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권 위빠사나수행기 VI 재가우안거, 내가 청정해지면 세상사람들도
111권 위빠사나수행기 VI 재가우안거, 내가 청정해지면 세상사람들도
연일 영하의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이렇게 추울 때는 이불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뜨거운 물에 사워를 하고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하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
오늘도 백권당으로 향했다. 달리 갈 곳이 없다. 나이 들어 이런 아지트가 있는 것 만 해도 축복이다. 사무실에 가면 일도 하고 글도 쓰고 명상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아지트까지는 1.3키로 20여분 걸린다. 천천히 걷는다. 새김을 실어서 걷는다. 수행자에게 빠릿빠릿한 것은 미덕이 아니다.
길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윤회의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 1장에 따르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빅쿠라고 했다. 머리 깍고 가사를 입어야만 빅쿠가 아닌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형성의 무서움’에 대한 것이다. 형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무서움이다. 왜 그런가? 한번 생명이 형성되면 오로지 그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최근 강아지 영상을 자주 보고 있다. 유튜브에서 종종 보다 보니 이제 온통 강아지 영상이 판 치고 있다. 유튜브 에이아이(AI), 유튜브 알고리즘이 인도하기 때문이다.
강아지 영상을 보았을 때 형성에서 무서움을 본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두려움이다. 한번 강아지로 태어났으면 개로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말한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축생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한공간에서 산다는 것이다.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만 보고 산 것 같다. 그런데 고개를 아래로 하면 사람 아닌 것들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축생도 한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강아지 영상을 볼 때 마다 측은한 느낌이다. 이럴 때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의문이다.
강아지가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암컷이 발정했을 때 수컷과 교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상을 보면 아비개는 보이지 않는다. 떠돌이 수컷일 수 있다. 임신과 출산, 키우는 것은 전부 어미개 몫이다. 이런 것은 인간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강아지 영상을 보면 귀엽다고 말한다. 그러나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에게서는 형성의 무서움을 본다. 한번 난자와 정자가 결합되면 그 순간 폭발이 일어나 태아가 형성되고, 태어나서부터는 폭풍성장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축생으로서 일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윤회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사람에도 등급이 있다. 이는 정신적 성숙도에 따른다. 그런데 정신적 성숙도는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소년이 나이가 든 노인보다 정신적 성숙도가 더 높을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서 보는 것처럼 ‘칠세아라한’이 출현했을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다.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가 아닌 것과 같다. 어른이 되려면 탐, 진, 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나이가 젊어도 탐, 진, 치가 옅다면 장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육체적 연령보다 정신적 연령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신적 성숙도가 모두 다른 것일까? 이는 윤회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모도 다르지만 성향도 모두 다 다르다. 쌍둥이라고 해도 성향은 같지 않다. 이렇게 차별이 있는 것은 각자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보다 높은 정신적 성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신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 축생들은 본능적 삶을 살기 때문에 수행이 있을 수 없다. 지옥과 같은 악처 중생들은 너무 괴로워 수행할 수 없다. 천상에 있는 존재는 너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에 수행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즐거움도 괴로움도 있다. 희로애락이 있는 삶에서 자아성찰이 있게 된다. 윤회하는 삶에서 윤회를 끝내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크게 발심했다. 인생의 노년에 이르러 윤회의 두려움을 느꼈다. 요즘에는 형성에서 무서움을 본다. 한번 생명이 형성되면 생노병사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윤회의 두려움과 형성의 무서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수행뿐이다. 오늘도 내일도 방석에 평좌하는 이유가 된다.
한국불교에서 동안거가 시작되었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이제 이틀 지났다. 하안거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동안거가 시작된 것이다.
올해 안거라는 것을 처음 해보았다. 이를 ‘재가우안거’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의 안거를 말한다. 테라와다불교 우안거는 동아시아불교의 전통과 달리 일년에 딱 한 번 있다.
재가우안거는 백권당에서 보냈다. 생업이 있기 때문에 멀리 떠나서 안거를 할 수 없다. 사무실에 칸막이를 쳐서 명상공간을 만들었다.
이번 2023년 우안거 기간동안 매일 한시간씩 좌선을 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안거 입제법회 때부터 회향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다. 이에 대하여 ‘111 위빠사나수행기 VI 재가우안거’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다.
책은 111번째의 책으로 2023년 7월 30일 입제법회 때부터 10월 29일 회향 때까지 90일 동안의 기록이다. 목차는 90개이고 684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한국테라와다불교 2023년 우안거 입재법회
2. 통증은 손님과 같은 것, 재가우안거 1일차
3. 지금은 몸을 만들어야 할 때, 재가우안거 2일차
4.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재가우안거 3일차
5. 갈 데까지 가보자, 재가우안거 4일차
6. 불타는 세상, 재가우안거 5일차
7. 이 통증은 나의 것인가? 재가우안거 6일차
8.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가우안거 7일차
9. 부품과 꺼짐과 닿음을 리드미컬하게, 재우가안거 8일차
10.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스캔 하는 방법, 재가우안거 9일차
11. 행선에서 얻는 이익은? 재가우안거 10일차
12. 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겨야 하는가? 재가우안거 11일차
13. 자세를 바꿀 때도 새겨야, 재가우안거 12일차
14. 소음차단용 귀마개를 구입하고, 재가우안거 13일차
15. 오늘 좌선만 같아라, 재가우안거 14일차
16. 현법(現法)에 살고자, 재가우안거 15일차
17. 나는 오늘도 달린다, 재가우안거 16일차
18. 누가 가고 누가 서는가? 재가우안거 17일차
19. 왜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고 했을까? 재가우안거 18일차
20. 등명낙가사에서 정신과 물질을 새기며, 재가우안거 19일차
21. 절에서 명상하니 저절로, 재가우안거 20일차
22. 시간에 쫓기듯이 앉아 있다 보니, 재가우안거 21일차
23. 귀를 틀어 막고자 했으나, 재가우안거 22일차
24.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재가우안거 23일차
25. 좌선이 힘들다고 하지만, 재가우안거 24일차
26. 자아를 죽여버리려면, 재가우안거 25일차
27. 갑자기 머리가 환해졌는데, 재가우안거 26일차
28. 혼침으로 보낸 한시간, 재가우안거 27일차
29.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고, 재가우안거 28일차
30. 돌부처가 되었는데, 재가우안거 29일차
31. 통증따로 마음따로, 재가우안거 30일차
32. 오늘도 통증과 맞짱 떴는데, 재가우안거 31일차
33. 더 달릴 수도 있었으나, 재가우안거 32일차
34. 그것이 남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재가우안거 33일차
35. 아나빠나사띠에서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 재가우안거 34일차
36. 사띠(正念)와 삼빠자나(正知)에 대하여, 재가우안거 35일차
37. 어떻게 삼빠자나(正知)할 것인가? 재가우안거 36일차
38. 이미 지난 일인데, 재가우안거 37일차
39. 나만의 호흡새김 방식을 찾았는데, 재가우안거 38일차
40. 십 분만 더 조금만 더, 재가우안거 39일차
41.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메뚜기가 되지 않고자, 재가우안거 40일차
42. 스승이 없는 시대에, 재가우안거 41일차
43.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구분, 재가우안거 42일차
44. 눈을 감고 있으나 뜨고 있으나, 재가우안거 43일차
45. 나도 니밋따를 볼 수 있을까? 재가우안거 44일차
46. 자애명상을 해 보았더니, 재가우안거 45일차
47. 복부새김은 네 번째 피난처, 재가우안거 46일차
48.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나면, 재가우안거 47일차
49. 좌선 중에 무심코 코를 만졌는데, 재가우안거 48일차
50. 담마와나선원 반철법회 가는 날, 재가우안거 49일차
51. “분노가 네 것입니까?” 재가우안거 50일차
52. 오늘 죽어도 좋다, 재가안우거 51일차
53. 호흡은 저절로 새기는 마음도 저절로, 재가우안거 52일차
54. 행선할 때 마음이 충만했다, 재가우안거 53일차
55. 빤냐와로 스님의 명언, 재가우안거 54일차
56. 좌선 중에 숫자를 세어 보았더니, 재가우안거 55일차
57.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재가우안거 56일차
58. 나는 도달했네 나는 고향에 있네, 재가우안거 57일차
59. 선정의 숫돌에 지혜의 칼을 가는 것처럼, 재가우안거 58일차
60. 머리에 전등이 켜진 것처럼, 재가우안거 59일차
61. 초자아는 있는 것일까? 재가우안거 60일차
62.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인데, 재가우안거 61일차
63. 복부 새김의 달인이 되고자, 재가우안거 62일차
64. 그 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 왔다, 재가우안거 63일차
65. 그냥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재가우안거 64일차
66. 수행자가 밤낮으로 빛나는 것은, 재가우안거 65일차
67. 도량은 청정하게, 재가우안거 66일차
68. 소음을 찰나생찰나멸로 새길 수 있다면, 재가우안거 67일차
69.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재가우안거 68일차
70. 고독한 수행자, 재가우안거 69일차
71.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저 이지(異地)의 나라로, 재가우안거 70일차
72. 부품과 꺼짐을 네 단계씩 새겼는데, 재가우안거 71일차
73. 졸음을 어찌할 것인가? 재가우안거 72일차
74. 수행에 진전이 없는데, 재가우안거 72일차
75. 똑똑 떨어지도록 새겨야 하는데, 재가우안거 73일차
76. 이번 생에 발판이라도, 재가우안거 74일차
77. 느낌의 변화를 분명히 알아야, 재가우안거 75일차
78.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 병이 치유된다는데, 재가우안거 76일차
79. 일과 수행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 재가우안거 77일차
80. 즐거운 느낌을 왜 괴롭다고 보아야 하는가? 재가우안거 79일차
81.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재가안거 80일차
82. 진실로 나날이 새로워지려면, 재가우안거 81일차
83. 사띠 번역어 오염에 대하여, 재가우안거 82일차
84.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데, 재가우안거 83일차
85. 좌선 한시간에 후기는 두 세시간, 재가우안거 84일차
86. 내 세울 것이 자존심밖에 없는 사람은, 재가우안거 85일차
87. 순간적 멈춤과 찰나삼매, 재가 우안거 86일차
88. 명상이 일상이 되도록, 재가 우안거 87일차
89.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재가 우안거 88일차
90. 재가 우안거 88일을 회향하며
출가수행자에게 안거는 늘 있는 것이다. 안거로 법랍을 따지기도 한다. 만약 안거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법랍에서 빼야 할 것이다.
재가자도 안거에 참여할 수 있다. 출가수행자처럼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는 등 안거를 나는 것이다. 그러나 생업이 있기 때문에 출가자들과 똑같이 할 수 없다.
이번 안거기간 동안 매일 한시간 좌선했다. 그리고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안거가 끝났다고 하여 모두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우안거가 끝났어도 매일 한시간 좌선은 계속된다.
매일 한시간 좌선하기가 쉽지 않다. 생업이 있는 상태에서 한시간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좌선하기 가장 이상적인 시간대가 있다. 업체 담당들이 출근하기 이전 시간대를 말한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가 가장 이상적인 시간대이다.
오늘도 아침에 한시간 앉아 있었다. 아침 8시 8분에 앉았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딱 한시간 앉아 있었다. 아침 시간대를 놓치면 좌선하기가 쉽지 않다. 오후에는 졸리워서 쉽지 않고 저녁에는 하기 싫어서 쉽지 않다.
우안거가 끝났음에도 매일 한시간 좌선하고 있다. 그것은 해제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번 우안거에서 성과가 없었다면 다시 안거에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자극받아 매일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위빠사나 수행한다고 하여 앉아 있는 세월이 여려 해 되었다. 그러나 수행의 진척은 별로 없다. 늘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번 생에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을까?
수행은 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변화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습관 들이는 것이다.
매일매일 한시간씩 좌선하면 힘이 붙을 것이다. 일년 좌선 했을 때 다르고 이년 좌선 했을 때 다를 것이다. 십년 좌선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마음이 근육이 생겨서 엄청난 힘이 생길 것이다. 이를 수행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세월이 17년 되었다. 처음에는 A4에 한장 채우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매일매일 의무적으로 쓰다 보니 해가 갈수록 글은 늘었다. 글에 힘이 붙은 것이다. 필력이 생긴 것이다.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한시간 앉아 있었다. 일단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한시간이 매우 긴 시간이긴 하지만 한시간 좌선을 하고 나면 상쾌하다. 새로운 기분이다. 잠을 잘 것 것 이상이다.
글을 쓰고 좌선을 하는 것은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맑으면 세상도 맑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으로 뭇삶이 청정해진다. (Cittasaṃkilesā, bhikkhave, sattā saṃkilissanti; cittavodānā sattā visujjhanti)”(S22.100)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도에 떨어진 휴지 하나를 주었다. 이것은 유튜브에서 본 영상의 영향이 크다.
누군가 쓰레기를 어딘가에 버리면 다른 사람도 따라 버린다. 그런데 누군가 휴지를 주우면 누군가는 따라서 줍는다는 것이다. 전자는 악한 영향력이고 후자는 선한 영향력이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한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이 혼탁해지고,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이 맑아진다.”라는 말이다.
누군가 휴지를 슬며서 버리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휴지를 주우면 따라 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맑고 향기로워 진다.
이제 한국불교에서 안거철이 되었다. 그런데 산중에서 안거를 나는 것도 세상을 맑게 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향기가 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서 사방, 시방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이는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식도 내 뜻대로 해야 한다. 아내나 남편도 내 뜻대로 해야 한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것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세상을 천지개벽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으로 뭇삶이 청정해진다. (cittavodānā sattā visujjhanti)”(S22.100)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좌선 한시간 하고 나니 세상이 바뀌어져 있다. 비록 골방과 같은 작은 명상공간에서 한시간 좌선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상이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거리에 휴지를 주우면 세상이 맑아진다. 명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향기가 난다. 내가 청정해지면 세상사람들도 청정해진다. 휴지 줍는 심정으로 좌선에 임했다.
2023-11-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