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린 계획
죽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린 계획
유월도 끝자락이다. 반년의 끝자락이기도 하다. 지난 반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어떤 것이든지 반을 넘기면 가속되는 것 같다. 책을 읽을 때 딱 반절을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남아 있는 것은 눈에 띄게 줄어 든다. 단순히 한장 넘겼을 때 한장 줄어 드는 것이 아니라 두 장 줄어 드는 것과 같다. 마치 소선구제의 마법을 보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일년 삼백육십오일은 절대적 시간이다. 여기서 딱 반절을 지났을 때 격차는 점점 커진다. 반절일 때는 182일 남는다. 반절에서 한달만 더 지나면 122일이 남는다. 이미 지나간 것은 243일이다. 불과 한달 지났을 뿐인데 123일 차이가 난다. 국회의원소선구제에서 불과 사오프로 이겼을 뿐인데 거의 두 배의 의석차이가 나는 것과 같다.
올해가 시작 될 때 다짐한 것이 있다. 이른바 오대사업 하기로 했다. 이는 개인사업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1)매일 글쓰기하는 것, 2)매일 한시간 좌선하는 것, 3)매일 경전읽는 것, 4)틈날 때마다 책 만드는 것, 5)매일 빠알리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 사업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글쓰기와 경전읽기와 책만드는 것은 잘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좌선하는 것과 빠알리어 공부하는 것은 거의 지켜 지지 않고 있다.
오대사업에서 빠알리어공부하는 것은 포기했다. 작년 12월부터 3월초까지 빠알리기초문법강좌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교재 빠알리프라이머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여다 보았다. 과장한다면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그러나 경전반에 들어갔을 때 성과가 없었다. 빠알리경전공부는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매일 한시간씩 좌선하기로 했다. 작년 테라와다 우안거 삼개월 동안 매일 한시간 좌선 했었다. 그 여세를 몰아서 매일 한시간 앉아 있기로 결심 했으나 갈수록 흐지부지 되었다. 그렇다고 앉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글을 쓴 다음에 앉았다. 그러나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드문드문 앉았다. 한시간이 아니라 이삼십분 앉았다.
매일 한시간 앉아 있고자 한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광속과 같은 세상이다. 생업이 있는 사람은 초분을 다툴 것이다. 이런 상황에 서한시간 앉아 있는 것은 대단한 투자이다.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실제로 앉아 보면 알 수 있다. 한시간은 고속도로 100키로를 이동할 수 있는 긴시간이다. 한시간은 하루일과 여덟 시간 중에서 팔분의 일에 해당되는 12프로에 달한다.
흔히 시간은 금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금이라면 시간은 돈과 같은 것이다. 한시간 명상한다고 앉아 있을 때 금쪽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초분을 다투어 일하는 사람,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매일 한시간 투자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한다.
새해 각오를 다진지 반년이 지났다. 오늘 유월의 끝자락에서 지난 반년을 되돌아 봤을 때 미흡한 것은 좌선하는 것이다.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해마다 우안거가 있다. 올해 우안거는 언제부터 시작될까? 달력을 보니 양력으로 7월 20일이다. 음력으로는 6월 보름이다.
작년 우안거는 8월 1일부터 시작 되었다. 그때 재가우안거를 했다. 매일 아침 한시간 좌선을 했다. 그리고 매일 수행기를 남겼다. 우언가 88일동안의 기록이다.
우안거수행기는 111번째 책이 되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담마와나선원 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에게 한권 보시했다. 담마와나선원 운영위원회 최광희 회장에게도 한권 주었다. 빤냐와로 스님에게도 한권 발송했다.
좌선을 생활화 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침에 백권당에 오자마자 앉아야 한다. 글을 쓰고 난 다음 앉으면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일 처리한 다음에 앉아도 앉아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기회를 놓친다.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삼십분이 고작이다.
하반기 때는 재가우안거를 하고자 한다. 작년과 같이 매일 사무실에 오자마자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한시간 후에 처리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좌선한 다음에 쓰고 메일 열어 보는 것도 좌선 한시간 후에 열어 보고, 밀린 일 하는 것도 한시간 좌선한 다음에 하는 것이다.
지난 반년을 되돌아 본다. 가장 잘한 일은 글쓰기와 경전읽기이다. 글은 매일 쓰는 것이다. 밥먹듯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잘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글쓰기는 이미 생활화 되어 있기 때문에 디폴트, 즉 기본설정값이 되는 것이다.
기본설정에 해당되는 것으로 경전읽기가 있다. 올해 상반기 때 상윳따니까야를 완독했다. 일년 걸려서 읽은 것이다. 경전만 읽은 것이 아니다. 논서도 읽었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을 읽었다. 두 번째 읽은 것이다.
하반기때도 새로운 경전을 읽어야 한다. 어느 경전으로 읽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사부니까야는 다 읽었으므로 남은 것은 쿳다까니까야 계열의 경전과 율장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아라야와사 법문’을 읽고자 한다. 이 논서는 한국마하시선원에서 받은 것이다. 2022년 붓다의 날에 일창스님이 주었다. 이제야 읽어 보려 한다.
마하시사야도와 관련된 책은 백권이 넘는다.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도 있고 녹취된 것도 있다. 아라야와사 법문은 녹취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가 1962년 11월 5일과 6일 이틀 동안 법문한 것을 누군가 녹음 했는데 이를 녹취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성철스님과 비슷한 시기로 보여진다. 성철스님은 해인총림 방장이 되고나서 백일동안 법문했는데 그때가 1960년대이다. 그 시기에 마하시사야도도 대중법문을 했었다.
아라야와사 법문은 어떤 내용일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고귀한 님의 주처의 경2(dutiyāriyavāsasutta)’(A10.20)에 해당된다.
책은 마하시사야도 당시 미얀마 의사 우 민스웨이에 의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녹음테이프를 듣다가 혼자 듣기 아까워서 책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마치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세상에 알리는 것과 같다.
책의 편집자 닥터 우 민스웨이의 서문을 읽어 보았다. 서문에서 인상적인 구절을발견했다. 그것은 “저는 1963년 1월 1일부터 오전 5시에서 6시까지 매일 한시간씩 위빠사나 수행을 했습니다.”(33쪽)라는 구절이다. 이 말에 자극 받았다.
수행은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 수행은 매일 밥먹듯이 해야 한다. 하다말다하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업무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의사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한시간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한 것이다.
올해 들어서 한시간 앉아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원인은 글쓰기에 있다. 백권당에 오자마자 글쓰기 먼저 한 것이다.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작년 우안거 때처럼 오자마자 한시간 좌선을 먼저 하는 것이다. 좌선을 하고 난 다음 글을 쓰거나, 메일을 열어 보거나 밀린 일을 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 법문을 읽어 보고자 한다. 서문은 읽었다. 의사의 서문을 보니 새겨두고 싶은 내용이 있다. 의사가 23세 때 해부용 실습 중 사람의 여러 장기를 접하면서 느낌을 쓴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죽은 뒤에는 사람도 바나나 줄기나 텅 빈 나무처럼 전혀 쓸모가 없구나. 이 사람들도 과거 언젠가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놀고 즐기고 우쭐대며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마시고, 어떤 이는 취하고, 어떤 이는 싸우고, 어떤 이는 마음대로 악행을 저지르며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꼭 부자가 돼야지, 그러려면 내년에 무엇을 해야 할 까? 몇 년 안에 어느 정도는 이뤄야겠지’라고 계획과 목표를 세운 뒤 그 것을 기대하며 상상하다가 죽어서 이렇게 의대생들의 해부 실습용으로 침상 위에 쭉 뻗어 있구나.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구나.”(아리야와사 법문, 26-27쪽)
해부 실습생은 시체를 보고서 경각심을 느꼈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은 한때 잘 살기 위해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과연 계획은 달성되었을까? 설령 계획이 달성되었다고 해도 죽음 앞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떤 말기암 환자가 있다. 그는 부자이다. 그의 재정을 담당하는 메니저가 “오늘 주가가 십프로 올랐습니다.”라고 보고 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저 시체처럼 누워 있게 될 것이다. 그의 계획은 죽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릴 것이다.
책의 편집자 닥터 우 민스웨이는 서문에서 여러 인상적인 글을 써 놓았다. 사람들이 누리려 하는 즐거움에 대하여 “비가 내리는 저녁에 한 번씩 번개가 치듯이 슬픔과 근심 사이에 잠깐의 행복을 누리는 것일뿐이구나.”라는 말이 그것이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일시적인 행복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왜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그래도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사는데 이유가 있나요?”라고 말 해야 할 것이다. 초목이 생장하는데 이유가 없는 것과 동물이 존재하는 데 있어서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잘못된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 우문에 답을 하면 우답이 된다. 이럴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연기법적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는 현답을 할 수 있다. 연기법적으로 답을 하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의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사람의 생을 얻은 것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사람의 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현생과 다음 여러 생에 필요한 바라밀을 쌓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현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이전 어느 한 생에서 실천하고 쌓아 온 바라밀 덕분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열반에 도달하도록, 그리고 열반에 도달하기 전 중간에 필요한 바라밀도 현생에 쌓아야 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났을 때 그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잘 단속하고 제어하는 방법을 찾는 것, 직접 수행을 실천하는 것, 미래의 여러 생을 위해 좋은 바탕과 기반을 마련하는 것 등 여러 선업을 실천해야 합니다.”(29-30쪽)
편저자는 바라밀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라밀공덕의 기반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 정법이 살아 있을 때 수행해서 선업공덕을 쌓자고 말한다.
오늘로 반년이 지나갔다. 지난 반년을 돌아 보면 대체로 만족한다. 이루지 못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 것도 있다.
이미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앞으로 잘하면 된다. 후반기 때는 반드시 하루에 한시간 좌선을 하려 한다.
사람의 앞날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십년 후에도 글을 쓰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오년 후도 알 수 없다. 일년 후도 알 수 없다. 아니 한시간 후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답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답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는 책에서 “저는 이러한 고통을 끝내려면 새김확립이라는 방법밖에 없다고 이해했습니다.”(29쪽)라는 글에서 알 수 있다. 매순간 ‘새김(sati)’을 유지하는 것이다.
2024-06-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