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가는 날에
담마와나선원 가는 날에
글도 전쟁하듯 쓸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을까? 마치 기사 원고 마감시간에 쫓기듯 쓰는 것을 말한다.
지금 시각 오전 일곱 시이다. 국민휴가주간의 한복판에 있는 날에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오늘은 8월 4일 일요일이다. 일요일임에도 백권당에 나왔다. 주말이 없는 삶이다. 휴가도 없다. 비싼 임대료와 관리비가 아까워라서라도 나와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에 있으면 퇴행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아침 6시 18분에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찰칵 했다. 배낭을 짊어진 내모습을 찍은 것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다.
페이스북을 보면 얼굴 노출이 심한 사람이 있다. 재가자는 물론 스님도 노출한다. 자주 보니 식상하게 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식상한다. 미인의 얼굴도 자주 보면 역시 식상한다. 하물며 그다지 미인이 아닌 사람이 자주 얼굴을 노출시킨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페이스북은 생생한 삶의 현장과도 같다. 이런 인생 저런 인생 등 갖가지 인생군상이 있다. 그 중에 ‘관종’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관종, 관심종자를 줄인 말이다.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은 관종의 기질이 있다. 얼굴을 자주 노출시킨다면 관심종자 가운데 관심종자이다.
어떤 이는 얼굴을 숨긴다. 얼굴뿐만 아니라 실명도 숨긴다. 얼굴도 숨기고 실명도 숨기다 보니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올려 놓은 글로 판단할 뿐이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알까? 접촉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사람에 대하여 제대로 알려면 함께 살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오랜 세월 함께 살아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계행이 청정한지는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함께 활동하다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정직한지는 한입으로 두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다.
페이스북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다. 올려진 콘텐츠를 보면 대부분 감각적인 내용이다. 아름다운 풍경, 먹거리 같은 것이다. 아무 설명 없이 사진 하나 달랑 올려 놓는 경우도 많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글을 보면 자랑이기 쉽다. 외국에 나가서 경험한 것을 올려 놓기도 한다. 어떤 이는 손주자랑을 늘어 놓기도 한다.
처자식 자랑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처자식 자랑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없다. 그러나 손주자랑은 대놓고 하는 것 같다.
인간사는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희희낙낙하다가도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루하루 무상, 고, 무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백권당에 6시 41분에 도착했다. 집 떠난지 23분만이다. 1.4키로 거리이다. 오늘은 좀 서둘러야 한다. 평소보다 걸음을 빨리 했다.
오늘 오전 10시에 법회가 있다. 청파동에 있는 담마와나선원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탁발법회가 있는 날이다. 열두 분의 상가스님을 모시고 포살법회를 한다.
포살법회는 보름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니까야경전을 보면 초하루날도 해당되고 팔일도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한달에 네 번 있게 된다.
오늘은 8월 4일이다. 음력으로 7월 초하루가 된다. 한국의 모든 절에서는 아마도 초하루법회나 불공이 있을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초하루를 맞이하여 포살법회가 열린다. 우안거 기간 중에 열리는 법회이다. 오늘로서 우안거 16일째이다.
재가자가 우안거를 하고 있다. 이를 재가우안거라고 이름 붙였다. 우안거 기간 중에 출가자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생업이 있는 상태에서 팔계를 지키며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루 삼십분 좌선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재가자우안거는 작년에도 했었다. 올해로서 두 번째이다. 스스로 안거에 드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규칙을 정해서 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먹는 것도 해당된다.
아침이 되면 아침을 먹어야 한다. 아침에는 간단히 먹는다. 찐계란 하나, 찐고구마 하나, 그리고 에어프라이어에 찐 감자를 먹는다. 여기에 꿀물을 곁들인다.
아침식단에 고구마는 빠지지 않는다. 이삼년 계속 되고 있다. 오늘 고구마는 특별한 것이다.
어제 시흥 관곡지에 갔었다. 연꽃을 보고자 간 것이다. 해마다 7월말이나 8월초에 연꽃을 보러 가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관곡지는 수도권을 대표하는 연꽃테마파크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축제가 요란하게 열렸으나 코로나 이후에는 조용하다. 다만 연을 주제로 한 특산품이나 지역 농산품을 판매하는 부스가 있을 뿐이다.
노점상을 보면 지나치지 않고자 노력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채소와 같은 먹거리 파는 행상을 보면 팔아 주고자 한다. 지역축제 현장에 가면 지역특산품을 역시 팔아 주고자 한다.
관곡지에 가면 연꽃만 구경해서는 안된다. 농산품 파는 부스에서 무언가라도 하나 팔아 주어야 한다. 마침 눈에 포착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고구마이다.
매일 고구마를 먹는다. 호박고구마, 밤고구마를 먹는다. 그런데 관곡지 특산품 매장에서 본 고구마는 독특했다. 마트에서 보지 못하던 것이다. 마치 카사바처럼 생겼다.
카사바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유튜브에서 보았다. 그런데 관곡지 고구마를 보자 카사바처럼 생겼다고 본 것이다. 마치 뿌리줄기가 울퉁불퉁해 보이는 것이 카사바뿌리줄기처럼 보인 것이다. 이 고구마 이름은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해 보아야 한다. 구글 검색창에 ‘고구마 종류’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이미지에서 찾아 보니 고구마 신품종이 있다. 관곡지 매장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호감미’ 고구마이다.
지역에 가면 지역 특산품을 사야 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사람의 물건은 팔아 주어야 한다. 호감미 고구마 한봉지에 5천원이다. 적정한 가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만감이다. 지역특산품을 팔아 주었다는 충만감이 연꽃 구경한 것 보다 더 큰 것이다.
매일 장문의 글을 쓰고 있다. 이런 글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이다. 감각을 추구하는 시대에 맞지 않다. 그럼에도 긴 글을 쓰는 것은 글을 하나의 수행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잘 쓴 글인가? 그것은 성찰이 있는 글이다. 성찰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 자신의 허물을 보고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최악의 글은 어떤 것일까? 자랑하는 글이다. 자식자랑, 손주자랑하는 글이 대표적이다. 가족이 없는 사람, 자식이 없는 사람, 손주가 없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된다.
오늘은 마음이 급하다 오전 8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 청파동에 10시에 도착하려면 8시 반까지 글을 마쳐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반이다. 속도전이다.
글을 전쟁하듯 때로 쓴다. 속도전하는 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해 놓고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판 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속도전 글쓰기 해도 메시지는 있어야 한다. 보아서 하나라도 유익한 것이 있어야 한다. 머리맡에 놓고 읽는 ‘담마짝까법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다.
“삼매와 지혜가 한 단계 더 향상돼 힘이 더욱 좋아 졌을 때는 ‘눈이 있어서 본다. 보이는 형색이 있어서 본다. 귀가 있어서 듣는다. 들리는 소리가 있어서 듣는다. 굽히려는 마음이 있어서 굽힌다. 펴려는 마음이 있어서 편다. 움직이려는 마음이 있어서 움직인다. 사실대로 모르는 무명이 있어서 좋아하고 바라고 원한다. 좋아하고 원해서 집착한다. 집착 해서 행한다. 행해서 좋고 나쁜 결과가 생겨난다’라는 등으로 이해하고 알고 봅니다.”(담마짝까법문, 149쪽)
마하시사야도가 말한 것이다. 이 법문은 초전법륜경(S56.11)에서 눈과 지혜가 생겨나는 모습에 대한 설명이다. 물질과 정신을 관찰했을 때 단계적으로 보는 눈과 아는 눈에 대한 지혜가 생겨남을 말한다.
매일 삶을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기 전까지 갖가지 활동을 한다. 단지 먹고 마시는 등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일상에 일어나는 일을 놓치지 않고 관찰해야 한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수행자의 삶은 범부의 삶과 다르다. 범부는 “왜 살아야 할까?”라고 묻지만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며 의문한다.
사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살아 있으니 사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다. 이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된다.
수행자는 사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어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며 의문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성찰은 반조라는 말과도 같다. 성찰이 일상용어라면 반조는 수행용어이다. 반조 없는 체험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외워서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왜 그런가? 숙고와 반조가 없기 때문이다.
성찰과 숙고와 반조, 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요청된다. 좌선을 하는 것도 성찰과 숙고와 반조하는 것이 된다. 이론 적으로만 안다면, 외워서만 안다면 발전이 더디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비담마와 관련된 문헌들에 밝혀 놓은 대로 단지 외워서 숙고하는 것으로 이렇게 특별한 앎과 봄이 생겨나겠습니까? 원래 외워 놓은 것 보다 더 특별한 앎과 봄이 생겨나겠습니까? 숙고하지 않고 반조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외워놓은 것조차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직접 경험하여 아는 지혜와 통찰지가 아니라 외워 놓은 인식으로 아는 것 일 뿐이기 때문입니다.”(담마짝까법문, 150쪽) 라고 말했다.
지혜는 외워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찰하고, 숙고하고, 반조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위빠사나 지혜는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먼저 근본물질을 구분해서 파악하고, 다음에는 파생물질을 파악하고, 비물질에 해당되는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다음에는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했을 때 세 가지 특성, 즉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생겨난다. 이렇게 아는 것에 대하여 “이전 보다 나중에 더 거룩하고 높고 특별한 것을 아는 모습입니다.”(153쪽)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기 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시간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주어져 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완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마치 시험을 망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시험 볼 때 시간은 주어져 있다. 주어진 시간 내에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시간이 없어서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는 알을 낳는다. 부화시켜 새끼를 기른다. 그런데 시간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삼개월 내에 알을 낳고 부화시키고 새끼를 길러서 날려 보내야 한다.
오늘 속도전 했다. 한시간 삼십분을 목표로 잡아 놓고 자판을 두드린 것이다. 시나리오는 이미 머리 속에 있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을 표현만 하면 된다. 글도 전쟁하듯이 속도전 한다. 마치 시험보듯이 글을 썼다. 한시간 36분만에 글을 완성했다.
2024-08-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