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저열한 구함과 고귀한 구함, 담마짝까법문 읽기 시동을 걸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27. 16:26

저열한 구함과 고귀한 구함, 담마짝까법문 읽기 시동을 걸고
 
 
지금 이순간 고귀한 자가 된 것 같다. 한발 천천히 이동할 때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닌 자가 이 순간만큼은 내가 최고가 되는 것 같다.
 
날씨가 후끈하다. 아침부터 열기가 느껴진다. 이제 장마도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에어컨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힘든 계절이 시작되었다.
 
토요일 백권당의 아침이다. 재가우안거 8일째이다. 지난 7월 20일 우안거가 시작 되었으므로 딱 일주일 째 되는 아침이다.
 
아침 햇살이 블라인드 커튼 사이로 비친다. 형광등 불은 꺼 놓았다. 명상하는 데 있어서는 자연채광이 좋다.
 
발을 한발 한발 움직이다 보면 번뇌망상은 사라진다. 마음을 온통 발의 움직임에 두면 번뇌망상이 치고 들어 올 수 없다. 발을 움직이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고 이런 움직임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두 과정을 모두 아는 것은 새김(싸띠)이다.
 
늘 싸띠가 유지 되었을 때 고귀한 마음이 된다. 성스러운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심코 할 때가 많다. 일상에서 그렇다. 그래서 레디 사야도는 “한발도 무심코 내딛지 말라.”라고 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늘 앉는 자리이다. 방석은 단차가 져 있다. 인조가죽으로 된 레자방석 네 개를 겹쳐 놓았다. 엉덩이에 받칠 것이다. 바닥은 푹신한 방석이다. 여기에 앉으면 다리가 저리지 않는다.
 
이제 다리저림의 단계는 지났다. 작년 우안거에 들어 갔을 때 방석을 얇은 것으로 했다. 일부로 한 측면도 있다. 다리저림을 통해서 법을 보자는 것이다. 통증이라는 괴로운 느낌을 통하여 생멸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좌선 하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아야 한다. 부품이라는 물질적 현상과 부품을 아는 정신적 현상을 모두 새기는 것이다. 발생에서부터 소멸까지 면밀하게 새겨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 틈을 비집고 생각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행선과 좌선을 하면 고귀한 자가 되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새기고 있을 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
 
나는 고귀한 자가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은 행위에 의해서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고 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바라문이라 해도 장사를 하면 장사꾼이 되고,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라고 불리운다. 비천한 가문에 태어난 자라도 고귀한 행위를 하면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 온지 오래 되었다. 육십년 넘는 세월동안 나는 잘 살았는가?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이라는 말이 떠 오른다.
 
육십비인생, 육십년 동안 살아 보았더니 모두 다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육십이 되어서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헛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고 살았다면 칠십년, 팔십년이 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얻고자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 것은 매우 빨랐다. 중학교 때 불교를 만났다. 종로5가 가까이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에 배정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불교를 만났다. 불교시간에 ‘부처님의 일생’을 배운 것이다. 그때 사문유관에 대한 것이 기억에 강렬하다.
 
무엇이든지 처음 접하는 것은 기억에 강렬히 남는다. 중학교 때 처음 접한 불교는 마치 하얀 도화지 같은 청소년의 마음에 베어 들었다. 마치 흰 천에 물들이는 것처럼 받아 들인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은 올해로 51년 되었다. 중학교 1학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불교와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정반대로 미션스쿨로 배정 받았다.
 
불교와의 재인연은 2004년에 시작되었다. 강남에 있는 불교교양대학에 스스로 찾아 간 것이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고자 한 것이다.
 
여기 문제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문제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다. 문제를 괴로움이라도 해도 좋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어도 일주일이고 먹지 않아도 일주일이라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감기는 시간 지나면 낫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문제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다. 진짜 문제, 진짜 괴로움은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거창하게 생, 노, 병, 사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범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증회고, 즉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풀리지 않는 괴로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얻고자 불교에 다시 입문했다. 중학교 때 불교를 만난지 32년만의 일이다. 나는 문제를 해결했는가?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다. 초기불교와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 경전과 논서를 읽고 있다. 수년전부터 머리맡에 놓고 읽는다. 그 결과 사부니까야를 모두 다 읽게 되었다. 다만 앙굿따라니까야는 통합본 교정작업 할 때 읽었었다.
 
교정작업 하면서 읽은 경전이 꽤 된다. 테라가타, 테리가타, 청정도론, 자타카, 밀린다팡하는 교정작업하면서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법구경, 수타니파타, 이띠붓따까, 우다나를 읽었다. 율장 대품과 소품도 읽었다. 주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 된 것들이다.
 
어떤 이는 책 읽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남의 소를 센다든가,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본다고 말한다. 수행은 하지 않고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고도 말한다. 또한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지만 한마디도 말한 바 없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연 그 사람들은 사부니까야를 다 읽었을까?”라며 의문해 본다.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소리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에게 “수행한다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기 쉽다.
 
어디 가서 경전 읽었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역시 비난 받기 쉽다. 마치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수행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과 같고,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책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담마짝까법문읽기 시동을 걸고
 
초기불교를 만나고서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논서이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말한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저서나 법문을 접하자 “바로 이것이 불교이다!”라고 생각했다.
 
요즘 마하시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있다. 시동을 건 것이다. 늘 그렇듯이 머리맡에 놓고 읽는다. 가장 편한 시간에 가장 편한 자세로 읽는다. 진도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하루에 불과 서너 페이지에 불과하다. 새기며 읽기 때문이다.
 
담마짝까법문은 ‘초전법륜경’(S56.11)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가 법문한 것을 녹취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마하시선원에서 일창스님이 번역한 것을 읽고 있다.
 

 
자기가 먹지 못할 약을 다른 이에게 주어서는 안돼
 
마하시사야도는 학승일까?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마하시사야도를 학문이나 연구하는 교학승쯤으로 알고 있다. 태국에서도 비구계를 받아 수년 수행했다는 스님은 마하시사야도를 교학승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는 마하시사야도의 저서나 법문집을 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부처님 가르침을 교학으로 연구하는 학승이 아니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수행자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자기가 먹지 못할 약을 다른 이에게 주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담마짝까법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는 수행하지 않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서 문헌 정도로만 스승 노릇을 하는 사람들, 수행법을 설명하는 사람들, 수행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사람들은 그리 합당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는 먹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약, 스스로는 감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약을 다른 이에게 먹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설하고 말하는 설법이나 문헌, 책은 그리 믿고 의지할 만 한, 힘을 얻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담마짝까법문, 62-63쪽)
 
 
이 말은 알라라 깔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한 것이다. 알라라 깔라마는 이론과 수행을 겸비한 진정한 수행자였다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자기가 먹지 못할 약을 다른 이에게 주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페이스북에 스님들이 많다. 스님들은 산속에서 도나 닦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마치 시장바닥과 같은 페이스북에서도 볼 수 있다.
 
어느 스님은 페이스북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한다. 산중에 앉아 있어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왜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일까?
 
스님은 어려서 절에 들어갔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 스님의 글에는 부처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과 다름 없는 일상을 보여 준다.
 
어느 스님은 자신의 스승 이야기를 올려 놓는다. 스님의 계정에는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스승만 있다. 그것도 스승이 말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일 뿐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자기가 먹지 못할 약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남의 글이나, 이야기를 올려 놓는 것은 자신이 아직 먹지 않은 것이 된다. 스승의 글이나 이야기를 그대로 올려 놓는 것, 경전의 일부분을 그대로 올려 놓은 것 역시 자기가 먹지 못할 약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다.
 
마하시사야도의 저서와 법문은 철저하게 수행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교학이나 연구하는 학승이 아니다.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학승도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통찰하는 방법에 대하여 써 놓은 것이다. 이른바 빠리얏띠, 빠띠빳띠, 빠띠웨다에 대한 것이다.
 
저열한 구함과 고귀한 구함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읽으면 마음이 충만된다. 두꺼운 하드커버로 되어 있는 책을 열만 가슴 설레인다. “오늘은 어떤 감동을 줄까?”에 대한 것이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담마짝까법문집을 읽은지 이삼일 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저열한 구함’과 ‘거룩한 구함’에 대한 것이다. 이 것은 맛지마니까야 26번경 ‘고귀한 구함의 경’을 기반한 것이다.
 
왜 싫어하여 떠나야 하는가?
 
부처님은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마와 우따까 라마뿟따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라는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나는 그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싫어하여 그 곳을 떠났다.”(D26)라고 표현되어 있다.
 
같은 빠알리 원문이라도 번역자에 따라 맛이 다르다. 마하시사야도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무소유처 선정은 염오의 지혜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애착빛바램과 소멸을 위한 것도 아니다. 번뇌를 잠재우기 위한 것도, 특별한 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도, 꿰뚫어 아는 것을 위한 것도, 모든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무소유처 탄생지에 이르게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 탄생지에 이르러 6만 대겁 동안 수명을 길게 할 뿐이다. 그 생에서 임종했을 때 욕계 생에 다시 태어나 여러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죽음이 없는 법은 아직 아니다.” (담마짝까법문, 64쪽)
 
 
니까야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닙비다(nibbidā)’와 ‘위라가(virāga)’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싫어하여 떠나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염오(厭惡)와 이욕(離慾)이다.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야 해탈이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한 이 세상은 어떤 것인가? 산천초목삼라만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사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에서 발생되는 세상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세상인 것이다. 이런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선정에서는 마음이 평안하다. 무색계 선정에서는 몸은 없고 정신만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알라라 깔라마와 우따까 라마뿟따로부터 각각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 그러나 이런 선정으로는 불사에 이를 수 없다. 왜 그런가?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 없는 불사(不死)의 길로
 
부처님은 생사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 했다. 생사는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다. 더욱 확장하면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다름 아닌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보살은 선정의 최고 단계에 올라가 보았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윤회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6만대겁 또는 8만4천대겁 동안 수명만 길게 할 뿐이라고 했다.
 
비상비비싱처는 수명이 8만4천대겁이다. 우주는 일겁을 주기로 성주괴공한다. 8만4천 겁을 산다면 우주가 8만4천 번 생겨났다가 부수어졌다가를 반복하는 기간이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살고 난 다음 어떻게 될까?
 
천상에 사는 자는 복과 수명이 다 했을 때 아래 세상으로 떨어진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비상비비상처 탄생지에 이르게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 탄생지에 이르러 8만4천 대겁 동안 수명을 길게 할 뿐이다. 그 생에서 임종했을 때 욕계 생에 다시 태어나 여러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죽음이 없는 법은 아직 아니다.”(67쪽)라고 설명했다. 보살이 비상비비상처 선정을 버린 이유에 해당된다.
 
보살은 죽음 없는 법을 찾고자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불사이다. 그렇다고 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사라는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대승경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말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사함빠띠 하느님(Brahma)의 청원을 받고서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S6.1)라고 선언했다.
 
부처님은 불사의 진리를 설했다. 이는 죽지 않는 진리에 대한 것이다.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의 입장에 있다면 이것처럼 강렬한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불사는 영생이라는 말보다 더 자극적이다.
 
불사라는 말은 빠알리어 아마따(amata)를 번역한 말이다. 죽음을 뜻하는 마따(mata)에 부정접두어 아(a)가 붙어서 아마따가 되는데 한자어로 不死(불사)라고 번역된다. 한글로는 ‘죽음없음’이 된다.
 
불사에 대한 법문을 감로법문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니까야 도처에서 죽지않는 법, 감로법을 설했다. 불사가 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해서(pariyatti), 바르게 실천하면(patipatti), 통찰(pativedha)이라는 증득이 있게 된다. 불사의 길로 가는 것이다.
 
저열한 구함이란 무엇인가?
 
불사의 길로 가려면 저열한 구함을 버려야 한다. 이는 세속적인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하지 않게 구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있으면서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늙음에 묶여 있으면서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병듦에 묶여 있으면서 병듦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죽음에 묶여 있으면서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슬픔에 묶여 있으면서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번뇌에 묶여 있으면서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한다.”(M26)
 
 
저열한 사람들은 저열한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탐, 진, 치로 살아가는 일반사람들은 저열한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스로 번뇌에 묶여 있으면서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한다.”(M26)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간다. 감각을 추구하는 것은 저열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번뇌만 늘어날 것이다. 이와 같은 저열한 삶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빠알리 대역으로 설명했다.
 
 
“Bhikkhave비구들이여, ahampi나 역시도 pubbeva sambodhā깨 닫기 전에는 네 가지 진리를 아직 알지 못했을 때는, anabhisam- buddho바르게 깨닫지 못했을 때는 아직 네 가지 진리를 알지 못 했을 때는, bodhisattova samāno보살일 뿐이었을 때는 attanā jātidhammo samāno자기 스스로가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자기 자신이 새로운 생에 태어나는 성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jātidhamm- amyeva pariyesāmi태어나기 마련인 것만 추구했다: 태어나는 성품이 있는 것만 구하고 추구했다. attanā jarādhammo samāno자기 스스로가 늙기 마련이면서; 자기 스스로가 늙는 성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jarādhammamyeva pariyesāmi늙기 마련인 것만 추구했다; 늙는 성품이 있는 것만 추구했다.”(담마짝까법문, 55쪽)
 
 
보살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일반사람들과 다름 없었다. 생, 노, 병, 사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생에 대한 것을 보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있으면서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M26)라는 구절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새로운 생에 태어나는 성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는 성품이 있는 것만 구하고 추구했다.” (55쪽) 라고 설명했다.
 
돼지의 일생을 보면
 
유튜브에서 돼지농사를 짓는 것을 보았다. 베트남 유튜브 ‘Green forest life’채널을 말한다.
 
베트남 농부는 야생돼지 치기를 한다. 자연에서 나는 먹거리를 만들어 준다. 돼지는 주인이 주는 죽 등을 먹고 살을 찌운다.
 
돼지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잡아 먹히는 것으로 끝난다. 돼지는 어쩌면 잡아 먹히기 위해 태어났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꿀꿀이죽이라 불리우는 돼지죽 먹을 시간이 되면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 든다. 이어서“첩,첩,..”하며 빨아 들인다.
 
돼지의 일생은 사람들 고기가 되는 것으로 삶을 마친다. 사람이 먹기만 한다면, 감각을 즐기기만 한다면 돼지나 다름 없다. 이런 것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저열한 성품’으로 설명했다.
 
고귀한 구함이란 무엇인가?
 
저열한 구함을 버리고 고귀한 구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자 나에게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 있지만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생겨남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늙음에 묶여 있지만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늙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병듦에 묶여 있지만 병듦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병듦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죽음에 묶여있지만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죽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슬픔에 묶여 있지만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슬픔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번뇌에 묶여 있지만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번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M26)
 
 
보살은 생, 노, 병, 사에서 재난을 본 것이다. 이러한 재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열반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열반은 죽음이 없는 법이다. 불사가 되면 생, 노, 병, 사의 재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 노, 병, 사의 재난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성품’으로 설명했다. 태어남에 대해서는 “Attanā jātidhammo samāno자기 스스로가 태어나기 마련이기 때 문에 새로운 생에 태어나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jātidhamme ad- īnavam viditvā태어나는 성품에 허물을 보고서 ajātam anuttaram yogakkhemam nibbānam태어남이 없어 위없고 속박에서 안온한 열반을: 태어남이 없는 성품, 속박이 사라진 성품, 제일 거룩한 적정의 요소인 열반을 pariyeseyyam구하면 yam nūna어떨까; 좋을 것 이다.”(56쪽)라며 빠알리 대역으로 설명했다.
 
생, 노, 병, 사의 허물을 보았을 때
 
빠알리 경전을 볼 때 주석과 함께 보면 효과적이다. 그러나 주석을 볼 수 있는 빠알리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각주를 통해서 이해한다. 그런데 번역서에 각주가 상세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경과 주석을 참고하여 상세하게 해설해 놓았다. 성품이라는 말과 허물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설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생, 노, 병, 사에는 성품이 있다고 했다. 이는 고유성품을 말한다. 생에는 ‘태어남’이라는 고유성품이 있고, 노에는 ‘늙음’이라는 고유성품이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성품을 보았을 때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왜 그런가? 괴롭기 때문이다.
 
늙음도 괴로움이고 병듦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라면 태어남도 괴로움이 된다. 이런 고유성품을 보았을 때, 이런 고유성품은 허물이 된다. 괴로움을 유발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 된다.
 
생, 노, 병, 사에서 고유의 성품과 그로 인한 허물을 보았다면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생, 노, 병, 사에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추구한다.
 
생, 노, 병, 사의 허물을 보면 벗어나고자 한다. 고귀한 구함이 된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고귀한 구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스로 늙고 노쇠하다고 합시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가 늙은 사람이, 마찬가지로 늙고 노쇠한 여인이나 할머니를 함께 지내고자 구한다면 타당하겠습니까? 지금은 아직 늙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늙을 한 여인을 배우자로 찾아 구한다면 타당하겠습니까? 타당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건강하지 않아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가 건강하지 않고 매우 심하게 괴로운 느낌을 당하고 있는 이를 배우자로 찾아 구한다면 더욱 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건강해도 머지않아 질병으로 매우 큰 고통에 빠질 이를 찾아 구한다면 그것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평생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업이 좋지 않고 조건이 여의치 않아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병이 들어 환자가 됐다면 그 환자를 돌보느라 다른 한 사람은 큰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결혼한 지 오래되지 않아 배우자가 죽어서 슬퍼하며 큰 괴로움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마지막 시간에는 두 사람 모두 노인, 환자, 시체가 되어 고통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늙기 마련이고 병들기 마련 이고 죽기 마련인 감각욕망 대상들을 구하고 있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법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합니다. 그렇게 구하는 것이 제일 훌륭합니다. 지금 이 수행센터에서 법을 수행하고 있는 출가자나 재가 수행자들은 그렇게 제일 훌륭한 구함으로 법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우 기뻐할 만 한 일입니다.”(담마짝까법문, 57쪽)
 

 

 
황혼에 재혼하려는 사람이 있다.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원한다. 젊은 여자는 늙은 남자와 결혼하려 할까? 돈을 바란다면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늙은 남자와 결혼 했을 때 그 남자의 병수발을 들어주는 신세가 될지 모른다. 이런 것은 속된 말로 남는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는 언젠가 늙어 죽고 말 것이다. 배우자보다 먼저 자신이 늙고 병들어 죽을 수 있다. 배우자에게 병이 들었을 때 병수발을 해야 한다. 감각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런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닥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늙기 마련이고 병들기 마련 이고 죽기 마련인 감각욕망 대상들을 구하고 있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57쪽)라고 말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고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하여 경에서는 “번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는”(M26) 삶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법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합니다.”(57쪽)라고 했다. 열반을 추구하는 삶이 고귀한 삶임을 말한다.
 
단 한사람이 읽어 주어도
 
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을 추구한다. 이는 에스엔에스에서도 확인된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페이스북에서는 긴 글은 찾아 볼 수 없다. 짧고 자극적인 글이 대세이다. 대부분 사진으로 승부하려는 것 같다.
 
사진을 설명하는 위주의 글이 되면 감각적이기 쉽다. 사진 설명 없는 글은 감각적이지 않은 글이 되기 쉽다. 담마 위주의 긴 글은 감각적 글과 거리가 있다.
 
오늘도 긴 글을 썼다. 무려 A로 열 페이지가 넘는다. 아침 일찍 쓰기 시작하여 오후까지 하루종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글은 인기가 없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패싱되기 쉽다.
 
글을 쓸 때 보는 사람을 고려 하지 않는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글쓰기를 말한다.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은 패싱 할 것이다. 그러나 유익한 것을 구하자 하는 사람은 볼지 모른다. 글 읽는 사람이 단 하나만 있어도 글 쓴 보람이 있다.
 
 
2024-07-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