폭행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자승 전총무원장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된다.
자승 전총무원장은 조계종단을 장악했다. 조계종단을 대표하는 행정수반인 총무원장도 자승의 영향력하에 있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신임 총무원장은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자승이 조계종단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 신임 총무원장은 바지총무원장이 되는 것이다.
자승은 현재 봉은사 회주로 있다. 봉은사 경내에 거처가 있는데 초호화판이라고 한다.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승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승은 자신이 대표로 되어 있는 은정재단에서 도박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스님들이 도박하기 위한 카지노를 만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룸살롱 출입을 하여 세간의 비난을 받은 바도 있다.
자승은 스님일까? 깨어 있는 불교인이 보기에 그는 스님이 아니다. 머리 깍은 처사, 승복입은 깡패와도 같다. 조폭의 보스와 같은 이미지이다.
자승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자승이 왜 정치인인가? 이번 대선 때 속칭 '굥'의 당선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대선을 불과 20일 남겨놓고 승려대회를 연 것이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봉이김선달 발언을 문제 삼아 종교편향으로 몰아 갔다. 20여만표 차이로 굥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한국불교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자승의 등장과 관련 있다. 자승이 총무원장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승은 두 번 총무원장을 했다. 이후 막후 실세로 있다. 자승 이후 총무원장들은 자승의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자승이 있는 한 한국불교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기른 자승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반승반속의 모습이다.
반승반속은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과 같다. 경에서는 “마치 쇠똥을 바르고, 양쪽 끝이 타다 남은 태워진 화장용 장작” (S22.80)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을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반승반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1) 또한 계행이 악한 사람은 계행이 악하기 때문에 신들과 인간이 기뻐하지 않고, 동료수행자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계행이 나쁜 자가 비난받을 때 괴로워하고, 계행을 지키는 자가 칭찬받을 때 후회한다.
2) 그가 악계자인 것은 대마로 만든 옷처럼 추악한 것이다.
3)그리고 그의 견해에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는 오랜 세월 괴로운 곳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고통에서 떠날 수 없다.
4) 시물이 주어지더라도 받는 그들에게 커다란 과보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시물은 가치가 없다.
5) 여러 해 쌓인 분뇨구덩이처럼 청정해지지 어렵다.
6) 화장터의 타다 남은 장작처럼 출가와 재가의 양자에서 소외된다.
7) 수행승이라고 선언하더라도 수행승이 아니니, 마치 소들을 뒤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8) 모두가 원적인 것처럼 항상 두려워한다.
9) 죽은 시체처럼 함께 살 수 없다.
10) 배움 등의 덕성을 지녔더라도, 동료수행자들의 존경을 받을 수가 없으니, 바라문들이 대하는 화장장의 불과 같다.
11) 수승한 것을 증득 할 수 없으니, 장님이 형상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2) 정법에 희망이 없으니, 짠달라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13)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고통스러우니, ‘불더미의 비유에 대한 법문’에서 설한 괴로움을 받는 것과 같다.”
(Vism.I.154)
이것이 반승반속이다. 자승에게서 반승반속을 본다. 반승반속은 똥통과 같다. 반승반속은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도 같다. 반승반속에게 보시해도 공덕은 없다.
반승반속은 당나귀와 같다고 했다.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 같은 것이다. 자승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상월선원에서 행각이 대표적이다.
리더가 정의롭지 않으면 아래 사람들도 정의롭지 않다. 자승이 상월선원이라는 천막선원을 만들어 놓고 수행자라 하여 앉아 있을 때 불자들은 순례 갔었다. 동국대 H교수는 드론을 띄어서 찬양했다.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기른 반승반속에게 잘 보이고자 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왕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왕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왕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사제들과 장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사제들과 장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도시와 지방의 백성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A4.7)
왕이 정의롭지 못하면 백성도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정의롭지 않은 대통령을 뽑았을 때 정의롭지 않은 세상이 된다. 정의롭지 않은 종교지도자가 출현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봉은사 똥물투척 사건은 우연이 아니다. 봉은사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난 것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여법하지 않은 자가 실세가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버려 두면 제2의 똥물투척사건, 제2의 폭행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승려가 승려를 폭행한 것은 뉴스거리가 안된다. 그러나 승려가 신도를 폭행한 것은 뉴스가 된다. 더구나 똥물까지 퍼부었다면 뉴스 플러스가 된다. 방송을 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승과 자승일당은 해종행위를 한 것과 다름 없다. 그럼에도 불교계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 바지사장에 불과한 신임총무원장은 다 끝난 일이라고 말한다.
재가불자가 스님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교계가 가만 있다면 불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다행스럽게도 교단자정센터에서는 매주 일요일 봉은사 일주문 앞에서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인디언 기우제 식으로 폭력승이 처벌 될 때까지, 자승이 봉은사 회주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된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봉은사 똥물 투척 사건과 관련해서 3차 규탄대회에 참가 했다. 참가해서 3분 발언을 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려 놓은 글을 읽었다. 글을 쓰는 것은 자신 있지만 연설에는 자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차 집회가 운판(http://www.unpan.kr/news/articleView.html?idxno=400)에 실렸다. 유튜브에도 뜬 것이다. 이런 일로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매맞고 살 수 없다. 뜻 있는 재가불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분노할 것이다. 이에 폭력승 처벌을 위한 서명운동이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명 주소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fwfojUOLvkl4AkUsvWx-wPGgh3cvvDYb9RmwxkzR2jqtxGA/viewform' 이다.
봉은사 인분투척 사건은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있어서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승려들은 왜 이와 같은 행위를 했을까? 페이스북 글에 대하여 A스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 주었다.
"스님들이 목탁쳐서 벌어가지고 전국 사원에 종무윈들 월급주고 사는데 인욕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사람 때려서 이런욕을 듣게하나. 내것주고 뺨맛는 바보 스님들아 ! 정진하고 기도하는 스님들과 일선에서 포교하는 스님들께 미안하다. 나무관세음보살"
A스님이 대신 사과 했다. 이를 대리사과라 해야 할 것이다. 스님은 지리산 네 평 작은 암자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다. 노스님이 폭력승을 대신하여 사과한 것이다.
A스님은 폭행승에 대하여 바보스님이라고 했다. 왜 바보 스님인가? 이는 "내것주고 뺨맛는 바보 스님들아!"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흔히 '뭐주고 뺨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고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다. 폭행승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행위를 했다. 폭행승들은 졸지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일은 벌어졌다. 엎질러진 물이다. 숨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숨길수도 없다. 폭행승들은 재가불자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맞아도 싸다는 마음이 있는 한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가만 있으면 다 죽는다. 가만 있으면 한국불교를 위해서나 승단을 위해서나 재가불자들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 잘못 했으면 처벌 받아야 한다.
"소들이 강을 건너는데,
우두머리 황소가 잘못 가면,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A4.70)
2022-09-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