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식물‘드라세나 드라코’를 선물받고
열대식물‘드라세나 드라코’를 선물받고
세상에 쓰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오늘 아침에도 세 건이나 생각났다. 세 건에 대하여 ‘작문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 씨나리오가 떠오르는 것이다. 자판만 두드리면 된다.
세 건의 이야기를 다 쓸 수 없다. 오늘 토요일 주말임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밀린 작업을 해야 한다. 납기가 생명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밤낮으로 주말 없이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식물 이름은 무엇일까? 아침 백권당 가는 길에 ‘모야모’ 어플에 물어 보았다. 식물이름 알려주는 어플이다. 확인해 보니 어떤 사람이 ‘드라세나 드라코’라고 알려 주었다.
드라세나 드라코, 어려운 이름이다. 어제 민선홍 선생이 사 준 것이다. 화원으로 데리고 가서 선물한 것이다.
백권당에 사람이 찾아 왔는데
백권당은 이제 17년 되었다. 한자리에서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다.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바뀌어 가는 세월인데 오로지 한자리에 앉아 있다.
백권당에 사람이 찾아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년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아마 명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친구관계가 탄탄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른다.
민선홍 선생은 수행도반이다. 나이가 78세이다. 나에 비하여 연식이 오래 되었지만 강골이다. 나이보다는 젊고 건강해 보인다. 골골한 사람과 대조적이다.
민선홍 선생은 나를 지지해 주는 도반이다. 글을 쓰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삼년전 한번 찾아 온 적이 있는데 이번에 두 번째 찾아 왔다.
민선생은 멀리 살고 있다. 전남 장흥에서 전원주택을 지어서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 그런데 민선생은 수행자라는 사실이다. 하루도 빠짐 없이 좌선을 하는 등 명상수행을 하고 있다.
민선생은 2017년 미얀마에서 만났다. 그때 당시 2017년 12월 31일 미얀마 선원에 도착 했는데 멤버 중의 한사람이다.
미얀마 재가수행자 모임
여러모임이 있다. 그렇다고 오지랖 넒은 것은 아니다. 대여섯 개 가량 되는 모임 가운데 수행자모임이 있다. 재가수행자 모임을 말한다.
수행자모임은 미얀마 선원 생활을 근거로 한다. 2017년 끝자락에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 도착해서 보름가량 있었는데 그때 인연 맺은 사람들이다.
(2018년 1월 미얀마 담마마마까 선원)
수행자모임은 따로 정해진 규칙이 없다. 모임의 좌장이라고 볼 수 있는 김도이 선생의 빌라에서 가끔 모여 차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미얀마에서의 생활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흔히 끼리끼리 논다고 한다. 이런 말은 초기경전에도 있다. 부처님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4)라고 했다.
수행자그룹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다. 그래서일까 만나면 법담을 한다.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수행에 대하여 토론한다.
각자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데
한사람 한사람은 각자의 세계나 다름 없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세계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감각영역도 세계라고 했다. 시각영역, 청각영역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은 여섯 가지 세계가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세계와 세계는 섞이지 않는다. 시각과 청각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시각의 세계가 따로 있고 청각의 세계가 따로 있다. 보면서 동시에 듣는 것은 가능하지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때 뿐이다. 보는 것을 예로 든다면 시각을 조건으로 시각의 접촉이 생겨난다.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시각의 접촉을 조건으로 시각의 세계가 생겨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진 법이다. 접촉이 일어났다는 것은 눈과 대상이 있어서 시각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시각의식은 정신영역에서 분별작용에 의해서 정신이 생겨난다. 이때 좋거나 싫은 느낌이 발생된다. 이것이 연기법, 즉 조건법이다.
이 세상은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형성된 모든 것은 연기법의 원리하에 있다.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성립되는 것은 없다. 다만 마음으로 형성된 것은 예외이다.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 같은 것이다. 창조주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것은 실재 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있을 수 없다. 언어로 개념화 된 모든 것이 이에 해당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초기경전, 즉 니까야을 읽으면 마음의 지평은 넓어진다. 개념에 대한 것도 좋은 예이다.
저열한 무명의 세계
사람들은 개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는 망상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실재 하지도 않는 것에 메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계를 조건으로 지각이 생겨나고 견해가 생겨나고 사념이 생겨난다.”(S14.13)라고 했다.
각자 견해가 있다.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견해는 어떻게 생겨나고 망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무명의 세계는 진실로 크다고 했다.
무명이 대죄라는 말이 있다.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밀린다팡하에서는 뜨거운 철환의 비유로 설명된다. 모르기 때문에 업을 짓는 것이다.
무명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런데 저열한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열한 세계를 조건으로 저열한 사념, 저열한 의도, 저열한 소망, 저열한 욕구, 저열한 인격, 저열한 언어가 생겨난다.”(S14.13)라고 했다.
제자들은 끼리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저열한 자는 저열한 자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 탁월한 자는 탁월한 자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 이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은 끼리끼리 어울렸던 것 같다. 그렇다고 파벌이나 파당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세계관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렸다.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사리뿟따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어울렸다. 위대한 신통을 가진 사람들은 목갈라나 존자를 중심으로 어울렸다. 두타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깟싸빠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어울렸다. 설법을 잘하는 사람들은 만나니뿟따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어울렸다.
악인들은 악인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 데바닷따를 추종하는 수행들이 그랬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모든 수행승들은 사악한 욕망을 지닌 자들이다.”(S14.15)라고 했다.
오계를 밥 먹듯이 어기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착한 사람은 악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반대로 선천적으로 악한 사람은 착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물과 기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유는 우유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기름은 기름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S14.16)라고 했다.
오계를 지키는 것은 인간의 근본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오계는 부처가 출현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오계를 밥 먹듯이 어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계를 어기는 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S14.17)라고 했다. 창피함도 마찬가지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치 개처럼 자신의 어머니도 없는 것이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는 것이다.
짐승과도 같은 사람은 오계를 어기는 사람이 된다. 여기 도둑이 있다. 도둑은 어떻게 살아갈까? 이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자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7)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성폭력을 일삼는 자가 있다. 이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7)라고 말할 수 있다.
도둑은 도둑과 어울리고 사기꾼은 사기꾼과 어울린다. 욕지거리 잘하는 사람은 욕지거리 잘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 각자 성향에 따라, 각자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서로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끼리 서로 어울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똥은 똥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오줌은 오줌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S14.16)라고 했다.
다 필요 없으니 혼자서 살라고?
탁월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탁월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린다.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들과 어울리고 잘 배운 자는 잘 배운 자들과 어울린다. 이는 수행처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삼매에 드는 이는 삼매에 드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S14.23)라고 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혼자 살아라’는 썸네일을 볼 수 있다. 주로 쇼페하우어의 글을 인용하여 인공지능으로 나레이션한다. 그래서 “다 필요 없다. 혼자 살아라.”라든가, “친구 필요 없다. 혼자 살아라.”라고 말한다.
고전문학평론가 고미숙 선생은 친구를 많이 만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술친구나 놀이친구를 만들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친구를 말한 것이라고 본다.
친구를 많이 만들고자 한다. 주변에 친구가 많으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특히 나이를 먹어 늙었을 때 친구가 많으면 힘이 될 것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 명언을 보면 “늙었을 때 다 필요 없다, 혼자 살아라!”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도의 길을 가는 자에게 있어서 친구란?
친구도 친구 나름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사귈 필요가 없다. 이럴 때는 홀로 되어도 좋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라고 했을 것이다.
도의 길을 가는 자에게 있어서 친구는 인생의 전부와도 같다. 그러나 도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교류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단호히 홀로 가라고 했다.
사람과 교류할 때 자신보다 나은 자를 선택해야 한다. 최소한 자신과는 동등해야 한다. 이는 계행, 삼매, 지혜의 세 가지 배움에서 자신보다 낫거나 같은 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이라면 함께 길을 가도 좋다.
자신보다 낫거나 동등하지 못한 자를 만나지 못하면 홀로 가야 한다. 왜 그런가? 향상과 성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함께 간다면 하향평준화가 될 것이다. 계행과 삼매와 지혜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유튜브 썸네일은 자극적이다. 다 필요 없으니 홀로 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믿고서 홀로 산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나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교류해야 할 것이다. 설령 쫓아 낸다고 하더라도 찾아가서 교류해야 한다.
나 보다 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수타니파타에도 홀로가기에 대한 게송이 있다. 이는 “만약에 어질고 단호한 동료, 수행자, 성숙한 벗을 얻지 못한다면,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46)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도의 길, 수행의 길에서 도반은 인생은 절반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S3.18)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친구를 가려 사귀는 것은 절대적이다.
친구를 사귈 때는 나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열등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그러한 사람은 연민과 연민의 대상으로 삼을지언정, 사귀지 말고 가까이 하지 말고 섬기지 말아야 한다.”(DhpA.II.24)라고 되어 있다.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귀어서는 안된다. 이는 도의 길을 가는 입장에서 본 것이다. 생활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나보다 나은 자나 나와 동등한 자가 이에 해당된다.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보다 못한 자와는 말도 섞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상대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말은 섞지 않되 연민의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모임에 참여하는가?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혼자서 고립되어 살다 보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것이다. 이럴 때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갖가지 모임이 있다. 주로 법회와 관련된 모임이다. 그 중에 하나가 재가수행자모임이 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학교 동기동창모임에 가면 세상사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술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수행자모임에서는 담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차담을 하게 된다.
세상을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대체로 만나는 사람만 만난다. 이는 세계가 같기 때문이다. 특히 도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도반은 결정적이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라고 한다.”(A3.93)
이 가르침에서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진의 모임에서는 배울 것이 있음을 말한다.
여기 모임에 모범적인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그 사람처럼 되고자 할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 우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진의 모임에는 계행과 삼매와 지혜에 있어서 성장이 있다.
드라세나 드라코
어제 그 분이 찾아 왔다. 나이는 나보다 휠씬 위이지만 인정해 주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술술 잘 풀렸다.
혼자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을 때 말을 많이 하게 된다. 더구나 배려심이 넘쳐 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다변가, 달변가가 된다. 나에게도 이런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민선홍 선생이 찾아 왔다. 찾아와서 커피를 마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는 중식집에서 탕수육과 짬뽕으로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떠들어 댔다.
민선홍 선생은 작심하고 온 것 같다. 선물을 하려 한 것이다. 식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식물을 사주고자 했다.
식물을 파는 가게가 있다. ‘명학꽃집’이다. 지난 수년간 자주 다니다 보니 주인과는 이제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민선홍 선생은 제일 비싼 것으로 사주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사무실에는 이미 삼십 개 가량의 화분이 있다.
화분을 하나 선택했다. 기준은 음지에서 잘 자라는 것이다. 또한 병충해에 강한 것이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식물을 발견했다. 잎이 삐죽삐죽하게 뻗어 나온 열대식물이다.
열대식물 이름은 ‘드라세나 드라코’이다. 무려 십만원 짜리 화분이다. 이렇게 비싼 화분을 선물 받기는 처음이다. 백권당에 새로운 식물가족이 되었다.
페이스북에도 친구가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여러 모임이 있다. 외롭다고 하여 아무나 사귀어서는 안된다. 도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낫거나 동등한 자를 사귀어야 한다. 모임도 정신의 모임에 가야 한다. 이렇게 해야 계행과 삼매와 지혜에 있어서 성장이 있다.
페이스북에도 친구가 있다.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친구는 친구이다. 그런데 때로 귀찮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메신저를 보내는 것이다.
자꾸 괴롭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페이스북에서 마치 스토킹하듯이 관심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차단했다. 이는 초기경전에 근거한다.
법구경에서는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라고 했다. 또한 수타니파타에서는 “만약에 어질고 단호한 동료, 수행자, 성숙한 벗을 얻지 못한다면,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46)라고 했다. 그리고 주석에서는 “그러한 사람은 연민과 연민의 대상으로 삼을지언정, 사귀지 말고 가까이 하지 말고 섬기지 말아야 한다.”(DhpA.II.24)라고 했다.
혼자 살아도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 공감해 주는 사람을 보면 친구로 사귀고 싶다.
수행으로 맺어진 인연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는 꿈속의 사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행으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간다.
“믿음이 있는 이는 믿음이 있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부끄러움을 아는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창피함을 아는 이는 창피함을 아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삼매에 드는 이는 삼매에 드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지혜로운 이는 지혜로운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S14.23)
2024-05-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