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아침 여섯 시에 집을 나섰다. 해가 길어서일까 대낮처럼 밝다. 배낭에 먹을 것과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넣고 걸었다.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무엇보다 상쾌한 것은 아침 일찍 일터에 간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각에 자고 있을 것이다. 홀로 깨어 있는 것 같다.
생태하천은 늘 싱그럽다. 이른 아침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안양천변은 온통 꽃밭 세상이 되었다.
생태하천은 매년 풍광이 다르다. 올해 주제는 꽃밭인 것 같다. 데이지꽃밭이 지려 하자 이제 이름 모를 꽃이 밭을 이루었다. 징검다리 건너편에는 양귀비꽃밭이 펼쳐져 있다.
물오리떼가 한가롭게 노닌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물오리떼 가족이 어디 있는지 살펴 본다. 사람을 멀리 하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징검다리 한 켠에 격렬한 파닥임이 있다. 장딴지만한 물고기들의 움직임에 물이 튄다. 짝짓기 하는 것일까?
무엇이든지 시기가 있다. 농사도 시기를 놓치면 망친다. 생명 있는 것들도 시기를 탄다. 저기 피어 있는 들꽃은 누가 보건 때가 되면 피고 지듯이, 생태하천의 유정중생들도 봄이 되면 짝짓기를 해서 새끼를 키운다.
인위적인 것은 부자연스럽다. 애완견을 볼 때마다 측은한 느낌이다. 주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목줄에 매인 삶이다.
인간에게도 목줄이 있다. 인습과 제도에 매인 삶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아관념에 매인 삶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돌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95)
쌍윳따니까야 ‘가죽끈에 묶임의 경’(S22.95)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와 다름 없는 삶임을 말한다.
공원에서 보는 애완견은 줄에 묶여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목줄이 있다는 것이다. 기둥에 묶여 있어서 줄의 길이만큼만 돌고 있다. 그것은 정신적인 목줄이다.
누구나 목줄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그는 물질에 감겨 따라 돌고, 느낌에 감겨 따라 돌고, 지각에 감겨 따라 돌고, 형성에 감겨 따라 돌고, 의식에 감겨 따라 돈다.”(S22.95)라고 했다.
이른 아침 햇살이 가득하다. 아침 햇살을 듬뿍 받으며 계속 길을 걸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일과를 시작할 곳이다.
오랜만에 오피스텔 18층 꼭대기층에 올라갔다. 동쪽 평촌방향에 해는 벌써 떴다. 이제 6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중천에 떠 있는 것 같다.
서쪽으로 가 보았다. 안양의 진산 수리산을 보기 위한 것이다. 밑변이 긴 안정적인 삼각형모양의 산이다. 아침 햇살에 산이 빛난다. 이제 연두색을 지나 녹색이 짙어지고 있다.
이른 아침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 미화원이다. 미화원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엉겁결에 “안녕하세요.”라며 따라 했다. 곧 후회가 일었다. 이럴 때는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응대 했어야 했다.
백권당 문을 열었다. 북동방향이라 아침에 짧게 해가 들어 온다. 보리수를 살펴본다. 이파리가 몇 개 밖에 되지 않는다. 무성한 보리수를 꿈꾸지만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여인초에 잎이 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감겨 있었으나 활짝 펴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
삶은 기적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기적이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 할까? 목표는 정해져 있다. 밀린 일을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큰 것을 하나 맡았다.
담당자가 다그친다. 아들 뻘 되는 담당자가 빨리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말한다. 이럴 때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한다. 원하는 날자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 밤낮없이, 주말없이 작업 해야 한다.
일이 있으면 활력이 넘친다. 일을 손에 잡고 있으면 든든하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렇다면 일을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오늘은 오월 끝자락이다. 올해도 반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어떤 성과를 이루어 냈는가?
해마다 오월이 되면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합소득세를 내는 것이다. 너무 복잡해서 회계사무소에 맡긴다. 십만원을 주면 해결해 준다. 내가 계산하는 것보다 절세 효과가 있다.
종합소득세는 일년 성적표와 같다. 작년 얼마나 벌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세금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올해 종합소득세는 십만원 가량이다. 늘 이정도 금액이다. 중소기업 신입연봉 정도 되는 성적표이다.
소득이 높으면 세금도 높아진다. 세금을 적게 내면 소득이 낮은 것이다. 그럼에도 세금을 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아직도 일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내년이면 지공거사가 되지만 나는 아직도 현역인 것이다.
오늘 아침 일찍 나온 것은 이유가 있다. 밀린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농부가 뜨거운 낮을 피해 이른 아침에 김을 매는 것과 같다. 이번 일감에 대하여 달리 처리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일터로 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때 되면 월급을 받는다. 이렇게 십년, 이십년, 삼십년 살다 보면 생활의 노예가 된다.
사업하는 사람은 일감에 달려 있다. 일감이 겹치기로 있으면 행복한 상태가 된다. 나중을 위해서 가능하면 축적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돈은 발이 달린 것 같다. 자신의 시간을 투입해서 번 돈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이럴 때 허(虛)와 무(無)를 느낀다.
돈벌기에 올인 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돈은 사라지고 없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잘 버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잘 쓰는 것이다. 벌기만 하고 쓰지도 못한다면 삶의 노예, 일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된다.
노예의 삶을 살 수 없다.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주체적인 삶이다. 목줄에 묶여 있는 삶이 아니라 목줄을 끊어 버리는 삶이다.
이번에 수주한 일감을 모두 보시통장에 넣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한다. 단지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한다면 서글퍼진다. 그러나 자기실현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가짐이 달라진다.
두 달 전에 보시전용통장을 만들었다. 큰 일감을 하나 맡았는데 새로 보시통장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현재 보시통장에는 158만원이 있다. 두 달 전에 288만원을 입금했었다. 그 사이에 130만원 가량 쓴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관련 보시가 많다. 밀린디팡하 출간 후원도 했다. 총 12건이다
세상에 가장 재미 있는 것은 돈 버는 일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보시통장을 만들어 놓고 보니 이 세상에서 최고로 재미 있는 것은 돈 쓰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쓴다. 자신의 감각을 즐기는데 돈 쓰는 것은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은 마치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대단히 인색하다.
삶을 살아 오면서 남을 위해 돈을 써 본적은 별로 없다. 불교를 만나기 이전에는 보시개념이 없었다. 직장과 집을 왕래는 삶만 살았다. 용돈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돈 쓸 일이 없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본다.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노후에 대한 것이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을 때 노후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노후를 편하게 보내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자 했다.
어떤 일이든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연히 돈도 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욕망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노후를 대비해서 축적하고자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노후를 대비하여 축적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평생 축적만 하고 산다면 삶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된다.
직장생활은 사십대 중반에 끝났다. 사오정이 된 것이다. 이후 사업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사업자의 삶은 예측할 수 없다. 고정수입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일감은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다.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택시 운전사가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일이 없을 때가 있다.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초조해진다. 이주일 이상 일감이 없으면 앉아 있을 수 없다. 전화라도 돌려야 한다. 그런데 일감이 있을 때는 겹치기로 있다는 것이다.
사업은 운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어떤 일이 걸릴지 모른다. 오늘 하루 공칠 수도 있다. 운에 맡기는 것이다. 가능하면 행운이 찾아 오길 바란다.
행운이 하나 찾아 왔다. 이번에 수주한 것은 230만원짜리이다. 어떤 이에게 이 금액은 적을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큰 금액일 수 있다. 그러나 종합소득세 10만원 내는 사업자 입장에서 본다면 큰 것이다. 이 금액을 보시통장에 넣기로 했다.
보시통장은 내 것이 아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로 갈 것이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다. 아니 나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하는 의미를 찾았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시인의 글을 보았다. 가난한 시인의 삶에 대한 글을 읽으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번호를 알려 주었다. 보시할 기회를 준 것이다. 적선할 기회, 공덕 쌓을 기회를 준 것이다. 시인은 책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재미 있는 것은 돈 세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 장사가 끝나고 금고에서 돈을 꺼내 돈을 셀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 세는 재미보다 더 재미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누는 재미이다.
사업을 처음 했을 때 생계를 위해서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노후를 위해서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축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돈 모으는 재미가 있다. 매월 일정금액 적금 했을 때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일년이 지나면 목돈이 된다. 이 목돈을 정기예금하면 이자가 붙는다. 축적되는 삶이다.
돈을 모은다고 하여 투기를 하지 않는다. 누구나 손 대는 주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욕망에서 이길 수 없다. 욕망에 지배되었을 때 결국 다 털리고 만다.
저축을 해서 돈을 모은다. 매월 적금 부었을 때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공덕의 적금도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 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미얀마 사람들은 보시를 잘한다는 것이다. 보시가 생활화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놀라운 말을 들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보시를 하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해왔다. 노후를 대비해서 일을 해왔다. 모두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 생각이 바뀌었다. 미얀마 사람들처럼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것이다. 공덕 쌓은 삶을 살고자 한다.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 일찍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납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일을 하는 의미를 찾았다는 것이다. 모두 보시통장으로 들어가는 일감이다. 나도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2024-05-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