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증득 없는 스승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2. 11:25

증득 없는 스승

 
싸띠(sati)란 무엇일까? 위빠사나 수행을 알고부터 늘 궁금했었다. 여러 사람의 글도 접했다. 학문과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말한다. 견해는 모두 달랐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자가 수행에 대해서 말하면 허물이 된다.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자가 책에 대해서 말하면 구업이 된다. 싸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싸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에 따른다. 또한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 번역에 따른다.
 
새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아리야와사법문’을 읽고 나서부터이다. 이전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도 접했지만 이번처럼 절실하지 않았다.
 
아리야와사, 성자의 집이라는 뜻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아리야와사경’(A10.20)이 있다. 이 경을 마하시사야도가 1962년에 이틀간 법문했다. 누군가 녹취한 것을 의사가 책으로 만든 것이다.
  
여섯 문에서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생겨날 때마다
 
아리야와사법문을 읽다 보면 새기고 싶은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싸띠에 대한 것이 그렇다. 오늘 아침 머리맡에 있는 법문집을 보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마음이 꼽혔다.
 

본승은 새김확립방법으로 수행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여섯 문에서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새김을 통해 관찰해야 한다고 지도합니다.”(아리야와사법문, 194쪽)
 
 
마하시사야도는 수행지도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학승(學僧)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수행은 없고 이론만 있는 학자스님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진실된 것이다. 체험 없는 것은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빤냣띠, 즉 언어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마하시사야도는 싸띠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리해 놓았다. 지금 여기서 여섯 가지 감각의 문, 즉 눈, 귀, 코, 혀, 몸, 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새김이라고 했다. 그런데 중요한 말은 물질과 정신이다. 물질과 정신 현상을 새김하는 것이다.
 
작년의 우안거 입재법회 때 들은 것이 있다. 담마와나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은 “이번 안거에서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안거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때 정신과 물질이라는 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흔히 말하는 몸과 마음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를 나마루빠(nāmarūpa), 즉 정신과 물질이라고 말했다.
 
정신과 물질을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명색은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정의 된다.
 
정신적인 요소를 명이라고 한다. 물질적 요소를 색이라고 한다. 정신적 요소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의식이라는 네 가지가 있다. 물질적 요소에는 지, 수, 화, 풍이라는 물질적 요소가 있다.
 
정신과 물질을 싸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새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물질도 새겨야 하고 마음도 새겨야 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호흡을 새김하는 타전통과는 다른 것이다. 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보기 좋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좌선 중에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손을 배에 대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살아 있는 인간도 호흡 없이는 살 수 없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있을 수밖에 없다.
 
호흡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 언어적 개념을 말한다.
 
언어적 개념은 어떤 것인가? 불수념한다면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고 법수념한다면 법을 대상으로 한다. 단지 들숨날숨의 호흡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이래서는 법의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 없다.
 
호흡이 위빠사나가 되려면 코끝의 바람의 요소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들숨날숨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단지 들숨날숨에만 집중한다면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볼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아야 위빠사나가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가 된다. 배가 부풀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배가 부풀 때 부푼다고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위빠사나는 정신과 물질 두 가지 현상을 다 새기는 것이다. 따라서 배가 부풀 때 물질적 현상을 새기는 것이고, 또한 배가 부풀 때 부푼다고 아는 정신적 현상을 새긴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 두 가지 모두 다 새기는 것이 싸띠인 것이다.
 
배가 부푸는 현상은 풍대에 대한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에서 풍대는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배가 부풀고 꺼짐을 새기는 것은 사대에서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 된다. 물질적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종교성을 배제한 MBSR
 
요즘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명상 지도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아마도 존 카밧진이 개발한 MBSR이나 이와 유사한 명상기법을 사용할 때 쓰는 용어일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가 개발한 명상기법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오랜 명상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역수입하여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사람들 대부분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명상기법에는 정신물질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명상법과 다름을 말한다. 스트레스해소나 마음안정 등 정신적인 것만 다루었을 때 반쪽짜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
 
MBSR과 같은 스트레스 완화기법에는 종교성은 없다. 불교라는 종교성은 철저하게 배제 되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이는 아마도 대중성을 겨냥했기 때문으로 본다. 갖가지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불교적 명상기법을 소개하면 받아 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위빠사나 수행은 MBSR과 다른 것이다. 가장 차이 나는 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새긴다. 그러나 MBSR과 같은 명상기법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새기지 않는다. 아마도 정신만 새기는 것일지 모른다.
 
호흡 그 자체만 관찰하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대상에 집중했을 때 일시적으로 근심과 걱정은 사라진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했을 때 근심과 걱정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호흡관찰이 위빠사나가 되려면 물질관찰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코끝의 바람의 요소를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보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상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상기가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쉬는 것이 약이다. 그러나 대상을 배로 놓으면 머리와 멀어져 있기 때문에 상기 되는 현상에서 피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김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을 새김하는 것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몸관찰이다.
 
마하시 방식의 특징은 몸관찰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해서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도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순간삼매로 정신과 물질의 생멸을 관찰해야
 
지혜는 체험에서 나온다. 또한 지혜는 삼매에서 나온다. 삼매라고 해서 선정삼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정삼매에서 대상과 일치하여 합일된 상태는 지혜가 아니다.
 
삼매가 지혜가 되려면 생멸을 관찰해야 한다. 순간삼매로 가능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나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새기다 보면 생멸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도 생멸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새기면 생멸임을 알게 된다.
 
사마타는 생멸이 없다. 언어적 개념에 생멸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생멸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생멸이고, 발을 한발한발 옮기는 것도 생멸이다. 이런 생멸을 보았을 때 어느 것도 하나 항상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을 알게 된다.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위빠사나 지혜이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아는 지혜이다.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체험하여 아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 현상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 현상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새겼을 때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인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지혜이다. MBSR과 같은 스트레스 해소기법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흔히 마음챙김기법이라고도 불리우는 MBSR은 종교성이 철저하게 배제 되어 있다. 불교가 아닌 타종교인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호흡관찰로 호흡이라는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 기법인 것으로 파악된다.
 
마음챙김기법인 MBSR에는 종교성은 없다. 이는 불교가 없다는 말과 같다. 당연히 열반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반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열반을 증득하려면 위빠사나 수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싸띠라는 말이 왜 마음챙김이 아닌 새김으로 쓰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교학과 실천이라는 양날개로 증득을
 
매일 장문의 글을 쓰고 있다. 요즘에는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아리야와사법문을 읽고서 쓰고 있다. 이런 글쓰기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 그분은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맹렬히 비난했다. 글을 읽어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이론으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영을 배울 때 이론만 가지고 익혀지지 않는다.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 역시 책만 보고서 운전할 수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을 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법문을 듣는 것이다. 집중수행 할 때 스승은 법문을 해준다. 그리고 수행이 끝나면 수행점검을 해준다. 법문 없는 수행을 상상할 수 있을까? 수행점검 없는 수행을 상상할 수 있을까?
 
불교수행은 증득을 목적으로 한다. 수행한다고 하여 단지 마음의 평화나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불교성을 배제한 MBSR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수행과 관련하여 부처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빠리얏띠, 빠띠빳띠, 빠띠웨다를 말한다. 이를 교학, 수행(실천), 증득이라고 번역한다.
 
수행을 하려면 먼저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집중수행 할 때 법문을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수행의 방향을 잡는 것과 같다. 이것이 빠리얏띠(pariyatti)이다.
 
수행은 실천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해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행선과 좌선 같은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여섯 문에서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생겨날 때 이를 새김을 통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빠띠빳띠(patipatti)이다.
 
수행은 증득으로 완성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해서 실천했을 때 통찰이라는 증득이 있게 된다. 마치 새가 교학과 수행의 양날개로 나는 것과 같다. 열반이라는 증득이 있게 되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빠띠웨다(pativedha)이다.
 
스승에게 증득이 없을 때
 
지식이 수행에 방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일체 책을 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일반 세속적 지식을 멀리하라는 말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많이 알면 알수록 좋은 것이다. 마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싸띠와 같은 것이다. 경전과 논서를 늘 가까이 해서 새기는 삶은 통찰이라는 증득에 가까이 가게 할 것이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증득이 없다면 지도할 수 없다. 설령 증득이 있는 스승이 있다고 할지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
 
한국불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사람이 글을 쓴다면 구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들어서 알고 있다.
 
한국불교에는 법문이 없다. 수행지도도 없다. 당연히 수행점검도 없다. 사람들은 왜 앉아 있는 것일까?
 
법문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없다는 말과 같다. 수행지도와 수행점검이 없다는 말은 증득이 없다는 말과 같다. 열반과 같은 증득을 말한다.
 
증득이 없으면 수행지도를 할 수 없고 수행점검도 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도와 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도록 설하는 이가 가르침을 충분하게, 완벽하게 설하지 않는다면 스승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아리야와사법문, 148쪽)라고 했다.
 
증득이 없는 자는 법을 설할 수도 없고 수행도 지도할 수 없다. 이런 사람 밑에서 수행을 하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
 
승속을 막론하고 미얀마로 달려 간 것은
 
수행을 하고 싶어도 수행법을 전달할 스승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스승을 찾아 나설 것이다. 승속을 막론하고 미얀마로 간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을 읽다가 ‘미얀마의 위상과 영광’이라는 글을 보았다. 마하시 사야도가 1962년에 말한 것이다.
 
오늘날 미얀마는 위빠사나 수행의 성지가 되었다. 거기에 가면 부처님 가르침이 있고 부처님의 수행법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스승이 있다. 증득이 있는 스승을 말한다.
 
스승이 있으면 제자를 지도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까지 교학과 수행과 증득이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얀마에서는 정법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정법의 조건은 교학과 수행과 증득이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삼장이 있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사향사과와 열반이라는 증득이 있다면 정법시대로 본다.
 
미얀마의 위상과 영광
 
우리나라 스님들과 불자들은 미얀마로 달려 갔다. 아마 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선진국으로 유학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60년대도 있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지금 미얀마는 교학(pariyatti)의 측면에서 보자면 제6차 결집을 개최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서 그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실천(patipatti)의 측면에서도 도와 과에 이르게 하는 여러 수행주제와 수행방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서 불교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미얀마로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스리랑카나 인도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 해서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스리랑카에서도 수행방법을 확실하게 보이는 곳은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미얀마로 오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얀마에 와서 직접 수행을 하게 되면 매우 만족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렇게 외국에서 찾아 온 이들이 양곤 마하시 사사나 수행센터만 하더라도 꽤 많습니다.”(아리야와사법문, 77쪽)
 
 


글에서 ‘지금’은 1962년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62년전이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수행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이는 미얀마에 교학(pariyatti)과 수행(patipatti)과 증득(pativedha)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학과 수행이 있으면 증득이 있기 마련이다. 마치 새가 교학과 실천이라는 양날개로 하늘 높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글에서 인상적인 구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서 불교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미얀마로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한국불교에서 한계를 느낀다면 어디 가서 배워야 할까? 어느 스님은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으로 유학 갔다. 거기서 신부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어느 스님은 미국으로 간다. 어떤 학자는 인도로 간다. 어떤 사람은 스리랑카로 간다. 그러나 결국 미얀마로 오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한국은 수행의 나라, 일본은 교학의 나라, 중국은 계율의 나라라고 말한다. 테라와다에사는 미얀마는 수행의 나라, 스리랑카는 교학의 나라, 태국은 계율의 나라라고 말한다.
 
몇 년 전 우실라 스님을 만난 적 있다. 공양청 자리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한국어가 가능하다.
 
우실라 스님에 따르면 미얀마는 수행의 나라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교학의 나라에 가깝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50년대에 6차 결집을 주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19세기 말에 5차결집도 주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에 대하여 수행의 나라라고 말한다. 이는 전세계 사람들이 수행하러 가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미얀마는 수행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교학의 나라이기도 하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스승을 찾아 갈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국에라도 나가고자 할 것이다. 바로 그곳이 미얀마이다.
 
미얀마에는 불교가 살아 있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이는 미얀마 현재 군부쿠데타와 무관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다. 불교수행하고자 한다면 미얀마로 가야 할 것이다.
 
인도에는 불교가 없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말한다. 스리랑카에 가면 불교가 있을까? 테라와다 종주국이기 때문에 교학은 있다. 그러나 확실한 수행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태국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로 가야 할까? 결국 돌고돌아 미얀마로 갈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미얀마의 위상과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타인을 깍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간다?
 
오늘도 마하시사야도의 책을 읽었다. 이런 것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다. 책만 읽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마하시사야도에 대하여 학승에 지나자 않다고 폄하한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수행자를 비난한다.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독자를 비난한다.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에 대한 비난도 그렇다. 이런 사람에게 “책을 읽어 보지 않았거든 말하지 마시라!”라고 말해 주고 싶다.
 
어느 한국교수는 니까야를 폄하한다. 문자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목적이 있다. 이렇게 깍아 내려야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선불교를 올리기 위한 것이다.
 
스승이라 해서 모두 다 같은 스승이 아니다. 증득이 없다면 법문도 할 수 없고 수행지도도 할 수 없다. 이럴 경우 타인을 깍아 내린다. 타인 스승을 깍아 내리면 자신의 스승이 올라간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윤회하면서 겪을 것 다 겪어 보았지만
 
마하시사야도의 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보낸다. 어느 것 하나 놓칠 것이 없다. 오늘 아침에 읽은 것 중의 하나는 열반에 대한 것이다.
 
열반은 전혀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가보지못한 곳을 갈 수 없다. (gaccheyya agata disa)”(Dhp.323)라고 했다.
 
가보지 못한 곳은 열반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노새나 코끼리와 같은 탈 것으로 사람이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곳인 도달되지 않는 곳인 열반을 향해서 갈 수 없다.”(DhpA.IV.6)라고 했다.
 
누구나 열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이렇게 말한다.
 
 
윤회하면서 열반을 제외하고 가 보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기억하지 못해서 처음 가본 곳처럼 생각할 뿐 사실은 예전에 가보았던 장소들입니다. 어떤 곳이든 다 가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있는 여러 나라만이 아닙니다. 정거천 다섯 곳을 제외하고 천상 세상이나 범천 세상에서도 가보지 않은 곳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 다 가본 적이 있는 장소들입니다. 열반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 달해 보지 않은 곳입니다.”(아리야와사법문, 194쪽)
 
 
이 말에 공감한다.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육도를 윤회했을 것이다. 위로는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에까지 가보지 않은 데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목이 잘려 흘린 피는 수미산의 사대양보다 많을 것이라 한다. 축생으로 태어나 흘린 피를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인을 했다면 역시 피를 흘렸을 것이다.
 
윤회하면서 피만 흘린 것은 아니다. 눈물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은 사대양의 물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다.”(S15.13)라고 했다.
 
윤회하면서 겪을 것은 다 겪었다. 천상에서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가보지 않은 데가 없다. 딱 한군데 가보지 않았다. 어디인가? 열반이다.
 
열반은 가보지 않은 길
 
열반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보지 않은 열반의 길을 가자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윤회의 두려움, 존재의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열반의 길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지금 가야 할 때이다. 교학과 수행과 증득이라는 정법이 살아 있을 때 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지금에서야 열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 길은 이미 알고 있는 길이 아닙니다.” (아리야와사법문, 194쪽)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열반으로 가는 길을 잘 설해 놓았다. 그럼에도 열반의 길로 가지 않는 다면 부처님의 길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는 교학과 수행과 증득이 없는 것과 같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승이 증득이 없다면 스승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증득 없는 스승 아래에서 증득 있는 제자가 나올 수 없다.
 
스승과 선생은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스승과 꼰대도 구별되어야 한다. 타인의 스승에 대하여 폄하하고 가르치려고만 든다면 꼰대라 해야 할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위대한 스승이다. 자신이 체험한 것을 책으로 남겼고 법문을 했다. 육십년 넘은 법문도 이렇게 한 존재에 대하여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학승이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
 
열반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새김확립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여섯 문에서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새김을 통해 관찰해야 한다고 지도합니다.”(아리야와사법문, 194쪽)라고 말했다. 이 말을 새기고자 한다.
 
 
2024-07-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