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칠 년 행운목을 보내며
십칠 년 행운목을 보내며
참으로 오랜 세월 행운목과 함께 살았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2007년 12월의 일이다. 사무실 입주와 함께 행운목을 화원에서 사만오천원에 구입했다.
식물을 살 때 살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목대이다. 나무 두께가 두꺼운 것을 사는 것이다. 그래야 무성하게 잘 자란다. 행운목을 살 때 목대가 직경 십센티 이상인 것을 샀다.
현재 사무실은 세 번째이다. 지금은 백권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2007년 이후 내리 17년째 앉아 있는 곳이다.
처음 사무실을 가진 것은 2005년 5월의 일이다. 그때 사건이 있었다. 직장에서 퇴출당한 것이다. 갈 곳이 없었다. 이력서를 내 보았지만 오라는 데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내 사업을 하고자 했다.
일을 하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려면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집에서 가깝고 임대료가 저렴한 곳이 필요 했다. 선택한 곳은 안양공구상가였다.
안양공구상가는 호계동에 있다. 새로 조성된 상가에는 작은 사무실도 있었다. 열 평 가량 되는 작은 사무실이다. 관리비가 싼 것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몹시 추웠고 여름에는 냉방이 되지 않아 몹시 더웠다.
사무실은 십 개월 가량 유지되었다. 시제품 형식으로 물건을 만들었지만 전망은 불투명했다.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면 곧바로 결재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재는 미루어졌다.
방법을 바꾸어야 했다. 제조업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창업준비 했던 것을 포기해야 했다. 임대료와 관리비 나가는 것도 아까웠다. 사이즈를 더 줄여야 했다.
2006년 2월 사무실을 옮겼다. 집 근처에 있는 동양월드타워에 있는 여섯 평 정도 되는 사무실로 옮긴 것이다. 임대료는 매우 저렴했다. 아무런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자리에 앉아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처자식이 있는 사십대 가장은 참으로 막막했다.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작은 공간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독방에 수감된 것 같았다. 비좁은 공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2006년 6월이 되었다. 어떤 인연으로 벤처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월급생활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큰 이유가 된다.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2006년 11월이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사무실도 없어서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물건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제조업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육체노동을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업이 눈에 들어 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하기에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PCB설계는 직장 다닐 때부터 하던 것이다. PCB설계는 전자상품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개발과정 중의 하나이다.
PCB설계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프리렌서처럼 주문을 받아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투자가 없음을 말한다.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일을 할 수 있다.
PCB설계를 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다층설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직장 다닐 때는 양면(2층)설계만 했었다. 4층 설계를 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렌서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4층설계 기법을 알아야 했다.
2006년 12월 PCB설계전문업체에 들어갔다. 고작 세 명 있는 개업사업체를 말한다. 소개 받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경력자가 아니었다. 4층 이상 설계를 해 보지 않았으니 초보자나 다름 없었다.
PCB전문업체에 들어간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월급이 적아도 감수해야 했다. 경력이 없는 초보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수습사원에 불과했다. 월급은 백삼십만원이었다.
사십대 중반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한때 벤처회사 연구소장 타이틀까지 달았으나 작은 PCB설계전문업체의 수습사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을 배우기 위해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07년 2월에 PCB전문업체를 그만 두게 되었다. 아마 나이가 동갑인 사장의 눈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만 많은 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나왔다.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집을 나서면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PCB전문업체에서 삼개월 동안 있으면서 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4층 이상 설계기법을 익힌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큰 재산이 되었다.
집에 있을 수 없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공유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을 공유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2007년 3월 공유사무실에 나가게 되었다. 교차로나 벼룩시장과 같은 지역정보지를 보고서 알게 된 것이다. 임대료는 십만원으로 저렴 했다.
공유사무실에서는 책상 하나만 주어진다. 너른 공간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데 각자 공간에 해당된다. 회의실은 공용으로 사용된다. 이제 갈 곳이 생긴 것이다.
갈 곳은 생겼지만 일은 없었다. 일이 없는 상태에서 한두 달 보냈다. 마치 직장처럼 출퇴근하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입이 없었다. 어떤 날은 점심 값이 없어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일을 해야 했다. 아는 사람을 찾아 갔다. 전원장치 사업을 하는 사장을 찾아간 것이다. 직장 다녔을 때 협력업체 사장을 말한다. 일감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일을 맡았다. 전원장치 인쇄회로기판 설계를 한 것이다. 이후 전원업체 사장은 일을 몰아 주었다.
2007년 11월 현재 위치로 오게 되었다. 공유사무실에서 육개월 가량 일한 결과 오피스텔 보증금 사백만원이 확보된 것이다.
공유사무실에서 더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고객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르바이트 하는 수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자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유사무실을 사업자 주소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별도의 사무실이 필요했다.
2007년 11월 사업자등록을 했다. 새로 옮긴 오피스텔 사무실을 주소로 한 것이다. 이후 회사 명칭도 만들고 도메인도 만들었다. 개인사업자가 된 것이다.
2007년 11월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햇수로 17년 되었다. 이렇게 오래 앉아 있을 줄 몰랐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사십대 때부터 지금 육십대에 이르기까지 17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17년동안 한결같이 함께 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2007년 사무실 입주와 함께 화원에서 사 온 행운목을 말한다.
행운목과 함께 17년 보냈다. 그 사이에 수없이 꽃이 피었다. 향내가 매우 진한 행운목꽃 향기인 것이다.
행운목을 사온지 만 삼년만에 꽃이 피었다. 처음 보는 행운목꽃이다. 이런 감동을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이후 매년 꽃이 피었다. 어느 해는 일년에 두 번 피었다.
행운목은 물만 주어도 잘 자랐다. 천정을 필 정도로 자랐을 때는 가지를 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른 가지에서 또 싹이 났다. 또 다시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천정에 닿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점차 시들어 갔다.
행운목 몰골이 앙상했다. 더 이상 자랄 것 같지 않았다.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았다. 보내주기로 했다.
가지가 앙상한 행운목을 뽑았다. 사무실에 온지 17년만에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몸통은 쓰레기장에 버렸다. 다만 밑둥치에 자라서 나온 가느다란 두 가지는 남겨 두었다.
행운목은 사라졌다. 그러나 커다란 화분은 남아 있다. 또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밑둥치에서 나온 두 줄기의 애기 행운목이다.
애기 행운목 가지를 잘랐다. 그리고 물이 든 병에 꼽았다. 수경재배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뿌리가 나올 것이다. 어느 정도 뿌리가 내리면 화분에 삽목하면 된다. 행운목 이세가 될 것 같다.
행운목과 함께 17년 살았다. 사업을 시작한 햇수와 같다. 그 세월동안 수많은 글을 썼다. 행운목도 지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운목은 사라졌다. 그러나 글과 사진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행운목 분신도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행운목과 함께 행복했었다.
2024-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