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가 성장하면 불교도 성장, 2024년 마하위하라 웨삭데이 보리수관욕
보리수가 성장하면 불교도 성장, 2024년 마하위하라 웨삭데이 보리수관욕
마하위하라, 한국속의 스리랑카 사원이다. 충남 아산시에 있는 마하위하라는 리틀 스리랑카이다.
오늘 웨삭데이를 맞이하여 아산으로 차를 몰았다. 안양에서 아산 마하위하라까지 60키로 가까이 된다. 오전 아홉 시 도착을 목표로 했다. 평일 출근길이어서일까 한시간 삼십분 이상 걸렸다.
오늘은 5월 23일 목요일이다. 테라와다불교 붓다의 날은 음력 사월보름으로 5월 22일(수)이 된다. 그런데 마하위하라 웹포스터를 보니 분명히 5월 23일로 찍혀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스리랑카에서의 웨삭데이는 분명히 5월 23일이다. 궁금한 것은 담마끼띠 스님을 만나면 물어 보기로 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미얀마와 날자가 다른 것은 시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처님오신날 네 번 참석
요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 하여 여러 곳에 갔다. 한국에서의 부처님오신날은 5월 15일(수)이다. 남도 여행길에 금산사에 들러서 비빔밥을 먹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이다.
담마와나선원에서 붓다의 날은 5월 19일(일) 열렸다. 일요일에 열린 것은 테라와다 붓다의 날이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다니는 사람을 고려 하여 사흘 앞당겨 열린 것이다.
세 번째로 간 곳은 한국마하시선원이다. 집과 가까이 있어서 가게 되었다. 같은 안양시에 있다. 그런데 이 선원에서는 본래 날자 그대로 행사를 진행했다. 5월 22일(수)에 붓다의 날 행사를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늘 네 번째 붓다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아산에 있는 마하위하라에서 열린 웨삭데이다. 이렇게 평일에 열려도 되는 것일까?
현재 한국에는 외국인 이주민들이 많다. 스리랑카 이주민들도 사오만명가량 된다고 한다. 마하위하라는 스리랑카이주민들의 쉼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스리랑카불교 웨삭데이를 맞이하여 스리랑카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국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에
오늘 날씨는 화창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이었다. 아산시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는 이국적인 마하위하라 사원이 저 멀리 보인다.
사원 입구에서 담마끼띠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한눈에 알아 보았다. 이제 확실히 구면이다.
스님과는 수 년에 걸쳐서 몇차례 만났다. 마하위하라가 건립되던 첫 해 가을에 찾아 갔다. 천안에 사는 이덕권 선생과 둘이서 방문했다. 이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챈팅 해야 하는 이유, 아산 담마위하라 담마끼띠 스님과 함께’(2019-11-06)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오늘 마하위하라에 간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스리랑카 웨삭데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평일이다. 과연 스리랑카 이주민들이 평일날 휴가를 내서 참여할 수 있을까?
마하위하라 방문 두 번째 이유는 책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2022년 12월 스리랑카 성지순례 갔었는데 순례기를 썼다. 여행한 것은 십일밖에 되지 않지만 순례기는 거의 일년 가까이 썼다.
2019년 12월 담마끼띠 스님과 함께 스리랑카 성지순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출발 당일 장인이 돌아가셔서 무산 되었다. 육개월 후에 가려고 했으나 코로나로 가지 못했다. 2022년 12월이 되었을 때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과 미주현대불교 편집인 김형근 선생과 세 명이서 함께 여행했다.
스리랑카 순례기는 47개의 글이 실려 있다. 성지순례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도 연구해서 실었다. 사진과 함께 있는 순례기는 536페이지에 달한다.
담마끼띠 스님은 책을 먼저 불단에 공양하라고 했다. 불단에 올려 놓고 삼배를 했다.
오전 열시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스리랑카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만 이십여명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리랑카 이주민들을 위한 웨삭데이는 5월 26일(일) 열린다고 했다. 평일을 피해서 일요일에 열리는 것이다.
아산 마하위하라 보리수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은 큰 행사이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날 하루만큼은 절에 간다. 절에 가서 관불식도 하고 비빔밥도 먹는다.
테라와다불교에도 관불식이 있을까?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켜 주는 행사를 말한다. 그러나 어느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도 이런 관불식은 없다. 왜 그럴까?
테라와다불교에서 붓다데이는 탄생만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탄생을 포함하여 성도와 열반도 한날에 함께 치룬다. 이러다 보니 탄생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관불식이 없는 하나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마하위라에 식순을 보니 관욕식이 있다. 어떤 관욕식일까? 이는 다름 아닌 보리수에 물주기를 말한다.
마하위하라에는 보리수가 있다. 그렇다고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보는 커다란 나무가 아니다. 온실에 있는 작은 나무이다.
마하위하라에 온실이 있다. 온실에는 보리수를 비롯하여 갖가지 열대식물이 있다. 그 중에 보리수가 돋보인다.
보리수는 2019년 처음 방문 했었을 때 법당 안에 있었다. 화분에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보리수를 보니 온실 천정 높이까지 자랐다. 불과 사년만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이를 괄목상대(刮目相對)라 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2019년 마하위하라 보리수)
스리랑카 불교에서 보리수 위치는
한국불교에서 불교의 상징은 무엇일까? 불상이나 불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는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리수이다.
스리랑카 불교에서 보리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불상과 불탑, 보리수 세 개 중에 아마 가장 위에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깨달음의 나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리랑카 켈라니야 사원 보리수)
불상과 불탑은 조형물이다. 불탑에 사리가 있다면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는 경전에서도 강조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아난다여, 이와 같이 전륜왕의 유체에 대처한다. 아난다여, 전륜왕의 유체에 대처하듯, 여래의 유체에 대처하고 큰 사거리에 여래의 탑묘를 조성해야 한다. 거기에 화환이나 향이나 안료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고 마음을 정화시킨다면, 사람들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D16)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상보다는 불탑이다. 불탑에는 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탑과 보리수 가운데 어느 것이 비중이 더 높을까? 아마 보리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리수는 생명이 있는 식물이다. 불탑은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 있는 보리수는 사원의 현재 위치를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리수가 잘 자라고 있으면 사원도 번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스리랑카에 가면 어느 사원에서나 보리수를 볼 수 있다. 보리수 없는 사원은 상상할 수 없다. 더구나 불자들은 보리수를 정성으로 돌본다. 보리수에 물 주는 행위에 대하여 공덕 짓는 것으로 본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될 때 보리수도 함께 왔다. 이때 보리수는 전법의 상징과도 같다. 보리수가 죽으면 불교도 죽는 것이다. 보리수가 성장하면 불교도 성장하는 것이다.
보리수 관욕식
마하위하라 웨삭데이 의식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보리수 관욕식이다. 마치 아기 부처님 머리에 관불하듯이, 참석한 사람들은 보리수에 물을 주었다. 관욕식 내내 스리랑카 스님들은 삼보예찬 낭송을 했다.
담마끼띠 스님은 보리수의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현재 아산 마하위하라에 있는 보리수는 부처님 당시 깨달음 나무의 후손이라고 했다.
현재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 가면 커다란 보리수가 하나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얻었을 때 그 나무의 후손인 것이다. 그런데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는 스리랑카에서 이식해 간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스리랑카 전역에 퍼져 있는 보리수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후손나무라고 볼 수 있다. 마하위하라에 있는 보리수도 금강좌 보리수 후손이다.
백권당에 보리수가 하나 있는데
백권당에는 보리수가 하나 있다. 작년 페이스북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인도 보드가야 보리수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했다.
보리수를 애지중지하고 있다. 지난 겨울 잎이 다 졌을 때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잎이 나기 시작했다.
(백권당 보리수)
사무실에 들어 오면 가정 먼저 보는 것이 있다. 보리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보리수를 잘 키우기 위한 총력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지만 앙상하다. 무성하게 자라는 보리수를 상상해 본다.
보리수는 전법의 상징
아산 마하위하라 보리수는 엄청나게 컸다. 이번에 이년만에 보았는데 거의 배가 커진 것 같다. 아마 갈수록 가속이 붙을 것 같다.
보리수는 생명의 나무이다. 보리수가 성장하면 부처님 가르침도 성장한다. 보리수가 급속도로 크는 것을 보니 마하위하라 사원의 성장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법당입구 문스톤(Moonstone)
마하위하라는 올 때 마다 다르다. 처음 왔을 때는 황무지에 집만 덜렁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도량은 잘 꾸며져 왔다.
오늘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문스톤(Moonstone)이다. 법당 입구 바닥에 깔려진 반원모양의 석판을 말한다.
재작년 스리랑카성지순례 갔었을 때 문스톤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원 입구에 반달모양의 석판이 있는데 식물과 동물의 문양이 새겨진 것이다.
문스톤은 아누라다푸라 왕궁거주지 구역의 것이 유명하다. 아바야기리 사원구역 안에 있다.
문스톤은 현지어로는 산다까다 파하나(Sandakada Pahana)라고 한다. 스리랑카 고대 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건물입구에 설치 되어 있는 일종의 댓돌이라고 볼 수 있다. 반원형으로 생긴 댓돌을 밟고 입구에 들어 가는 것이다.
문스톤에는 네 가지 상징이 있다. 그것은 연꽃, 백조, 네마리 동물, 그리고 불꽃이다. 가장 바깥에 있는 불꽃은 탐, 진, 치의 불꽃을 상징한다.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한 윤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안쪽 테두리에는 생, 노, 병, 사 윤회를 상징하는 네 마리 동물, 즉 코끼리, 사자, 말, 황소 문양이 있다.
문스톤에서 가장 안쪽에 반원형의 달이 있다. 그런데 달은 열반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스톤은 윤회하는 세계에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상징을 집어 넣은 것이다.
마하위하라 법당 입구에 문스톤을 보았다. 참으로 놀라웠다. 성지순례 때 보던 것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멘트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파손된 부위가 많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담마끼띠 스님은 “석판으로 된 문스톤으로 대체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데
법회가 시작되었다. 법회는 식순에 따라 오계와 삼귀의, 법문 순으로 진행 되었다.
담마끼띠 스님이 법문 했다. 스님은 “부처님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미 2568년 전에 완전히 열반 했음에도 왜 존재한다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기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웨삭데이는 부처님을 기리는 날이다. 부처님을 기리는 한 부처님은 살아 있다. 이는 육체를 가진 부처님이 아니라 법의 몸을 가진 법신불(法身佛)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수행승이 있었다. 그 수행승은 부처님이 설법할 때 얼굴과 목소리만 취했다. 마치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님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것과 같다.
학생은 선생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선생 얼굴만 쳐다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선생은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지요?”라며 주의를 줄 것이다.
부처님은 얼굴만 빤히 쳐다 보는 수행승에게 주의 주었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만 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S22.87)라고 말했다. 이어서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yo kho vakkali,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S22.87)라고 말씀 하셨다. 법신으로서의 부처님이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고 있다면 그 사람 마음속에서 나는 살아 있다. 설령 내가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누군가 책을 남겼다. 그 사람의 책이 회자 된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과 같이 된다. 고전을 남긴 사람들은 사람들 마음 속에 살아 있다. 그러나 잊혀지면 죽는 것이 된다.
개념화 된 것은 실재 하지 않는다. 언어적으로 개념화 되었을 때 생멸이 있을 수 없다. 명칭으로 된 것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도 영원히 살기 위한 몸부림 아닐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싸띠와 쌈빠자나
담마끼띠 스님은 명언도 남겼다. 잘못한 것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무지한 것으로 보고서 “무지가 무지무지하게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리랑카사람 담마끼띠 스님은 한국어가 유창하다.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말을 잘 하는 것 같다.
탐, 진, 치 삼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드러나기 어려울까? 이제까지 어리석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담마끼띠 스님에 따르면 성냄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은 금방 드러난다. 밥 먹을 때 젓가락 놀리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혜롭지 않은 행위를 했을 때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성냄은 “욱”하기 전까지는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내지 않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담마끼띠 스님은 ‘싸띠’와 ‘쌈빠자나’를 말했다. 이를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이라고 말했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 따른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새김’과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했다.
몸이 아플 때 괴롭다. 그런데 건강할 때는 건강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싸띠와 쌈빠자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싸띠와 쌈빠자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번 웨삭데이 법회에서 담마끼띠 스님이 여러 가지 예와 비유를 들어 강조했다.
묘원선생의 7차 결집론
담마끼띠 스님에 이어 묘원선생이 법문 했다. 오늘 내빈으로 초대된 인사이다. 현재 한국명상원을 이끌고 있다.
묘원선생은 한국에서의 테라와다불교 역사에 대하여 말했다. 시발은 1988년이라고 했다. 그때 미얀마에서 사야도가 왔는데 승가사에서 법문한 것이 시초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 역사는 고작 36년밖에 되지 않는다.
묘원선생은 놀라운 주장을 하나 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제7차 결집을 하자는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미얀마에서 5차와 6차 결집이 있었다. 4차는 기원전에 스리랑카에서 있었다. 그런데 묘원선생에 따르면 가장 국력이 왕성 했을 때 결집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어떠할까? 아마 불교권 국가 중에서는 국력이 가장 강할 것이다. 반도체는 일등이다. 문화분야에도 톱을 달리고 있다. 케이팝, 케이푸드 등 케이(K)로 시작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은 정말 7차 결집을 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빠알리니까야가 거의 완역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과 초기불전연구원본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더구나 사부니까야는 완역되었다.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밀린다팡하를 완역했다. 앞으로 두세 달 후에는 출간될 것이다. 아귀사와 천궁사 등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쿳다까니까야 몇 권만을 남겨 두고 있다.
2016년의 일이다. 그때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 모임에서 들은 것이 있다. 전재성 선생은 7차 결집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때 들은 것을 다음과 같이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전재성박사는 빠알리니까야 전승과정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습니다.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승해 온 것이며 또한 문자화 한 것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것이라 했습니다. 유럽학자 들의 노고로 인하여 PTS본이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미얀마6차 결집본이 대체로 완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복문구에 대해서는 생략된 채로 전승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세계최초로 사부니까야를 복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장경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라 했고, 또한 “제가 복원한 것은 제7차결집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삼장 제7차결집은 서울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한사람의 노력에 따른 것입니다.”(앙굿따라니까야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 생활속의 명상수행, 2017-02-25)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미얀마 6차 결집본은 반복구문이 생략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반복구문을 모두 복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원한 것에 대하여 “제가 복원한 것은 제7차결집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묘원선생은 7차 결집을 말했다. 한국의 국력이 상승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행방법과 원음이 널리 퍼진 것도 예로 들었다. 이런 성과가 있기 까지 담마끼띠 스님과 같은 외국인들의 노고가 컸다고 말했다.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스리랑카 불교
법회가 모두 끝났다. 사람들은 준비된 점심 공양을 했다. 선원 봉사자들이 준비한 것이다. 오늘 준비한 것은 비빔밥이다.
마하위하라에는 한국불자들도 많다. 스리랑카 이주민들의 쉼터이기도 하지만 한국인 불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이는 담마끼띠 스님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도 요인이 된다.
담마끼띠 스님은 매우 젊다. 아마 사십대 초반일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나이 때부터 한국에 와서 테라와다불교를 소개하고 있다.
마하위하라는 한국속의 스리랑카이다. 가을 까티나 가사공양법요식 때 마치 스리랑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하위하라가 이제 한국에 뿌리를 내린 것과 같다. 마치 보리수가 성장하는 것과 같다.
보리수가 성장하면 불교도 성장
담마끼띠 스님에 따르면 보리수는 6년 되었다고 한다. 2019년 처음 마하위하라에 왔을 때 보리수는 5년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몇 배 자랐다. 마치 마하위하라의 성장을 보는 것 같다.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보리수가 시들면 불교도 시들 것이다. 보리수가 성장하면 불교도 성장할 것이다. 보리수 관욕하는 의미로 본다.
2024-05-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