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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진흙속의연꽃 2022 II, 보살의 길로 갈 것인가 성자의 길로 갈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6. 14:52

129권 진흙속의연꽃 2022 II, 보살의 길로 갈 것인가 성자의 길로 갈 것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위도식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배우는 것도 없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때 산속에 사는 것을 꿈 꾼 때가 있었다.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신선처럼 사는 삶을 말한다. 무위, 도식, 무학의 삶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다.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근심걱정의 뿌리가 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몰라야 된다. 무식한 자가 되는 것이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책 보지 말라고 했을까?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 책은 책인데 좀 색다른 책이다. 경전을 보고 있다.
 
경전본다고 하면 선입견을 갖는 것 같다. 오래되고 낡고 케케묵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동아시아 고전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적이고 가부정적인 중국 종교 서적이 대표적이다.
 
불교경전을 접할 때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같은 말이라도 한역된 것과 빠알리경전이 다른 것이다.
 
숨 막힐 것 같은 한문경전
 
한역경전을 접했을 때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금강경이 그랬다. 불교교양대학학에서 경전반 교재가 ‘금강경’이었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았을 때 앞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풀기 어려운 암호문을 접하는 것 같았다.
 
오늘날 빠알리경전은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부니까야는 번역되어 있으므로 인터넷 주문하면 다음날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도 번역자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번역했는지에 대하여 맛이 다르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과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본을 말한다.
 
한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과 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은 맛이 다르다. 또한 같은 니까야라도 KPTS본과 초불연 번역은 맛이 다르다. 어느 것이 좋은지는 각자 취향에 달려 있다.
 
한역보다 빠알리경전을 더 좋아한다. 후자가 더 논리적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가능한 훼손없이 전하고자 하는 흔적이 보인다.
 
한역경전은 최소 세 번 중역(重譯) 된것이다. 아함경을 예로 든다면, 빠알리어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질 때 한번 변형되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서역을 경유해서 중국에 왔는데 그때 한번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한역경전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한역아함경은 빠알리니까야보다 두 번 더 변형된 것이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 경전에 대한 이미지는 낡은 것이었다. 이는 경전을 몰랐을 때 형성된 이미지이다. 왜 이런 상이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한역경전 영향이 크다.
 
종종 박물관에서 한역경전을 본다. 용산 국립박물관 3층에 가면 한국불교 전시실이 있는데 금니로 된 법화경을 볼 수 있다.
 
금칠 법화경은 하나의 예술품이다. 글씨도 예술이지만 더구나 금칠까지 되어 있어서 이미지만 눈에 들어 온다. 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한자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독해 공부를 하지 않아서 읽을 수 없다. 다만 예술품으로 본다.
 
박물관에서 금법화경을 접했을 때 불교 경전은 나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내용을 알 수 없어서 나와 팔만사천리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내용이 심오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강남에 있는 능인선원 불교교양대학 야간반에 입교한 것이다.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당면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불교만한 것이 없다고 보았다.
 
화엄경을 읽고 싶었다. 법정스님이 편역한 신역화엄경을 구입했다. 초기불교도 모르고 니까야도 모르던 시절이다.
 
책을 샀으면 읽어야 한다. 신역화엄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자 했다. 그러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오죽 했으면 편역자 법정스님이 해제에 다음과 같이 썼을까?
 
 
사실 80권 화엄경을 읽어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처럼 재미있는 글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놓는 장광설에 질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화엄경의, 구름 일듯 2백 가지로 물으면 병에서 물을 쏟아내듯이 2천 가지로 대답을 하는 그 요설 변재를 감내하기란 참으로 힘이 든다.”(법정스님, 신역화엄경 해제, 7쪽)
 
 
화엄경은 법정스님이 써 놓은 그대로이다. 진도 나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한번 읽어 보았다. 숨 막힐 것 같았다.
 
화엄경을 읽고서 불교경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었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삶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한 직접적 해법이 되지 않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불교에 입문했다. 그런데 한역 경전에서 꽉 막혀 버렸다. 경전이라 할 수 없는 반야심경에서는 “없고~, 없고~”의 연속이었다. 금강경은 어떠한가?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식의 연속이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까? 한역 경전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은 발견하지 못했다. 절 수행도 해보았다. 그리고 주력수행도 해보았다.
 
2005년 철야기도 봉사담당하는 기수가 되었다. 매주 토요일 저녁은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기도날이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기도에 참석했다. 무척 빠르게 진행되었다. 말이 너무 빨라 십여분 걸릴 것이 이삼분 걸리는 것 같았다. 단지 숫자 세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뜻은 몰라도 된다고 했다.
 
불교에 인생의 풀리지 않는 해법이 없는 것 같았다. 2004년 불교에 입문해서 이것저것 해 보았으나 양이 차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세월이 4년 흘렀다.
 
2008년이 되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가만 보니 대승불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테라와다불교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초기불교도 있었다.
 
2008년 12월 한국명상원에 갔다. 묘원선생이 지도하는 곳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동안 법문 1시간, 행선 1시간, 좌선 1시간씩 진행되었다.
 
법문은 들을만 했다.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가 교재였다. 이런 법문은 처음이었다. 대승경전에서 접하던 장광설과 같은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현재 내가 당면한 괴로움에 대한 법문이 있었다.
 
행선 한시간은 매우 지루했다. 그때 당시는 몰랐지만 마하시계통의 선원이기 때문에 한시간 하라고 했을 것이다.
 
마하시 전통의 수행센터에서는 좌선을 한시간 하면 반드시 행선도 한시간 해야 한다.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본 것이다. 이는 아마도 몸관찰 수행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명상원은 일년 다녔다.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50회 이상 다녔다. 이에 대하여 수행기를 작성했다. 이 내용은’95 위빠사나 수행기 I 08-19’에 실려 있다. 블로그 내 ‘책만들기’ 카테고리에 올려 놓았다.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의문이 하나 둘 풀렸다. 초기경전을 읽고, 논서를 읽고, 경전읽기모임에 참여하고, 수행을 해 봄으로 인하여 하나 둘 풀린 것이다.
 
불교입문 이십년 되었는데
 
수많은 경전을 읽었다. 주로 니까야 경전을 말한다. 시중에 번역된 것은 다 구입해 놓았다. 그리고 사부니까야를 모다 다 읽었다.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와 같은 쿳다까니까야 계열의 경전도 읽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몰랐을 때는 답답했다. 한문으로 된 경전에서 답을 찾으려 했으나 법정스님 글처럼 “비현실적인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놓는 장광설”에 질리고 말았다. 또한 “구름 일듯 2백 가지로 물으면 병에서 물을 쏟아내듯이 2천 가지로 대답을 하는 그 요설 변재”에 대하여 감내하기 힘 들었다.
 
올해로 불교입문 20년이 되었다. 남 보기에 짧다면 짧은 기간이고 길다면 긴 기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의문은 해소되었는가?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답은 얻었는가?
 
배우는 학인이다. 한번도 선생이 되어 본 적이 없다. 한번도 남을 지도 해 본적이 없다. 한번도 강단에 서 본적이 없다. 한번도 법문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수많은 글을 남겼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남들은 말로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한다. 그러나 말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말로서 견해를 말할 수 없다. 그 대신 글로서 견해를 표출한다.
 
말은 한번 뱉으면 허공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누군가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글은 써 놓으면 남는다. 말보다 글을 더 좋아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문자탑(文字塔)을 만들고
 
오늘 하나의 책을 만들었다. 2022년 하반기에 일상에 대하여 쓴 글이다. 글로서 써 놓으니 남은 것이다. 책 제목은 ‘129 진흙속의연꽃 2022 II’이다. 129번째 책으로 2022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의 기록이다. 모두 108개의 글이 실려 있다. 폰트사이즈 10으로 하여 B5(18.2X25.7)크기에 담았다. 총 412페이지에 달한다.
 
 
(목차)
 
1. 우중(雨中)에 관곡지에서
2.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블로그 개설 17주년에
3.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걷는 모습
4. 소유하되 집착하지 않는다면
5. 물폭탄으로 초토화된 안양천
6. 큰어른이 되려면
7. 유년시절 해마중

8. 자신의 가게를 청소하는 사람에게서 삶의 활력을
9. 새 회전의자와 함께
10. 내가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것은
11. 지식인들의 공감부족
12. 나의 공감지수는?
13. 싸띠스님의 호탕한 웃음
14. 보통사람들의 소극적 공리주의
15. 무거운 화분을 들다가 허리에
16. 늙음은 저주인가?
17. 세월이 나를 버렸을 때
18. 안양아트센터 야외 재즈페스티벌 
19. 온라인에서 인연 맺은 왕선생 
20. 숭고한 새벽마중
21. 매일매일 글을 쓰는 것은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22. 고층 아파트 슬릿에서 바라본 일몰은
23.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24. 득음의 경지나 득도의 경지나
25. 새벽노을 보면서 하루일과를
26.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 그대에게
27. 사업 하다보면 때로 갑도 되고 을도 되고
28. 티스토리로 블로그 이사
29. 하나의 잘 만든 콘텐츠는 
30. 박명숙 도예전 ‘연꽃의 빛
31. 2022년 불교박람회 최대 히트상품은?
32. 진실로 새로워지고 싶거든
33. 야생의 사자가 되어 보라
34. 아름다운가게에서 횡재한 르까프 등산화
35. 나는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36. 친구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37. 디가니까야 대륙 대장정을 떠나며
38. 홀로 있으면 퇴보한다
39. 공공의 적 폭탄음 무개차
40. 과태료부과 사전통지서
41. 임플란트 수술
42. 개천에서도 용 나야
43. 새벽은 황금시간
43. 국적불명의 서양명절 날에
44. 한장의 사진에 울컥, 이태원 할로윈 참사
45. 경전과 일반책을 투트랙 전략으로 
46.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
47. 정기적금드는 것처럼
48. 노새가 수태하면
49.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에
50. 페이스북한지 오년 
51. 페이스북 계정을 새로 만들고
52. 쓰레기장에 버려졌던 행운목에서 꽃대가
53. 똑같은 꿈을 반복하는 것은
54. 하루를 설레임으로 시작하는 것은 
55. 쓱데이날에 건진 전기히터
56. 그때 좀더 참을껄, 그때 좀더 수행할껄, 그때 좀더 베풀껄
57. 고색창연한 강리도를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58. 나는 진실한 친구일까?
59. 콩나물 천원어치

60. 내가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61. 팍스몽골리카와 강리도
62. 내가 불리한 글도 쓰는 이유는
63. 젖은 낙엽이 되고자
64.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친구
65. 오랜만에 손 맛을
66.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67.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사람
68. 공항에서 노숙하려 했으나
69. 친구들이여, 오시려거든 오시라
70. 성지에 갈 때마다 흰 옷을
71. 호텔에서 시간부자가 되었을 때
72. 콜롬보에서 툭툭을 타고
73.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아누라다푸라 가는 길에
74. 아누라다푸라 게스트하우스에서
75. 백색의 거대한 루완웰리세야 다고바에 섰을 때
76. 스리랑카 비구니 사찰 위하라마하데비에서
77. 일망무제 지평의 미힌탈레
78. 스리랑카 시골식당에서 점심을
79. 폴론나루와 폐허에서


80. 숲속 나무 위 오두막집에서 새벽을
81. 시기리야에서 본 업보의 가르침
82. 담불라 석굴사원에 꽃공양을
83. 아유르베다 허브농장에서
84. 알루위하라 사원에서 본 가족순례단
85. 불치사에서 빠다나경을 암송하고

86. BPS에서 구입한 초기경전
87. 란까틸라까 사원 법당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88. 누와라엘리야 고원에 펼쳐진 파노라마
89.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묻는다면

90. 혜월스님에게 사띠를 물었더니
91. 코끼리 사파리를 즐겼는데

92. 부처님은 정말 기리위헤라에 왔을까?
93. 선라이즈드림에서 아침을
94. 스리랑카가 친숙한 것은
95. 갈레포트에서 본 식민지 유산
96. 올코트 대령의 수계현장 비자야난다에서
97. 갈와루고다 사원에서 본 사리함
98. 파나두라 광장에 서서
99. 켈라니안 사원에서 본 보리수 신앙
100. 에메랄드 사원에서 사마타 불공을
101. 이번 여정에서 내가 얻은 것은?
102.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103. 대각성 운동이 필요한 한국불교, 콜롬보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서
104. 강추위에 도보로 일터에
105. 아누라다푸라 유적에서 익숙한 느낌을
106.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들
107. 커피를 선물 받았는데
108. 올해 끝자락에서

 

129 진흙속의연꽃 2022 II_240703.pdf
7.26MB

 

 
이제 격차가 많이 좁혀 졌다. 2022년 쓴 것에 대한 책을 만들었으니 2년으로 줄어 든 것이다. 아마 올해 한으로 올해 쓴 것까지 책으로 만든다면 따라 잡을 것 같다.
 
일상에 대한 글은 인상적인 것이 대상이 된다. 그런데 글을 쓸 때는 가능하면 경전에 있는 게송하나라도 넣으려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자신의 이야기만 쓰면 쓸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경전에 있는 사구게 하나라도 집어 넣으면 쓸 거리가 풍부해진다. 이제까지 이렇게 써 왔다. 오늘 또 하나의 문자탑(文字塔)을 만들었다.
 
삶의 정초석(定礎石)을 세우고자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감탄하게 된다. 마치 잘 짜여진 모직물을 접하는 것 같다.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잘 교차된 옷감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허튼 것이 없다. 모두 일관성이 있다. 마치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기계장치를 보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하나의 지향을 갖게 된다. 이는 하나의 삶의 방향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거울(dhammādāsa: 法鏡)’에 대한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잘 말해준다.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S55.8)
 
 
이 정형구를 보면 성자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S55.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경에서 ‘삶의 정초’라는 말이 나온다. 삶에 정초석을 놓는 것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정초석을 놓는 것으로 본다.
 
정초라는 단어는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큰 건물에 한자어로 정초(定礎)라고 쓰여 있는 머릿돌을 볼 수 있다.
 
정초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초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어느 정도 규모의 건물 입구 한구석에는 대개 정초(定礎)라고 쓰인 머릿돌이 있다. 건물의 기초를 잡아 정한다는 뜻으로, 건물을 세울 때 기초 공사를 마치고 정초석을 설치하여 공사 착수를 기념하는 것을 정초식(定礎式)이라고 한다.”라고 설명된다.
 
건물에만 정초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도 정초석을 세워야 한다.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이는 삶의 정초석을 세우는 것과 같다.
 
수다원의 두 가지 운명
 
빠알리 원문에서 정초와 관련된 단어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niyato’이다. 이 말은 “sotāpannoham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o”(S55.8)에서 나온 것이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일인칭 단수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는 ‘asmi’로 끝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올바른 깨달음에 의지하여 고통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운명지어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세계는 ‘vinipāta’를 말한다. 이는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곳은 지옥, 축생, 아귀를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세 가지 문은 닫힌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에 대하여 ‘avinipātadhammo’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정초했다고 번역했을 것이다.
 
정초로 번역되는 빠알리어 ‘niyato’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과거분사형으로 ‘Fixed’의 뜻이다. 고정 되어 있음을 말한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운명적임을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절대 악처에 떨어지지 않도록 결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동시에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도록 운명지어져 있음을 말한다.
 
세 번역서를 비교해 보니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niyato’에 대하여 정초(定礎)로 번역했다. 마치 건물의 기초를 잡아 정하는 정초석 같은 의미이다. 확실히 못 박아 둔 것이다. 운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빅쿠보디는 “I am a stream-enterer, no longer bound to the nether world, fixed in destiny, with enlightenment as my destination.” (S55.8)라고 하여 ‘고정된 운명(fixed in destiny)’으로 번역했다. 더 이상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운명적 고정(fixed in destiny)이라고 했다. 이는 영역에서 ‘my destination’라는 말이 뒷받침 해 준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나는 흐름에 든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S55.8)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niyato’에 대한 것은 ‘[해탈이] 확실하며’라는 말이다. 여기서 대괄호로 ‘[해탈이]’라는 말을 추가 했다. 이는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일곱 생 이내의 열반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운명에 대한 것이 빠져 있는 듯하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두 가지 운명이 있다. 하나는 악처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또 하나는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가 끝난다. 이에 대하여 ‘niyato’라고 했는데, 이 말은 ‘Fixed’의 뜻으로 결정된 것이고 운명적인 것임을 말한다. 초불연 번역에서는 ‘[해탈이] 확실하며’라며 번역했는데 이는 두 가지 중에서 한가지 운명만 말한 것이 된다.
 
 
두 갈래 갈림길에서
 
오늘도 또 하나의 문자탑을 쌓았다. 좋게 말하면 금자탑이다. 그러나 금자탑이 되려면 인정받아야 한다. 인정받지 않았기에 문자탑이라고 말한다.
 
글을 매일 쓰다 보니 문자의 탑이 되었다. 문자탑이 금자탑이 되려면 가슴 울리는 글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
 
글 쓰는 행위는 단지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글 쓰는 행위 자체도 실천이라는 사실이다. 글 쓰는 것 자체가 수행인 것이다.
 
큰 건물에 가보면 정초가 있다.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초석을 놓는 것이다. 그런데 초석이 있으면 그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도중에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기 두 갈래 갈림길이 있다. 부처님은 두 갈래 길에서 누군가 길을 묻는 다면 “여보시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S22.83)라고 했다.
 

 
두 갈래 길에서 왼쪽과 오른쪽은 오늘날 좌파와 우파의 관점에서 보면 안된다. 바른길과 바르지 않은 길에 대한 것이다.
 
바른길은 팔정도의 길이다. 바르지 않은 길은 팔사도의 길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면 바른 길, 팔정도의 길로 가야 한다.
 
팔정도의 길은 열반의 길이다. 이 길로 주욱 가면 열반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보살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보살의 길과 성자의 길
 
보살의 길을 갈 것인가 성자의 길을 갈 것인가? 선택에 달려 있다. 대승불교 불자들은 보살의 길로 가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성자의 흐름에 들지 말아야 한다. 열반 체험을 하면 안되는 것이다. 상카루뻬카냐나, 즉 ‘형성평온의 지혜’에서 딱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성자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성자의 집이 있다. 성자의 집에 가면 안온하다. 절대 사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없다. 또한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여기 나그네가 있다. 그는 집도 절도 없다. 이러 저리 떠 돈다. 방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자의 집을 가진 자는 떠돌지 않는다. 방황하지도 않는다. 이는 “다섯 가지 고리를 끊고, 여섯 가지 고리를 갖추고, 한 가지를 수호하고, 네 가지에 의존하고, 모든 독단을 제거하고, 갈망의 추구를 종식하고, 사유하는데 더러움을 없애고, 신체적 형성을 고요히 하고, 마음에 의한 해탈을 잘 이루고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잘 이루는 것”(A10.20)이라는 주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방랑자로 살 것인가 수행자로 살 것인가? 방랑자로 산다면 마음이 정처 없는 것이다. 수행자로 산다면 정처가 있는 것이다.
 
보살로 살 것인가 성자로 살 것인가? 보살로 산다면 성자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정법이 사라진 시기에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보살의 길로 가면 된다.
 
성자로 살고자 한다면 삶의 정초석을 세워야 한다. 사악도의 문을 닫고 일곱 생 이내에 윤회를 끝내는 삶이다. 나는 보살의 길보다 성자의 길이 더 좋다. 정법이 살아 있다면 굳이 보살의 길로 갈 필요가 없다. 부처님 그 분이 갔던 길을 따라만 가면 된다. 삶의 정초석(定礎石)을 세우고자 한다. 
 
 
2024-07-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