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저 꽃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6. 09:07

저 꽃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는데


자꾸 딴나라 사람하고 얘기하는 것 같다. 자꾸 핀트가 어긋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아니라고 한다. 저렇게 말해도 아니라고 한다. 가르침에 대해서 말해도 아니라고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말한다.

살불살조,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누가 말했을까? 누군가 말한 것이다.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문자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경전도 부정된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 부처님 말씀도 부정된다.

어제 식사모임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스님 말에 따르면 승가대학에 학인스님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출가자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미 두 자리 숫자가 된지 오래 되었다. 이에 "한국불교는 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한국불교는 망했다." 이렇게 말하면 발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게의치 않을 것이다. 한국불교가 망하든 말든 자신의 할 일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페이스북에서 B스님의 글을 읽었다. 스님은 자신의 은사스님 얘기를 했다. 은사스님은 동진출가한 스님으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에서 방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임종하기 전에 마지막 법문에서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구나저 들에 핀 꽃에게 물어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사들이 종종하는 말이 있다.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모르오!"라고 말하기도 한다. 임종 때도 "나는 모른다."라고 말한다. 스님이 아는 것은 무엇일까?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까? 이런 노스님에 B스님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게 불교 입니까?"라며 개탄했다.

노스님은 공부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노스님은 경전을 보지 않았음에 틀림 없다. "오직 모를뿐!"이라고 했을 때 정말 몰랐을 것으로 본다. "저 꽃들에게 물어 봐라."라고 말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낭만적이기도 하고 멋지기도 한 말이다. 그런 한편 무책임한 말이기도 하다. 설령 그 말에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을지라도 언어로써 표현할 능력이 없다면 공부가 덜 된 것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다. 더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부처님이 노스님처럼 "나는 모른다. 꽃들에게 물어 봐라."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불교는 연각승처럼 부처님 자신의 깨달음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마지막 열반의 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설법했다. , 응송, 게송 등 구분교의 형태로 팔만사천법문을 남겼다. 깨달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침묵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빠알리 니까야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리는 본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갖가지 비유와 방편으로 설명했다. "열반은 안전하기가 섬과 같고, 열반은 안온하기가 동굴같다."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부처님은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 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여 고성제를 설했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고 또는 팔고에 대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 비로서 '확신에 찬 믿음(saddha)'으로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

B
스님은 은사스님의 임종 말씀을 아쉬워했다. 나이가 어려서 출가해서 평생 절에서 산 노스님이 후학들에게 "저 꽃들에게 물어 봐라."라고 말 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에 대해서 B스님은 이렇게 써 놓았다.

"
나 라면 죽기전에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토록 희열과 새로운 눈을 얻어서 기뻐 하면서 '사성제가 성스럽고 열반으로 인도 한다.'라고 하신 '사성제(四聖諸)를 깨쳐라!' 라고 할 것 입니다."

B
스님은 사성제에 대해서 말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마치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사성제로 포섭됨을 말한다. 그래서 임종하게 되면 후학들에게 "사성제를 깨우쳐라!"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참으로 호쾌한 말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적 개념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본래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함부로 쓰면 독이 된다. 정말 부처님도 죽이고 불교도 죽이는 것이 된다.

살불살조는 중국 조사가 말했다. 한국 스님들은 철썩 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다.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M
ātara pitara hantvā,
r
ājāno dve ca khattiye,
Ra
ṭṭha sānucara hantvā,
an
īgho yāti brāhmao.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Dhp.294)


수수께끼 같은 게송이다. 어머니는 갈애를 상징하고 아버지는 자만을 상징한다. 게송에서 어머니를 죽이라고 한 것은어머니가 사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갈애가 세 가지 세계[三界: tiloka]의 존재를 낳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것은 “ ‘내가 있다는 자만나는 이러이러한 왕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게송에서는 두 왕도 죽이라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백성들이 왕에게 가는 것처럼 모든 형이상학적 견해는 영원주의(常見: sassatadi
ṭṭhi)와 허무주의(斷見: ucchedadiṭṭhi)의 두 가지 견해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것들을 왕족의 두 왕이라고 한다.”(DhpA.III.454)라고 설명 되어 있다.

게송 세 번째 구절을 보면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순다(Ra
ṭṭha sānucara hantvā)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역시 주석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왕국과 그 신하는 열두 가지의 감역(十二處: dvādasāyatanani)을 말하고 그것들의 편재적 성격 때문에 왕국이라고 불린다. 감역에서의 쾌락을 추구하는 갈애는 감역의 왕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하는 세무원처럼 신하라고 불리운다.” (DhpA.III.454)라고 설명 되어 있다.

게송 마지막 구절은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an
īgho yāti brāhmao)’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라문(brāhmaa)이라는 말은 브라만교의 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재해석 한 말로서 번뇌를 부순 아라한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수수께끼와 같은 게송을 읊었을까? 이는 인연담을 보면 알 수 있다. 법구경 294번 게송 인연담은라꾼따까 밧디야와 관련된 이야기Laku
ṇṭakabhaddiyattheravatthu)’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장로 라꾼따까밧디야가 부처님이 계신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보라. 이 수행승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거닌다.”라고 말씀 했다. 이 말씀에 수행승들은 어리둥절하고 의아해 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 보다가세존이시여,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써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없이 지낸다.”(Dhp.294)라고 말씀 하셨다.

법구경 294번 게송은 선가의 살불살조론의 원형이 된다. 조사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차용해서 다른 용도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경전과 주석서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노스님은 임종 법문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꽃들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멋 있는 법문일 수도 있고 무책임한 법문일 수도 있다.

어느 스님은 살불살조를 말하면서 경전을 부정하고 가르침을 부정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살불살조론과 같은 무책임한 말 때문에 한국불교가 이지경이 되었다. 한국불교는 망했다. 조사스님을 비롯하여 그 후예들이 부처를 죽여 버렸으니 한국불교는 망한 것이다.


2023-0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