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사 영종(靈鐘)을 쳐보니
고란사 영종(靈鐘)을 쳐보니
해외에 나갈 처지가 못된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꼭 적당한 것이 없을 때 그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를 말한다. 국내여행이라도 해야 한다.
국내여행이라 하여 해외보다 못하지 않다. 오히려 해외보다 더 나은 경우가 있다. 차를 운전하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국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다. 어디를 가나 사통팔달이다. 과잉이다 싶을 정도이다. 지방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서도 시원하게 쭉쭉 뻗어 있다. 막히면 뚫어 버리고 다리를 놓는다.
한국은 사실상 일일생활권이다. 자동차를 타면 하루 이내로 다녀 올 수 있다. 하물며 가운데 지역은 어떠할까?
2024년 7월 14일 부여로 향했다. 숙소는 부여에 위치한 ‘만수산자연휴양림’으로 예약 되어 있다. 숙소가 있으니 마음 놓고 여행할 수 있다.
안양에서 부여까지 160키로 거리에 2시간 5분 찍혔다. 일요일 정오 바로 이후에 출발해서일까 막히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 서천공주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남한 면적만 해도 10만 제곱키로미터에 달한다. 유럽의 작은 국가들에 비하면 큰 편이다. 무엇보다 아기자기하다는 것이다. 바다도 있고 높은 산도 있다. 고장마다 특색이 있다. 부여는 어떠할까?
부여는 사실상 처음이다. 잠깐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구석구석 가보지 못했다. 공주는 가보았어도 부여는 가보지 못했다. 만수산자연휴양림이 예약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여여행을 하게 되었다.
부여의 이미지는 좋다. 부여라는 말 자체가 부드럽다. 왜 이곳을 부여라고 했을까? 고대국가 부여가 떠오르기도 한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다.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130년 가량 도읍이었다. 한성에서 공주로, 공주에서 부여로 밀린 영향도 있을 것이다.
부여라는 말은 고대국가 부여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부여씨가 많아서 부여라고 했는지 모른다. 좀처럼 쓰이지 않는 말이다. 오늘날 받침이 있는 딱딱한 한자체 명칭과 다르다. 아름다운 순수한 우리말이다.
부여하면 떠오르는 말은 ‘부여장정’이라는 말이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81년 2월 논산훈련소에서 부여장정들과 마산장정들과 함께 훈련 받았다.
부여라는 말에 훈련소 일이 떠 올랐다. 논산훈련소 27연대 5중대였는데 부여출신 사람들과 마산출신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느린 부여억양과 급한 마산억양이 혼재 되어 있었다.
부여출신 동기 얼굴이 생각난다. 이름은 잊어 버렸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보니 부여라고 했다. 나중에 같은 부대에 배치 받았다.
옛날 일을 생각하니 마치 고구마줄기처럼 떠 오른다. 그때 훈련소 때 “그런 슬픈 얼굴로 나를 보지 말아요”라는 노래를 누군가 구성지게 불렀다. 그때 당시 인기 절정의 산울림 노래이다. 소대장은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복학하고 나서 보니 데모가가 되어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흘렀다. 그때 훈련소에서 보았던 동기들의 얼굴은 이십대 초반의 이미지이다. 세월이 사십년 이상 흘렀건만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전히 젊다.
그때 동기들을 지금 본다면 어떠할까? 아마 거울에 비친 내얼굴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머리는 백발이고 얼굴은 쭈굴쭈굴한 노인의 이미지일 것이다.
동기들을 본다면 이미지는 업데이트 될 것이다. 더 이상 젊은 날의 이미지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만남이 없을 때 항상 젊은 이미지가 지배한다.
부여에서 가장 먼저 가본 곳은 궁남지이다. 지난주 연꽃축제가 있었다. 연꽃축제가 끝난 다음에 가는 것이 되었다.
궁남지에 도착하자 비가 내렸다. 여름 장마철이라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와 같은 것이다. 아열대 지방의 스콜과도 같은 것이다. 네 시에 내린다고 예고 되어 있었는데 정확했다. 오늘날 기상청이 더 이상 ‘구라청’이라는 것이 증명된 듯 하다.
우중에 궁남지를 보았다. 부여로 관광 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서동요의 고향답게 이곳저곳에 남녀서동요 캐릭터가 보인다.
궁남지는 한시간으로 충분했다. 휴양림으로 가기 전에 한 곳 더 들러야 한다. 자연스럽게 ‘부소산’으로 향했다.
비는 그쳤다. 한시간 오다 만 것이다. 다시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되었다. 산에 가면 절로 향하듯이, 부소산에 가면 절로 낙화암으로 향하는 것 같다.
비가 오고 난 하늘은 맑았다. 푸른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비가 오고 나서인지 산하대지가 맑고 깨뜻했다. 살맛 나는 하늘과 땅이다.
부소산은 산성인줄 알았다. 산성이긴 하지만 토성이다. 그런데 안내판을 보니 왕궁의 ‘후원’개념이라고 되어 있다. 마치 창경궁의 후원 같은 곳이다. 유사시 도성의 방어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무척 더운 날씨이다. 더구나 무척 습하다. 비가 오고 나서 그런지 끈적끈적한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다지 높지 않은 부소산 낙화암으로 향했다. 남산보다는 훨씬 낮다.
공원은 잘 조성되어 있다. 아름들이 나무가 터널을 이루어서 햇볕을 가린다. 가는 길에 토성이 보인다. 성이랄 것도 없다. 그저 사람 키만한 둔덕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낙화암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백화정(百花亭)이다. 왜 백화라 했을까?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백화는 ‘백명의 꽃’이라는 뜻인데 이는 수많은 꽃이라는 말과 같다. 자연스럽게 삼천궁녀라는 말이 떠오른다.
백화정은 관광지에서 흔히 보는 팔각의 정자이다. 1929년에 지은 것이다. 일제시대 때 지은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때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백화정이라는 말은 소동파의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동파가 귀양 갔을 때 호수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거기에 ‘백화’라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풍광이 아름다운 것을 묘사한 말이다.
백화정에서 백마강을 바라 보면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소동파의 시를 인용하여 백화정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백화정 바로 아래는 낙화암이다. 데크로 조성되어 있어서 이곳에 서면 풍광이 아름답다. 저 멀리 산하대지가 아스라히 하늘 끝까지 펼쳐진다. 찐득찐득한 무더위의 불쾌지수를 날려 버리기에 충분한 풍광이다.
강에 배가 있다. 관광객을 위한 배이다. 아마 그 옛날 배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황포돛단배이다.
강에는 황포돛단배가 떠 있다. 이 강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백마강, 금강, 백강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곳 강의 공식명칭은 금강이다. 그러나 백마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 유행가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금강보다도 백마강 보다고 ‘백강’이라는 명칭이 더 와 닿는다.
백강은 금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백마강도 그렇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백강초등학교 등 여기저기 도로에 ‘백강’이라는 명칭이 이곳저곳에 있다. 이곳 사람들은 금강이나 백마강보다는 백강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백강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백강전투를 말한다. 일본 역사기록에는 백촌강전투라고 되어 있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망했다. 수도가 함락되고 왕은 붙잡혔다. 그러나 수도만 함락 되었을 뿐이다. 주력 군대는 남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부흥운동이 전개 되었다.
백강전투(663년)는 국제전쟁이 되었다. 당나라와 왜가 참전한 것이다. 왜가 왜 참전했을까?
요즘 유튜브에서 백제에 대한 것을 보고 있다. 백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백제는 중국과 일본에 식민지를 둔 해양국가였던 것이다.
왜가 참전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유튜브 등에서 본 바에 따르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 다시 백제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는 백제의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해양국가 백제가 개척한 해외식민지였던 것이다. 본국이 망했으니 부흥운동을 지원하려 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백강전투는 국제전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과 왜의 연합군은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게 패했다.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백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양국가 백제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때 결사항전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한반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부하의 배신으로 왕이 포로가 되었을 때 허무하게 무너졌다.
백제는 오래 전에 망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훈련소 때의 일이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들에게 노래를 하나 가르쳐 주었다. 제2훈련소의 노래이다. 노래 가사에 백제와 계백이 나온다. 나라는 망했어도 훈련소에서는 그 정신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검색하면 무엇이든지 찾아 낼 수 있다. 제2훈련소가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로 시작된다. 신라와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일까 두 번째 구절을 보면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로 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 백제는 잊혀 졌다. 천년 이상 지워졌다. 그래서일까 한반도 서남지역의 소국정도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는 대제국이었다. 서해와 남해를 마치 안마당처럼 드나들던 해양제국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측은한 느낌이 든다. 특히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부소산 낙하암에 서면 삼천궁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낙화암에서 보는 백강은 유려했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을 보면서 해양제국 백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관광용 항포돛단배와 같은 배로 바다를 누볐을 것이다.
부여는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아마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배로 들어 왔을 것이다.
날씨는 맑았다. 아스라이 저 하늘 끝에 있는 산이 마치 눈앞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비가 오고 난 뒤의 하늘과 땅이다.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다. 백화정이라고 이름 지을만하다.
산에 가면 절로 향하듯이 부소산에 오면 낙화암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착지가 낙화암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불자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고란사로 가야 최종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낙화암에서 되돌아 갔다. 그러나 불자는 고란사로 향했다. 절이 있으면 절로 향하게 되어 있는 것과 같다.
낙화함 하면 고란사이다. 낙화암과 고란사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낙화암에서 그친다. 그들은 불교인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고란사에 오기를 잘 했다. 고란사에 볼 거리가 많다. 낙화암만 보고 갔다면 반의 반도 보지 못한 것이다.
고란사, 수도 없이 들어 보았다. 오늘에서야 오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삼천리방방곡곡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전통사찰이 수도 없이 많다.
고란사에 가면 고란초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볼 수 없다. 다 캐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바위 한 켠에 피나 보다. 고란초는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고란사에 약수가 있다. 고란정이라고 한다. 바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다.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백제의 왕도 이 약수를 마시고 건강을 챙겼다는 전설이 있다.
고란사는 낙화암 아래에 있다. 백제가 멸망과 관련 있다. 궁녀들이 나당연합군에게 쫓길 때 50미터에 달하는 절벽에서 몸을 던졌는데 그 상황에 대한 벽화가 탱화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고란사는 언제 건립되었을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백제 아신왕(?~405년) 시기라고 전한다.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고려 현종 때 궁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 이윤영이 그린 산수도인 ‘고란사도(1748년)’에 고란사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고란사 주불이 모셔져 있는 법당 뒤편에 탱화가 있다. 법당에 가면 법당 둘레에 그려져 있는 불화를 말한다. 이곳 탱화를 보면 낙화암 전설과 관련된 탱화가 있다. 나당연합군이 몰려 오자 황급히 달아나는 궁녀들에 대한 것이다.
궁려들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쫓겼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 때 몸을 던졌다. 마치 궁녀들이 낙화처럼 떨어졌다. 치마를 뒤집어 쓰고 차례로 몸을 날린 것이다.
고란사 법당 뒤에 있는 탱화를 보면 그날의 급박함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망한 나라의 비애를 보는 것 같다.
백제는 망했다. 그러나 백제는 부활하고 있다.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알려지고 있고 역사작가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백제는 상상 이상으로 큰 나라였다. 한반도 서남에 치우친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바다를 무대로 중국대륙과 일본과 교역하던 해상왕국이었다.
백제는 망했지만 정신은 살아 있다. 논산훈련소의 육군훈련소가에서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로 시작되는 구절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 학자들에 의해서 부활되고 있다.
고란사에 종이 하나 있다. 누구나 울릴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고란사 영종(靈鐘)이라고 한다. 왜 영종이라고 했을까? 이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망국의 한을 안고 백마강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타종하므로 영종이라 합니다.”라고 안내판에 써 있다.
영종을 쳐 보았다. 절에서 보는 동종과 다르지 않다. 한번 쳐 보니 울림이 멀리 퍼져 나간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것 같다.
2024-07-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