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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소멸의 무한소용돌이,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0. 11:44

생성과 소멸의 무한소용돌이,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런데 그림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삼색 일색이다. 사람들은 무엇에 감동받은 것일까? 유튜브 ‘5분 뚝딱철학’에서 본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대한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삼색으로 되어 있는 작품에 사람들은 시선을 고정시키고 서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튜브 채널 ‘5분 뚝딱 철학’의 진행자 김필영 선생은 이에 대하여 ‘숭고’로 설명한다.
 

 
숭고에 대하여
 
숭고란 무엇일까? 미학에서 숭고의 의미는 위대함이다. 어떤 위대함인가?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함이다. 오로지 삼색으로 되어 있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서 어떤 숭고가 있는 것일까?
 
오래 전의 일이다. 십년도 더 되었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품을 하나 보았다. 작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검은색 칠만 보였다. 이런 것도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일반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심미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캔버스가 온통 검은색 일색일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어떤 생각을 할까?
 
캔버스는 온통 검은색이다. 검은 색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을 것 같다. 불 꺼진 모니터의 블랙화면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검은색이라 하여 똑 같은 검은색은 아니다. 한자에 검을 흑(黑)과 검을 현(玄)은 다른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검을 흑은 평면적 검은 것을 의미하고 검을 현은 깊이가 있는 검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흑백이라고 했을 때 이는 평면적이다. 백색과 흑색이 대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검을 현은 천지 개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천자문의 시작은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루 황(黃)”으로 시작된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하늘은 검고 땅은 노랗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왜 검은 것일까? 이는 하늘이 가뭇한 것이다. 멀고 멀어서 가이 없는 상태이다. 가물가물 안보이는 상태도 이에 해당된다. 이럴 때 광막한 우주를 떠 올리게 된다.
 
우주는 가이 없다. 끝이 없어서 가물가물하다. 이럴 때 밤하늘의 별들을 떠 올리게 된다.
 
밤하늘에 별을 보면 감상에 젖는다. 이는 다름아닌 무한에 동경이다. 갈래야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를 보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린다. 우주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인가 내가 있어서 우주가 있는 것인가?
 
밤하늘의 하늘을 보면 검은 색이다. 종이 위의 검은 색과는 다르다. 깊이가 있는 흑색이다. 어찌 보면 현묘(玄妙)한 것이다. 한자어 검을 현(玄)과 묘할 묘(妙)가 결합된 것이다.
 
우주는 현묘하다. 헤아릴 수 없는 경계를 말한다. 밤하늘에 별들을 바라보는 것도 현묘하지만 밤에 비행기를 탔을 때 바깥의 광막한 어둠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비행기를 타면 창공에 솟는다. 낮에 가이 없는 푸른 창공은 끝 간데 없다. 밤에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깊이가 있는 어둠이다. 이런 것도 검을 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캔버스는 온통 검은 색이 칠해져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밤비행기 탈 때 그 어둠보다 못하다. 캔버스의 흑색은 평면의 흑색이지만 밤비행기의 어둠은 깊이가 있는 광막한 어둠이다.
 
광막한 어둠을 접했을 때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지는 것 같다. 그런 한편 그런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하나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는 대상에 대한 위대함, 장엄함, 감동, 무한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다.
 
무한을 접했을 때 감동을 느낀다. 그런 한편 나의 모습은 작고 초라하다. 한계를 지닌 자가 무한의 감정을 느꼈을 때 이를 무엇이라 붙여야 할까? 굳이 이름 붙이자면 ‘숭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숭고는 위대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나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그럼에도 이를 이성으로 알고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동물이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에서 나온다. 숭고는 어쩌면 ‘지혜에 의한 두려움’인지 모른다.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숭고는 대자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작품을 바라 보고 있을 때도 숭고를 느낀다. 이를 경외 또는 외경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다. 이번에 용평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본 것도 그렇다.
 
일박이일 용평리조트에 갔었다. 둘째날 콘도 근처에 있는 뮤지엄 딥다이브에 들어갔다. 마치 창고처럼 생긴 문화공간이다. 용평에 오는 사람들은 봐야 할 코스가 된 듯하다.
 

 
뮤지엄 딥다이브(Deepdive)는 영상공간이다. 마치 깊은 심해에서 노니는 것 같다. 마치 가상공간에 있는 것 같다. 영상기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았다.
 

 
뮤지엄에서 시선이 고정된 곳이 있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거대한 영상 캔버스에서는 끊임없이 생주이멸하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앉아서 구경했다. 앉을 수 있도록 방석과 같은 것도 준비 되어 있다.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넋 놓고 보는 것 같다.
 
마치 사람의 일생을 보는 듯하다. 마치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보는 듯하다. 더 나아가 우주의 성주괴공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기 사람이 하나 있다. 그러나 가만 있지 않는다. 주변 환경이 변한다. 마치 소용돌이 치듯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그 다음은 혼돈이다. 그런데 혼돈의 소용돌이가 다하면 새로운 질서가 나타난다.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윤회하는 삶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고호 그림이 있다. 소용돌이 치는 풍경화이다. 그런데 그림은 가만 있지 않는다. 영상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서 소용돌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날씨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과 같다.
 
소용돌이는 점차 커진다. 마침내 평화롭고 한가로운 목가적인 풍경은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린다. 잘게잘게 분해한다. 이후 무질서의 혼돈이 계속된다. 마치 엔트로피 법칙을 보는 것 같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수렴되는 것이다.
 

 
혼돈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혼돈 속에서 질서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점차 질서가 잡혀 간다. 마침내 또 다른 풍광을 만들었다. 또 다른 고호의 목가적 풍광이 나타난 것이다.
 
고호의 작품은 소용돌이 치는 듯하다. 여러 개의 고호의 작품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 끝은 없다. 영상캔버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프로그램에 따라 무한반복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것이 마치 우주가 끊임 없이 성주괴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뉴욕에서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하염 없이 쳐다 보고 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무한, 위대, 장엄을 보았기 때문이다. 초라한 자신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이를 볼 수 있는 이성이 있다.
 
이성이 있는 한 무한, 위대, 장엄은 나에게 수렴된다. 이 작은 몸과 마음에서 무한을 접했을 때 숭고를 본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범위, 나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알 수 있는 이성이 있는 것에 안심한다.
 
용평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사람들은 영상캔버스를 바라본다. 무한 반복되는 성주괴공영상이다. 마치 육도윤회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존재하다가 해체 되어서 저런 사람이 된다. 이런 풍광이 존재하다가 해체 되어서 저런 풍광이 된다. 끝없이 무한히 반복된다. 디지털 영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은 캔버스 영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무한반복되는 영상에 시선을 맡겼을까? 어쩌면 그것은 인생과 우주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
 
갈애는 이미 구족된 것
 
영상은 육도윤회하는 존재와 성주괴공하는 우주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불교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또 한편으로 엔트로피법칙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하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상에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혼돈이 극에 달했을 때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바셋타여, 그 때에 암흑, 칠흑같은 어둠의 오로지 물의 존재가 있었다. 달과 태양도 나타나지 않았고, 별자리도 별빛도 나타나지 않았고, 밤과 낮도 나타나지 않았고 한 달과 보름도 나타나지 않았고, 계절과 일 년도 나타나지 많았고, 여자와 남자도 나타나지 않았고, 뭇삶은 단지 뭇삶이라고 여겨졌을 뿐이다. 바셋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마지 끓인 우유가 식으면 그 위에 얇은 막이 생기는 것처럼, 맛있는 땅조각이 물 위에 막을 형성하며 나타났다. 그것은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이 있었다. 마치 정제된 버티와 정제된 생버터와 같은 색깔을 지녔고, 순수한 야생꿀처럼 맛이 있었다. 바셋타여, 그러자 어떤 뭇삶에게 ‘어참, 이것이야말로 무엇일까?’라고 동요가 생겨나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았다.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 바셋타여, 다른 뭇삶들도 그 뭇삶을 모방하여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았다.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들을 엄습했다.”(D27.7)
 
 
우주가 생겨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창조주가 있어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갈애이다.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라는 표현이다.
 
나는 여기에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갈애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갈애를 하여 집착이 되어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취온적 존재, 오온에 집착된 존재라고 말한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괴롭기 마련이다. 오온에 집착되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전생에 오온에 갈애을 일으켜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현재 생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갈애는 과거 업을(존재)을 행할 때 이미 구족되었다.”(1권, 547쪽)라고 했다.
 
오취온적 존재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마하시 사야도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
 
 
“현재 생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갈애는 과거 업(존재)을 행할 때 이미 구족되었다. 어떻게 구족되었는가? 자신의 몸, 자신의 삶, 또는 감각욕망 대상으로서의 물건들을 좋아하고 바라는 갈애가 있기 때문에 그 바람을 성취하기 위해서,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바람직한 방법이든,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든 이번 생에서 계획하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 각각의 생에서도 좋아하고 바라는 갈애가 있었기 때문에 선업을 행했다. 바로 그 업 때문에 재생연결을 시작으로 물질과 정신이라는 괴로움의 진리들이 지금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547쪽)
 
 
내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구족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오온에 대한 갈애에 따른다. 갈애가 남아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갈애를 일으키면 집착이 되어서 업의 존재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태어남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태어남은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태어남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괴롭다는 것이다. 이는 태어남과 죽음의 중간에 있는 것이 괴롭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사이다.
 
삶의 과정에는 늙음과 죽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도 있다. 이런 괴로움은 결국 태어남으로 유발된 것이다. 그런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1)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남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죽음만큼 절망스러운 상황은 없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형성된 업이 남아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윤회의 원동력은 갈애이다.
 
갈애가 있는 한 윤회할 수밖에 없다. 갈애가 있는 한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태어남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삶은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할 때 가장 먼저 말한 것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말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을 먼저 말하지 않고 왜 사고와 팔고를 먼저 말했을까?
 
사고와 팔고는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한 것을 나의 경우에 대입해 보면 딱 맞아 떨어진다.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인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열반을 실현하면 불사(不死)가 된다는 것이다. 자아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없을 때 죽음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사가 되면 불생(不生)이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는 윤회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라는 것을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온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킨다. 그런데 갈애를 일으키면 연기가 회전되어서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1)라는 것이다.
 
갈애는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 된다.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물질과 정신이 원인과 결과들로 연결되어 생겨남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오온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버리는 것과 같다.
 
생멸을 끊어 버리려면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생멸영상을 보았다. 인간과 자연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보니 인간의 생노병사를 보는 것 같고 또한 윤회하는 인간을 보는 것 같다. 고호의 그림을 생멸로 보았을 때는 성주괴공하는 우주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움직이는 영상 캔버스를 바라 보았다. 마치 홀린 듯이 넋 놓고 바라 보는 듯 했다. 그들은 영상을 바라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불자의 눈에는 육도윤회와 성주괴공을 보는 것 같았다.
 
세상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오온도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가만 있는 것 같아도 꿈틀거린다. 마침내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무질서의 혼돈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끊임 없는 반복이다.
 
뮤지엄 딥다이브에서 육도윤회와 성주괴공을 보았다. 끊임 없는 생멸이다. 생멸을 끊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생멸을 끊어 버리려면 생멸을 보아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생멸의 지혜에 이르렀을 때 가능하다. “무명, 갈애, 업, 음식, 접촉, 물질과 정신 등이 없으면 다섯 무더기가 생겨날 수 없다.”(1권, 552쪽)라는 것을 숙고해서 아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생멸을 멈추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생겨남은 위험하고 생겨나지 않는 것이 안온하다.”(1권, 553쪽)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무너짐의 지혜가 생겨난다.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이다. 그렇게 하려면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깊어지면 “봄, 들림, 닿음, 생각함, 새김 등이 있는 기간 동안 내내 고요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이 없어야 고요할 수 있다.”(1권, 553쪽)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고요함에 있기도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반의 성품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생성과 소멸의 끊임 없는 소용돌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부처님 가르침
 
용평리조트에서 뮤지엄 딥다이브를 보았다. 영상을 보면 환상적이다. 생멸을 거듭하는 영상을 보면 윤회하는 삶과 성주괴공하는 우주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마치 압도적인 풍광을 보면 한편으로 감동하고 한편으로는 초라해진다. 초라한 인간이 압도적인 풍광을 보았을 때 경외와 외경이 일어난다. 위대함, 장엄함, 감동, 무한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다. 이를 숭고라 해야 할 것이다.
 
숭고는 그림이나 풍광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설법을 들었을 때 지혜가 생겨난다면 가르침에 대한 외경이 일어난다. 그래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를 설했다. 영원주의자는 부처님의 무상, 고, 무아의 설법을 들었을 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왜 그런가? 자신의 신념 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어서 전율이 일어난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영원주의 극복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번에는 감동이 일어난다. 불사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사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불사가 되면 불생이 된다는 것이다.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상베가(saṃvega)’라고 한다.
 
상베가는 지혜에 의한 감동을 뜻한다. 일종의 숭고와 같은 것이다. 압도적인 풍광과 접했을 때 초라한 이성으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두려움(bhaya)과 전율( santāsa )과 감동(saṃvega)이 일어난다. 이는 지혜가 생겨나서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통찰이 일어나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도 ‘숭고’라고 말할 수 있다.
 
 
2024-06-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