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에게 받은 보드가야 보리수 화분
아름다운 청년에게 받은 보드가야 보리수 화분
공원에 가면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애완견에 치마를 입혔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애완견을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동물사랑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이는 개를 좋아하면 개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동물기르기를 하지 않는다. 정이 붙으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그렇다. 임종 때까지 함께 해야 하고, 죽음을 지켜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동물을 좋아하면 동물의 이미지가 남아서 내생의 태어나는 데 문제가 될 것 같아 겁이 난다. 이런 이유로 동물보다는 식물을 좋아한다.
사무실은 마치 식물원같다. 현재 화분은 28개가 있다. 이 중에서 6개는 난(蘭)이다. 갖가지 종류의 식물이 있다. 가장 오래된 행운목을 비롯하여, 인도고무나무, 홍콩대엽야자, 아네카자야 야자, 여인초, 떡갈고무나무, 알라카시아, 돈나무, 벤자민을 비롯하여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가 많다. 수경재배하는 것도 8개에 달한다.
사무실은 온통 식물로 가득하다. 책상을 중심으로 사방에 식물로 둘러 쌓여 있다. 십년 이상 된 것도 많다. 새로운 식물을 보면 사고 싶어 진다. 항상 식물과 함께 한다. 식물이 있으면 마음도 안정되는 것 같다. 이를 ‘반려식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보리수를 가져 왔다. 페이스북친구 박영빈 선생이 준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늘 마음 속으로 “보리수가 하나 있었으면”하고 바랬는데 보리수를 주겠다고 메시지가 온 것이다. 그것도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를 말한다.
보리수를 키워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실패 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검색해 보니 2017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선물을 받은 것에 대하여 ‘보다가야 보리수를 선물받고’(2017-03-02)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그 때 당시 미디어붓다 이학종 선생 사무실에서 가져 온 것이다.
기록을 살펴 보았다. 블로그에 기록을 남긴 것이다. 기록을 보니 어느 법우님이 준 것이다. 이름은 B법우님으로 되어 있다. B법우님은 내가 쓴 인도뱅갈고무나무에 대한 글을 읽고 자극 받은 것 같다.
B법우님이 남긴 댓글을 다시 보았다. 가장 먼저 “블로그를 방문한지는 십여년도 넘었지만 글을 올리는 건 처음입니다.”라며 입장을 밝혔다. 블로그 팬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법우님은 “지난해 한 도반이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보드가야 보리수 열매를 가져다 싹을 틔웠는데요, 지금은 아기병아리처럼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 나무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한그루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났습니다.”(댓글, 보다가야 보리수를 선물받고, 2017-03-02)라고 써 놓았다.
기록을 남기면 오래간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기록은 남는다. 지금은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올렸는데, 이전 다음 블로그시절에 있었던 댓글은 모두 사라졌다. 본문만 남았다. 그러나 감사의 댓글을 본문에 남겼을 때 댓글도 이렇게 살아 있게 되었다. B법우님은 미디어붓다 사무실에 놓을 테니 가져 가라고 했다. 아직까지 B법우님 성함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다만 내 글을 잘 본다는 것만 알고 있다.
B법우님은 글 읽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보리수를 전하고자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리수 열매에서 싹을 틔워 길렀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 사진을 보니 대단히 연약해 보였다.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를 보는 듯 했다. 잎파리도 몇 개 되지 않았다.
B법우님이 준 보리수는 잘 자랐다. 새로운 잎이 나는 등 성장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자 잎이 모두 져 버렸다. 잎이 새로 나기를 바랬으나 다시는 나지 않았다. 재배에 실패한 것이다. 똑 같은 시점에 가져간 이학종 선생은 잘 키웠다. 보리수가 잘 자라 사람 키만큼이나 커졌다. 당진으로 이사 가고 난 다음에도 잘 자랐다. 너무 높이 자라서 한계를 느끼자 절에 기부했다고 한다.
보리수는 우리나라 환경에서 자라기가 쉽지 않다. 열대식물이기 때문에 겨울나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실내에서만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보리수 기르기에 실패했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일조량 확보가 안되었다. 사무실이 북동향이라 이른 아침에 잠시 두시간 가량 비추고 만다. 겨울에는 더 짧다.
일조량 확보와 관련하여 박영빈 선생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식물등을 설치하면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인터넷 주문했다. 앞으로 일조량 문제는 사라질 것 같다.
보리수 키우기 실패 요인으로 또 한가지 든다면 물주기이다. 물을 자주 주어서 죽은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리수가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이제 갓 태어난 새끼 병아리처럼 매우 연약해 보였기 때문에 죽은 것 같다.
그제 박영빈 선생이 보리수를 선물하겠다고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냈다. 처음 이 제안을 받고 망설였다.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쩌나?”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고자 하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 받기로 했다.
박영빈 선생과 약속장소를 정했다. 박영빈 선생이 사는 용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내 오늘 오전에 용산 어느 카페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에서만 보다가 직접 만난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본 그대로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이었다.
페이스북을 보면 어느 정도 사람을 알 수 있다. 프로필 사진으로 얼굴을 알 수 있고, 또한 경력이나 학력이 적혀 있으면 어느 정도 신상 파악이 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올린 글이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기 때문이다.
박영빈 선생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학인이다. 그것도 불교학을 전공하는 학인이다. 티벳불교에 밝은 것 같다. 일본어도 뛰어난 것 같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니 매우 겸손하고 예의 바르다. 한마디로 순수 그 자체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칭해 보았다.
박영빈 선생은 30대로 보인다. 현재 동국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동국대 불교학부에 입학했고, 인도철학을 전공했다. 인도철학 중에서도 티벳불교 전공자라고 했다. 지도교수가 누구인지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김호성 교수라고 했다.
박영빈 선생은 왜 나에게 보리수를 주고자 했을까? 그것은 내가 보리수에 대한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스리랑카 순례기에서 여러 차례 보리수에 대해서 쓴 바 있다. 또한 글을 쓸 때 배경그림을 사용하는데 종종 보리수를 넣었다.
주로 교리에 대한 글을 쓸 때 불탑이나 보리수를 배경으로 사용한다. 인도에 가기 전에는 구글에서 이미지를 가져와서 사용했다.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국가 순례를 갔었을 때는 가능한 보리수 잎 사진을 많이 찍었다. 글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리수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나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리수만 보면 마음이 충만 되는 것 같았다. 하트모양으로 긴 꼬리가 특징인 보리수를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보리수를 2017년 화분으로 처음 보게 되었을 때 감격했다.
인도에 가면 보리수는 지천에 있다. 보드가야에만 보리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원에도 있고 가로수에도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처럼 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보리수를 성스럽게 여긴다.
요즘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소원나무가 있다. 거의 대부분 보리수잎 형상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불교국가이든지 보리수잎은 불교의 상징과도 같다. 그런 보리수를 또 다시 갖게 되었다.
박영빈 선생과 만남을 앞두고 준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줄 선물을 말한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또한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리수를 준다는데 빈손으로 갈 수 없었다. 꿀과 경전과 씨디를 준비했다.
박영빈 선생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서 접한바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꿀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동서에서 나온 아카시아벌꿀 900그램을 준비했다. 경전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시와함께-붓다의 대화’를 준비했다.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 게송부문만 모아 놓은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경전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미우이 음악씨디 3장을 준비했다. 늘 가지고 다니면서 선물로 주는 것이다.
박영빈 선생과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시간 예상했으나 훨씬 초과 되었다. 화제가 공통된 것이 많아서일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 보는 것은 자제했다. 주로 담마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들어 주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많이 듣는 것이 남는 것임에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주로 번역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번역 용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초면에 너무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이다. 이렇게 한번 인연 맺었으니 앞으로 만나서 이야기 나눌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박영빈 선생은 젊다. 30대이면 한창 일할 나이이고 한창 공부할 나이이다. 나는 30대 때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집과 회사만 왕래했었던 것 같다. 20대와 30대를 그렇게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40대 때 불교를 만나서 수많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 한명이 박영빈 선생이다.
박영빈 선생으로부터 보리수 키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했다. 다만 씨앗을 틔어서 한 것이 아니라 가지를 잘라서 키웠다고 한다. 가지를 비스듬히 잘라서 수경재배하면 뿌리가 나오는데, 뿌리가 충분히 내렸을 때 흙에 옮겨 심는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뿌리가 내렸을 때 흙에 심는 것을 삽목이라고 한다. 그런데 삽목을 잘못하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를 밖에서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처음 삽목 할 때는 물이 잘 빠지는 모래가 섞인 흙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상태에서 뿌리가 충분히 내렸을 때 영양이 풍부한 흙 화분에 옮겨 주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에 전달한 화분은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이다.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간다.
박영빈 선생이 이번에 준 화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6개의 화분 중에서 가장 실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2017년에 받은 것과 상태가 다르다. 병아리가 아니라 중닭을 받은 것 같다. 목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고 잎이 이곳 저곳에서 생겨나는 모습이 기세가 좋다. 나는 정말 보리수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박영빈 선생은 보리수를 전달할 때 축원을 해 주었다. 보리수에 흰색 천을 두르고 티벳어로 주문을 외웠다. 어떤 내용일까? 나중에 카톡을 보니 “아침에도 길상하고, 낮에도 길상하며, 밤에도 항상 길상하온, 삼보시여 길상이 있게 하소서.”라는 축원이다.
박영빈 선생은 보리수를 보낼 때 길상 축원을 해 주었다. 흰 천을 두른 것은 꽃다발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달라이라마 존자가 손님에게 흰 천을 목에 둘러 주는데, 여기서 흰 천은 꽃목걸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박영빈 선생은 보리수에 흰 천을 두르고 길상축원을 해 준 것이다.
오늘 귀한 보리수를 받았다. 돈 주고 살수도 없고, 돈의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귀중한 반려식물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에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 한다. 분명한 사실은 보리수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충만된다는 것이다.
보리수는 부처님을 상징한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상보다도, 불탑보다도 보리수 신앙이 더 강한 것 같다. 왜 그럴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으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은 보리수가 유일하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 불자들은 성수를 보리수에 뿌리는 행위를 한다. 보리수가 살아 있으면 부처님도 살아 있는 것이 되고 부처님 가르침도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받은 보리수는 보드가야 보리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에 어떤 사람이 가지를 가져 온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가지에 가지를 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보리수에도 계보가 있다. 보드가야 보리수는 스리랑카 보리수로부터 식목된 것이다. 부처님 당시 보리수는 죽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300년 전에 상가밋따 장로니가 보드가야 보리수 가지를 꺽어 와서 스리랑카에 식목하게 되었다. 그 보리수가 다시 보드가야로 가서 현재의 보드가야 보리수가 된 것이다. 그 보리수가 현재 여기에 있게 되었다.
보리수는 보드가야에서 스리랑카로, 스리랑카에서 다시 보드가야로, 그리고 보드가야에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지에서 가지를 쳐서 지금 보는 보리수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내가 마주하고 있는 보리수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당시 금강좌에 있던 바로 그 보리수와 계보를 같이 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성스러운 보리수를 갖게 되었다. 어찌 마음이 충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23-06-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