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시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나는 보시 받을 자격이 있는가?
A스님에게 문자가 왔다. 페이스북 메신저로도 받았고 카톡으로도 받았다. 카톡은 전화번호가 있어야 가능하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또 다른 어떤 스님에게 전화 온 적이 있다. B스님이라고 한다. 스님은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물어보니 페이스북 프로필에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페이스북 프로필에 들어가 보았다. 정말 전화번호가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숨기기 기능으로 바꾸어 놓았다.
두 달 전의 일이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요즘은 전화번호만 뜨면 경계한다. 요즘 전화사기가 많다고 들었다. 전화를 받으면 엄청난 금액이 청구된다는 일종의 보이스피싱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그 사람은 페이스북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청파동에 있는 선원에 문의하니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A스님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선물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마다 거절했다.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보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확고했다. 이런 이유로 요청할 때마다 거절했다.
스님은 이번에는 카톡으로 보내왔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다. 스님은 김치를 보내겠다고 했다. 쪽방촌 김치봉사를 하는데 그 중의 일부를 보내겠다고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럴 때는 요즘말로 ‘대략난감하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출가자도 아닌 재가자가 스님에게 보시를 받다니!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스님에게 완곡하게 거절 메시지를 보냈다.
스님은 보시 지을 기회를 달라고 했다. 스님도 보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대상이 내가 될 줄 몰랐다.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아내는 받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스님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김치를 받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스님은 “보시는승속을 떠나 다 좋고 이로운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기쁨을 표했다.
아내 말 한마디에 생각이 바뀌었다.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한마디 말에 생각이 180도 바뀐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먼저 누룽지 한박스를 보내겠다고 했다. 점입가경이 되는 것 같았다. 이 또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룽지 한박스가 도착했다. 열어 보니 마치 컵라면처럼 생긴 용기가 12개 된다. 값은 얼마일까? 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꽤 가격이 될 것 같다.
오늘 아침 백권당에서 처음으로 누룽지를 먹어 보았다.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치 컵라면에 물만 부으면 되는 것처럼 물만 부으면 된다.
누룽지에는 스프가 있다. 컵라면에 스프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스프에는 우거지 등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누룽지에 끓는 물을 부었다. 컵라면처럼 뚜껑을 닫고 5분가량 기다려야 한다.
누룽지는 종이용기에 담겨 있다. 뚜껑은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 수저도 하나 주어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환경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마침내 누룽지가 완성되었다. 휘저으니 걸쭉한 모양이 되었다. 마치 죽을 먹는 것 같다.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먹었던 아침식사가 연상되었다.
미얀마 선원에서는 오후에 식사를 하지 않는다. 정오가 넘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날 해뜨기 전까지는 식사할 수 없다. 그러나 주스 같은 액체는 마실 수 있다. 미숫가루 물도 가능하다. 꿀물을 타먹기도 한다.
미얀마 선원에서는 하루에 두 번 식사한다. 아침과 점심을 말한다. 대체로 아침은 죽을 먹고 점심은 밥을 먹는다.
미얀마 선원에서 아침은 쌀죽이다. 물론 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죽으로 먹는다. 누룽지를 먹으면서 미얀마에서 먹었던 쌀죽이 떠 올랐다.
미얀마 선원에서는 탁발을 나간다. 한번은 탁발 행렬을 따라간 적이 있다. 함께 갔었던 도반 중에 단기출가자가 있었기 때문에 따라 간 것이다.
탁발은 오전 9시정도에 출발한다. 한시간 정도 선원 밖으로 나가 탁발한다. 도로 가에는 밥을 들고 온 사람들이 있다. 탁발 행렬이 지날 때마다 한주걱씩 퍼 준다.
탁발자들은 발우에 밥을 담는다. 한번 탁발을 나가면 발우에 가득 찬다. 이 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지켜 보니 발우에 가득 차 있는 밥을 큰 솥에 모두 넣는 것이었다. 이 밥을 어떻게 할까? 나중에 사실이지만 큰 솥에 있는 밥을 찜기에 찐다고 했다.
선원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었다. 아침에 죽이 나오고 점심 때가 되면 의례히 밥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밥은 탁발자들이 탁발해서 얻어 온 밥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 눈물겨운 밥을 밥을 먹는 것 같았다.
보시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물에게 보시해도 백배의 과보를 받는 다고 했다. 작고한 김성철 선생에 따르면 대지도론에 나온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초기경전에 있는 말이라고 했다.
맛지마니까야에 보시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에 따르면 “아난다여, 축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고 했다. 대지도론보다 더 오래된 가르침이다. 이렇게 본다면 맛지마니까야가 원조가 될 것이다.
누군가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면 그 과보는 백배가 될 것이다. 버려진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어도 백배의 과보가 기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어떻게 될까?
축생과 사람은 다르다.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해도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부도덕한 일반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고 했다.
부도덕한 일반사람은 오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설령 그 사람이 악인이라도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준다면 그 보시로 인하여 천 배의 과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보시는 보시할 마음이 있어야 보시한다. 그런데 보시하겠다고 마음을 내는 순간 그 마음은 청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주었을 때 공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보시에 대한 과보는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지금 당장 나타날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나타날 수도 있다. 다음 생에 과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시를 하는 순간 아름다운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이미 공덕을 지은 것이나 다름 없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 보시해도 천 배의 갚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계를 지키는 자에게 보시하면 얼마나 많은 과보가 기대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십만 배’라고 했다.
누군가 오계를 지키는 착한 사람에게 만원을 주면 얼마의 과보의 기대될까? 경에서와 같은 계산 방법에 따르면 ‘10억원’이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렇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에게 보시하면 그 과보는 얼마나 될까? 경에서는 “그 보시는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고 했다.
미얀마에서는 탁발의 전통이 살아 있다. 매일 수행승들은 오전에 탁발나간다. 길 가에는 탁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드문 드문 서 있다. 매일 그 시간에 탁발행렬이 지나 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밥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청정한 수행승들에게 보시하면 그 과보는 얼마나 될까? 경에 써 있는 것처럼 “그 보시는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된다.”(M142)가 될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보시에 대한 가르침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142번경에서는 주로 보시와 보시의 과보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지만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A9.20)을 보면 이를 뛰어넘는다. 어떤 것인가? 보시공덕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는데 이는 수행공덕이다.
벨라마의 경을 보면 보시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중에 하나는 배려에 대한 것도 있다.
보시라고 해서 반드시 먹을 것이나 금품을 주는 것은 아니다. 미소를 지으면 미소보시가 된다. 그렇다면 따뜻한 배려도 보시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떤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 자식, 하인, 노예, 일꾼에게 정중하게 대해준다. 경에서는 “정중하게 주고, 공손하게 주고, 손수 주고, 쓰레기를 주지 않고, 미래를 생각해서 준다.”(A9.20)라고 했다.
자신과 가까운 자들에게 정중하게 대해주면 어떤 과보를 받을까? 경에서는 “자신의 아내, 자식, 하인, 노예, 일꾼이 그의 말을 듣고 귀에게 기울이고 그를 배려합니다.”(A9.20)라고 했다. 이것이 정중하게 주는 자에게 오는 과보라고 했다.
선물은 주는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시물(施物)이든지 받는 자는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물은 원한 맺힌 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다고 했다. 청정도론 자애수행에 따르면 자애수행의 최종단계는 주는 것이다.
보시를 하면 공덕이 된다. 보시공덕은 지계공덕과 함께 천상에 태어나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고 모두 천상에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시고 지계하는 삶을 살면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날 가능성이 높음을 말한다.
아무리 큰 보시를 하고 아무리 계를 잘 지켜도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선처에 태어날 가능성은 높지만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악처에 문을 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사악처의 문을 확실하게 닫을 수 있다, 그래서 담마다사, 즉 ‘법의 거울’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S55.8)라고 했다.
흐름에 든 님, 즉 수다원이 되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수행공덕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공덕이나 지계공덕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에다 수행공덕을 더해야 한다.
벨라마의 경에서는 보시하는 것보다 오계를 지키는 것보다 더 스승한 공덕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마타수행공덕이다. 이는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 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다.
자애공덕은 수행승에게 보시하거나 승가에 사원을 지어 보시하거나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수승하다. 그래서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한번 내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수행도 수행나름이다. 사마타수행보다 위빠사나 수행이 더 수승하다. 이는 “단치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 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매우 짧다. 이 짧은 순간에 무상을 지각하면 보시공덕, 지계공덕, 사마타수행공덕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공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 것은 생멸을 보는 것과 같다. 생멸을 보아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수승한 공덕은 없을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위빠사나수행공덕이다.
오늘 스님에게서 받은 누룽지로 아침을 먹었다. 마치 죽을 먹는 것 같다. 이런 보시를 해 준 스님에게 감사드린다. 그런 한편 재가자인 내가 출가자인 스님에게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출가자로 살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이번 생이 될지 다음 생이 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보시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길 가에 있는 고양이나 개, 비둘기에 먹이를 주어도 백 배 받는다고 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부도덕한 자에게 먹을 것 등을 주어도 천 배가 기대된다고 했다. 하물며 청정한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그 과보는 얼마나 될까?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다고 했다.
글이 암시가 되어서는 안된다. 보시 받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보시를 받을 것이 아니라 보시를 해야 한다. 미래 나를 위해서 보시하는 것이다. 결국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보시하는 것이 된다. 나는 과연 보시 받을 자격이 있는가?
2023-1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