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비급이 살아가는 방식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3. 09:51

비급이 살아가는 방식
 
 
어떻게 물질과 정신을 따로따로 새길 수 있을까? 오늘 아침 좌선을 하면서 생각한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배의 부품을 새기고, 또한 부품이라고 아는 정신을 새기는 것이 가능할까?
 
오늘 재가우안거 46일째이다. 음력으로 8월 초하루가 된다. 추석이 머지 않았다. 보름 후가 추석이다. 올해 추석은 9월 17일이다.
 
늘 컨디션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다르다. 마치 노인이 된 것 같다. 사실상 노인이나 다름 없다. 내년이면 지공거사가 된다.
 

 
삐, 삐”소리로
 
그제의 일이다. 명학역에서 내렸다. 시골역 같은 분위기의 작은 역에 승강기가 하나 있다. 지상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이다. 명학역 북쪽방향 끝에 있다. 일단의 노인들이 탑승했다.
 
승강기 문은 2층에서 열렸다. 승강기를 나오자 마자 개찰구이다. 교통카드를 댔다. “삐”소리가 났다. 뒤에 노인들이 나는 소리는 어떤 것일까? 예상대로 “삐, 삐”하고 두 번 소리가 났다.
 
때가 되면 노인이 된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 ‘강제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국가에서 정하는 노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되면 혜택이 많다는 것이다.
 
나도 내년에는 “삐”소리가 두 번 날 것이다. 그리고 입장료 혜택을 받을 것이다. 평일에 KTX타면 할인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과세혜택이다. 마을금고에 예금이나 적금을 들면 세금을 떼 가지 않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잘 잔다는데
 
몸은 이미 노인이나 다름 없다. 매일매일 상태가 다르다. 오늘은 왠일인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깬 것 같다. 더위가 심한 것도 아니다. 왜 그런 것일까? 나에게 알 수 없는 집착이 있는 것일까?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잔다고 한다. 어느 날 핫타까 알라바까 왕자는 “세존이시여, 잠을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고 말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이 있다. 베개에 머리가 닿음과 동시에 곯아 떨어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깨달은 사람일까? 분명한 사실은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왕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A3.35)
 
 
탐욕이 있는 자는 잠을 잘 못 잘 것이다. 마음 속에서 욕망의 불꽃이 타오를 때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부인이 여럿 인 사람은 밤에 잘 자지 못할 것이다. 흥분된 상태에서는 잠자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요인은 많다. 분노가 치밀 때도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냄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성냄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A3.35)라고 묻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잠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내 돈 떼어 먹고 달아난 그 인간만 생각하면 열불이 날 것이다. 나를 버리고 떠난 그 인간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요인은 많다. 부처님은 어리석은 고뇌로 불타도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잠을 잘 자는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감각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청량하고 집착이 없고
완전한 적멸을 성취한
거룩한 님은 언제나 잘 잠자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적멸을 성취한 님은
고요히 잘 잠자네.”(A3.35)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이다. 이는 깨달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은 자는 잠을 잘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고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나에게 잠 못 이루는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알 수 없는 집착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신체적인 요인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 꽉 쥐고 있는 것이 있다면 수면을 방해할지 모른다.
 
누구나 집착이 있다.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누구나 오취온적 존재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몸에 대한 집착, 느낌에 대한 집착, 지각에 대한 집착, 형성에 대한 집착, 의식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능행스님의 글을 받고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좌선을 하고 난 후에 글을 쓰면 더 잘 써진다. 마음이 혼탁해진 상태에서 글을 쓰면 잘 써지지 않는다.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맑은 상태가 되었을 때 글을 쓰면 술술 써진다.
 
그제 윤회에 대한 글을 올렸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과 교수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요즘 속된 말로 말한다면 까는 글을 올린 것이다. 이런 것도 어쩌면 ‘구업(口業)’ 짓는 것인지 모른다.
 
진리에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이 진실이라고 믿는 자에게 있어서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비판하는 것이 구업이라면 달게 받겠다.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은 댓글로 알 수 있다. 엄지 모양의‘좋아요’나 하트 모양의‘최고에요’와 같은 이모티콘으로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능행스님의 글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사두사두사두.
거사님의 헌신으로 페이스북이란
공간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읽어내려 갈 때 마다 고마움전합니다.
시간도
집중력도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善한 마음에 공경히 합장합니다.
 
10월1~20일 까지
이번엔 미얀마 양곤에 있는
모곡사야도 센터에서20일간
정진을 해 볼 작정입니다.
 
틈틈히 더 자주 거사님 글을 읽고
새김을 하게됩니다.
환자들 보살피고 살다보면
수행이 여일하지 못해서
수행하는 습이 들만하면
깨어지는 과보에 시달리는 삶이다 보니
이렇게 짧게짧게 여름결제철에
미얀마로 혼자 건너 갑니다.
 
오늘 윤회에 대한 지당한 말씀에
깊은 공감을 가집니다.
김해스님과는 윤회 건으로
몇차례 부디친 경험이 있군요.
 
윤회 ㅡㅡ
언제쯤 벗어나려나 ᆢ끙^^
항상 건강하시기를요.
자재병원에서 능행합장”
 

 
능행스님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능행스님은 어떤 분인가? 한국불교에 있어서 호스피스병동을 운영하고 있는 명사가운데 명사스님이다. 그런 스님이 댓글을 준 것이다.
 
스님에게 답장했다. 스님에게 “스님이 글 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미천한 불로거의 글도 스님이 읽고 있네요. 더욱더 정진하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능행스님이 글 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를 “미천한 블로거의 글도 스님이 읽고 있네요.”라는 말로 표현했다.
 
스스로 미천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사와 비교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명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최근 에스엔에스에서 본 것이 있다. 미주현대불교 발행자 K선생이 ‘붓다빅퀘스천’에서 강연한 것이다. 누구나 그 자리에 설 수 없다. 명사가 된 것이다.
 
미주현대불교 발행자 K선생과 2022년 12월에 스리랑카 순례한 적이 있다. 나와 함께 했던 사람이 명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8년 12월 31일 함께 미얀마로 수행 갔던 불교계 신문 대표기자 출신 L선생도 붓다빅퀘스천에서 강연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명사인가? 나는 명사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불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내가 명사의 조건을 갖추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종교전문 ‘조현’ 기자의 유튜브 채널에 초대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종스님과 연예인 선우용녀가 진행하는 BTN프로에도 초대받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BBS의 ‘무명을 밝히고’에 명사로서 초대받았을 것이다.
 
조현 기자는 나를 왜 초대하지 않은 것일까? 불광미디어의 붓다빅퀘스천 담당자는 왜 나를 섭외하지 않는 것일까? 명사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유명인이 아닌 것이다. 또한 피에치디(Ph.D)타이틀이 없는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타칭 파워블로거이지만
 
세상에는 에이(A)급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B)급 사람들도 있다. 명사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에이급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이름이 있고 학위가 있고 명성이 있는 사람이 대상이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블로거도 명사가 될 수 있을까? 불교계에서 가장 누적조회수가 많은 타칭 ‘파워블로거’도 명사가 될 수 있을까? 불러 주지 않으니 명사라고 볼 수 없다.
 
아직까지 한번도 명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명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명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 그런가? 능행스님과 같은 명사가 내 글을 보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사님의 헌신으로 페이스북이란 공간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읽어내려 갈 때 마다. 고마움전합니다.”라는 글을 남겼을 때 부끄럽고 창피했다.
 
스님은 내 글에 진정으로 고마워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틈틈히 더 자주 거사님 글을 읽고 새김을 하게됩니다.”라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좋아요’나 ‘최고에요’이모티콘은 보이지 않지만 틈이 날 때 새기며 읽고 있는 다는 말에 감동했다.
 
2005년 이후 시간부자가 되었을 때
 
글쓰기 한지 18년 되었다. 2006년 이후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처음부터 글을 쓴 것은 아니다. 2005년 더 이상 직장을 잡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개인사업자가 되었는데 시간부자가 되어서 끄적거리게 된 것이다.
 
한사람의 글도 타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매일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글로 표현 했는데 누군가 본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아마 삼사년 지났을 때의 일일 것이다. 그때 블로그만 했었다. 페이스북과 유튜브는 없던 시절이었다. 어떤 사람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았다. 올린 글을 보고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가능하면 개인적 주관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경전을 근거로 하여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글쓰기 습관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내 글을 보는 독자는 이런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경전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블로그에 소개 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원했던 것 같다. 골방에서 내 블로그를 보고 희망을 보았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절망에 빠진 자가 골방에서
 
능행스님은 세상사람이 다 아는 명사이다. 조현기자의 채널에도 초대받았고 여러 불교 방송 매체에도 출연했다. 이런 스님의 영상을 다수 보았다.
 
스님이 조현기자와 대담한 영상을 보았다. 그때 근육이 마비 되어 가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적이 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마비된 근육이 부드러워져 펴졌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무엇이 환자로 하여금 근육을 굳게 만들었을까? 집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집착의 문제일 것이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집착하게 만들었을까?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이런 것도 집착일 것이다. 때로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요즘 속된 말로 ‘까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글을 보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스님도 있고 학자도 있다. 그러나 표를 내지 않기 때문에 누가 보는지 알 수 없다.
 
인터넷 시대에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모두 공유된다. 한번 인터넷에 올려지면 내 글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 읽고 있다. 절망에 빠진 자가 골방에서 읽고 있는지 모른다.
 
일이년이 멀다하고 직장을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사가 아니다. 불교계에서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최고의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것이다. 더구나 불교와는 거리가 먼 공학도 출신이다.
 
오랜세월 직장생활 했다. 쫓겨날 때까지 하다 보니 20년 직장생활 했다. 국민연금을 받으려고 자료를 보니 무려 12군데 옮겼다. 일이년이 멀다하고 직장을 옮긴 것이다.
 
회사가 사업을 접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새직장을 찾아야 했다. 이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니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
 
요즘에도 직장꿈을 꾼다. 새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쩔쩔 매는 꿈이다. 새직장에서 무언가를 보여 주지 못한 것이다. 실력이 들통난 것처럼 안절부절하다가 깨는 꿈이다. 마치 군대 갔다 왔는데 또 다시 끌려 가는 것같은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람 앞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직장에서는 셋톱박스 개발자로 일했다. 하드웨어개발 담당이었다. 회로설계를 하고, 인쇄회로기판설계를 하고, 특성검토를 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개발부터 양산까지 책임지는 일이었다.
 
오랜세월 제조업에서 일해 왔다. 이는 오랜 세월 납땜했다는 말과 같다. 인두를 들고 납땜하는 것도 개발과정 중의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계측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하는 일을 했다. 사람 앞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블로그는 누적조회수가 870만명에 이른다. 2005년 블로그 개설이래 7800개 가량 글을 썼다. 거의 매일 쓴 것이다. 또한 과거 쓴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모아 책을 만들었다. 현재 135권까지 만들었다. 이런 것도 자랑일까? 이런 것도 명사의 조건일까?
 
조현기자나 불광미디어에서 초대한다면 어떻게 할까? 결코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한번도 대중 앞에 서 본적이 없다. 골방에서 글만 쓴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급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스스로 비주류, 비급, 삼류라고
 
세상에는 급이 있다. 세상에는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듯이, 에이급이 있으면 비급도 있는 것이다. 일류가 있으면 이류가 있다. 더 나아가 삼류도 있다.
 
글을 쓸 때 종종 자조적인 표현을 한다. 나는 비주류, 비급, 삼류라는 말이다. 스스로 비하하는 말이다. 블로그에 글 좀 썼다고 해서 주류가 되고, 에이급이 되고, 일류가 될 수 없다.
 
스스로 비주류, 비급, 삼류라고 말한다. 그러나 글만큼은 주류, 에이급, 일류를 지향한다. 그러나 명사는 아니다. 설령 조현기자나 불광미디어, 또는 다른 매체에서 초대해도 응하지 않겠다.
 
비급은 비급나름대로 역할이 있다. 그것은 골방에 있는 사람들이다.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런데 놀랍게도 능행스님과 같은 명사가 내 글을 보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올린 글을 새기며 보고 있다고 했다. 명사가 보고 있으니 나도 명사라고 할 수 있을까?
 

 
비급이 살아가는 방식
 
세상에는 숨은 고수가 많다. 조현기자의 채널이나 불광미디어의 붓다빅퀘스천에 초대되어야만 명사는 아닐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빤냐와로 스님이 이들 매체에 출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호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다. 그들은 결코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명사라고 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도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과 교수가 이에 해당된다.
 
법구경에 명언이 있다. 이는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고 했다. 자신의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현명한 자가 되는 것과 같다.
 
능행스님의 글을 받았을 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꼈다. 매일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스님이 어떻게 내 글을 읽은 것이다. 더구나 새기며 읽는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만은 죽음의 길이다. 명사가운데 일부는 자만으로 가득 차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떠벌릴 때 해악이 된다. 명사라고 하여 모두 훌륭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이럴 때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다.”(Dhp.63)라는 법구경 가르침이 딱 맞을 것 같다.
 
오늘도 긴 글을 썼다. 삼십분 좌선하고 두세 시간 글쓰기가 되었다. 이런 나의 글쓰기는 언제 멈출까? 엔진이 멈출 때까지 글쓰기는 계속 될 것 같다. 자화자찬 하는 비급 블로거의 글도 때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세상에 비급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2024-09-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