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의미 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바보처럼
아무 의미 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바보처럼
이렇게 상쾌할 수 없다.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없다. 우울한 마음도 날려 버린다. 이런 맛에 명상하는 것인지 모른다.
재가우안거 57일째이다. 하루 하루 날자는 카운트 된다. 우안거는 음력 구월 보름날인 10월 17일에 끝난다. 앞으로 한달 하고도 3일 남았다.
오늘 아침 우울했다. 친구 처로부터 친구가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해남으로 귀촌해서 밤호박, 꿀고구마와 같은 특산품을 농사짓던 해남친구이다.
해남친구는 암으로 사망했다. 대장암수술을 받았는데 성공적이지 않았다. 소장까지 문제가 있어서 장루를 두 개나 달고 있었다. 병원에서 더 이상 손 쓸 수 없어서 죽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것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죽을 때 한이 없어야 한다. 원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양심에 가책이 없어야 한다. 계를 잘 지키는 것도 잘 사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가장 먼저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본격적인 일과가 진행된다. 지금은 우안거기간이다.
행선한 지 십분이 지나자
오늘 아침 행선하는 데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은 행선도 안되고 좌선도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행선을 시작한 지 십분 지났을 때 마음이 밝아진 것이다. 아마도 창 바깥 햇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마음이 밝아지면 잘 보이는 것 같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행선을 하는데 발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이때 발의 모양을 떠오르게 하면 안된다. 단지 움직임만 보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개념으로 보면 안된다. 개념을 보면 실재를 볼 수 없다. 개념을 걷어 내야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 있다.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을 보지 않고 운동성만 보아야 한다. 발을 들 때의 가벼움,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 발을 디딜 때의 차가움이나 딱딱함을 보는 것이다.
행선한 지 십분이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전 상황과 비교하면 천지차이가 났다. 이를 새김의 확립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빠사나수행은 새김의 확립에 성패가 달려 있다. 새김이 계속 유지 되지 않으면 개념에 지배된다. 생각이라는 언어적 개념이 가장 크다. 틈을 비집고 들어 와서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마치 집에 도둑이 든 것과 같다.
요즘 행선이나 좌선 할 때 노트를 가까이 두고 있다. 행선 중이나 좌선 중에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본래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을 놓칠 수 없다.
행선이나 좌선 중에 기록해도 새김의 확립에는 지장이 없다. 삼매는 깨지지 않는다. 이는 새김의 토대가 탄탄해져 있기 때문이다.
감은 눈에 햇살이 가득 퍼졌을 때 지극히 평화로웠다. 세상에 이런 평화가 있을까? 조용한 백권당에 홀로 눈을 감고 행선대를 왕복할 때 지극한 기쁨을 맛보았다.
행선을 할 때 꽃길을 걷는 것 같았다. 꽃동산의 꽃길을 말한다. 이런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좌선으로 가져 가도 될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좌선으로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경행은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고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설명되어 있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으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다.
행선은 삼십분 했다. 행성에서 형성된 새김을 좌선으로 가져 가고자 했다. 이렇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좌선에서도 새김이 유지 된다.
행선이 실패하면 좌선도 실패하기 쉽다. 행선에서 성공하면 좌선도 성공하기 쉽다. 이는 새김의 확립 여부에 달려 있다. 새김의 토대가 탄탄하면 좌선으로 가져 가도 새김이 그대로 유지된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기분, 이 느낌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가는 것이다.
오늘 행선은 기대하지 않았다. 마음이 우울한 상태에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 했을 때 번뇌는 사라졌다. 아니 마음의 장애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자리에 앉았다. 타이머를 삼십분으로 세팅해 놓았다. 행선에서 새김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좌선에서 새김을 확립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는 없다. 단지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보기만 하면 된다.
좌선할 때 마음이 밝아 올 때가 있다. 이럴 때 잘 보인다. 마치 방이 환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과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잘 보였다. 이는 시작과 끝이 잘 보인다는 말과 같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왜 배를 보라고 할까? 왜 마하시전통에서는 호흡을 보지 않는 것일까? 이는 ‘몸관찰’과 관련이 있다.
몸관찰 위주의 마하시 전통
위빠사나 수행처마다 보는 부위가 다르다. 어떤 수행처에서는 마음을 주관찰 대상으로 삼는다. 또 어떤 수행처에서는 느낌을 주관찰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마하시전통의 선원에서는 몸관찰위주이다.
몸관찰을 위주로 하는 수행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행선과 좌선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대념처경(D22)에서 몸관찰에 대한 것을 보면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고찰’이 있는데 이는 행, 주, 좌, 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걸어 갈 때는 걸어간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말했다. 이는 행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것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내가 걷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행선할 때 왼발, 오른발 하며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한시간 행선하면 한시간 반복하는 것이다. 왜 이런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이는 나라는 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부수는가?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행선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발을 들 때 이는 물질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발을 들 때 이를 아는 마음은 정신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세상에 이 두 과정 밖에 없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발을 들게 하는 나, 자아, 참자아, 참나, 영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행선할 때 “누가 가는 가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행선하는 수행자는 “어떠한 뭇삶(衆生)도 가는 것은 아니다.”(Smv.766)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감일까? 이에 대하여 행선하는 수행자는 “어떤 뭇삶의 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감도 아니다.”(Smv.766)라고 말한다.
행선의 이익은 무엇일까? 행선하면 집중이 되는데 여기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눈을 감고 행선 했을 때 한없이 마음이 밝고 평화로워진다. 이런 기분을 맛보기 위해서 행선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이익이 있다. 거기에는 내가 없는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면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나에 대하여 어떤 이는 참자아 또는 참나라고 말한다. 참나가 있어서 가게 하고 서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확립되어서 행선을 하게 되면 이 세상에 물질과 정신의 과정만 있게 됨을 알게 된다.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의 침투에 의해서
행선을 하면 오로지 가는 것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때 “누구의 감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는 “어떤 뭇삶의 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감도 아니다.”(Smv.766)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원인으로 움직임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의 침투(cittakiriyavāyodhātuvipphāra)에 의해서만 간다.”(Smv.766)라고 말한다.
행선할 때 발을 내 딛는다. 여기에는 어떤 참자아(眞我)가 있어서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주석에서는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나는 가겠다.’라고 마음이 일어나고, 그것이 운동을 발현시킨다.”라고 했다. 이처럼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 침투(cittakiriyavāyodhātuvipphāra)’에 의해서 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발이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 침투에 의한 것이다. 움직이려는 마음의 의도가 있어서 발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의도가 없다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발이 움직인다. 이는 마음의 암시와 몸의 암시에 의해서 발을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몸이 이끌어져서 감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자아, 참자아, 영혼, 주재자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행선할 때 정신과 물질의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몸의 자세와 관련된 새김은 우리의 신체의 행동에 대한 일상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모든 동작에 대한 세밀하고 지속적이고 올바른 알아차림과 몸의 대리자로서의 분석적인 검토 – 자아의 환상을 몰아내려는 의도를 가진 – 를 포함하는 것이다.”(Smv.766)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자아라는 환상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집착하고 있으면 괴롭다.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를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거기에는 그 어떤 자아나, 참자아, 영혼, 주재자가 없음 알게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정견
대념처경 주석을 보면 수행하는 목적을 알 수 있다. 집착된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 오온이 내 것이라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좀더 구체적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팔정도에서 정어(正語)에 대한 도 구성요소를 보면 “또한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맡을 때마다 먹어서 알 때마다 닿을 때마다 생각해서 알 때마다 생겨나는 물질-정신 대상들을 관찰하여 무상-고-무아의 성품일 뿐이라고 사실대로 알고 있으면 그렇게 바르게 알아지는 대상과 관련하여 삿된 말을 할 번뇌들조차 더 이상 생겨날 기회가 없습니다.”(담마짝까법문, 174-175쪽)라고 말했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좌선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일상에서 육문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정신 따로, 물질 따로 관찰하면 나라는 개념이 들어 갈 수 없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고 나면 텅 빈 것과 같은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고 또 읽는다. 언제까지라도 새기고 싶다. 이는 아직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른 새김, 즉 정념(正念)에 대해서 “몸의 여러 현상을 비롯해서 느낌과 성품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해서 그것들을 따라 새기는 것을 바른 새김이라고 한다.” (담마짝까법문, 188쪽) 라고 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팔정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설한 것이다. 정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찰하는 대상을 사실대로 계속해서 아는 것이 바른 견해 도 구성요 소입니다. 마음청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새겨 알아지는 물질대상 과 새겨 아는 마음·정신을 사실대로 구분해서 압니다. 이렇게 앞이 분명해졌을 때 견해청정(ditthi visuddhi)이 생겨납니다.
그 뒤에 계속 관찰해 나가면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서 알게 됩니다. ‘굽히려는 마음이 있어서 굽힌다. 펴려는 마음이 있어서 편다. 움직이려는 마음이 있어서 움직인다. 눈이 있어서 본다. 보이는 대상이 있어서 본다. 귀가 있어서 듣는다. 소리가 있어서 듣는다. 업이 좋아서 행복하다’라는 등으로 원인과 결과만 있음을 사실대로 계속해서 알게 됩니다.
그 뒤에 다시 계속해서 관찰할 때마다 처음 생겨나는 것도 알게 됩니다. 마지막에 사라 져버리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관찰되는 대상이든, 관찰해서 아는 마음이든 ‘항상하지 않다’라고도 사실대로 압니다.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일 뿐이다. 좋아할 만한 것이 없는 괴로움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무아다. 지배 할 수 없는 성품법들일 뿐이다’라고도 사실대로 압니다. 이렇게 알 때 마다 계속해서 알고 보는 성품이 바른 견해 도 구성요소들입니다.”(담마짝까법문, 217-218쪽)
위빠사나 정견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경전에 실려 있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다.’(S45.9)라는 말과 다른 것이다. 실제로 수행과정에서 발생되는 정견에 대한 것이다. 결국 무상, 고, 무아로 귀결된다.
위빠사나 정견이 있다면 위빠사나 정사유도 있다. 위빠사나 지혜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시야도는 위빠사나 정사유에 대하여 “그렇게 사실대로 알고 볼 수 있도록 물질·정신 성품의 생겨남과 사라짐, 무상·고·무 아의 양상으로 마음을 기울여주는 것이 바른 생각 도 구성요소입니다.” (담마짝까법문, 218쪽)라고 했다.
위빠사나 정견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다. 위빠사나 정사유는 그렇게 알 수 있도록 마음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다른 데서 들어 보지 못했다. 마하시 법문집에서 처음 접한다. 오래도록 새겨 두고 싶은 말이다.
법념처에 대한 이해
흔히 사념처라고 말한다.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을 말한다. 이 가운데 법관찰에 대한 것이 가장 어려웠다. 대념처경을 보면 오장애,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다. 왜 법념처에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실려 있을까?
법념처에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것은 교학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학을 모르고 수행만 했을 때 엉뚱한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학적 토대가 탄탄하고 이론이 받침되어 준다면 수행은 더욱더 탄력받을 것이다.
새는 양날개로 하늘을 날아간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교학과 수행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빠리얏띠(pariyatti: 교학)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빠띠빳띠(patipatti: 수행)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증득이 있게 되는데 이를 빠띠웨다(pativedha: 통찰)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교학을 중시한다. 법문하고 난 다음에 행선과 좌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상 수행지침서나 다름 없다. 대념처경에 오장애,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사념처에 대하여 대강을 설명해 놓았다. 이런 설명은 경전이나 주석에서 볼 수 없다.
몸관찰(kāyānupassī)은 어떤 것일까? 이는 몸이라고 거듭 관찰해서 “항상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주재할 수 없다는 물질 무더기일 뿐이라고 관찰”(186쪽)하는 것이라고 했다.
느낌관찰(vedanānupassī)은 어떤 것일까? 이는 느낌이라고 거듭 관찰해서 “항상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주재할 수도 없는 단지 느끼는 것일 뿐인 느낌”(186쪽)이라고 했다.
마음관찰(cittānupassī)은 어떤 것일까? 이는 마음이라고 거듭 관찰해서 “항상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주재할 수도 없는, 단지 아는 것일 뿐”(186쪽)이라고 했다.
법관찰(dhammānupassī)은 어떤 것일까? 이는 법이라고 거듭 관찰해서 “항상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주재할 수도 없는, 자아도 아닌 진실로 성품법일 뿐”(186쪽)이라고 했다.
사념처는 공통적으로 무상, 고, 무아를 관찰하는 것이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법념처에 대해서는 “자아도 아닌 진실로 성품법일 뿐”이라고 했다. 이 말에 마음이 와 닿았다. 오래오래 새겨 두고 싶은 말이다. 법념처 수행하는 목적에 해당된다.
아무 의미 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바보처럼
작년 우안거에 들어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 입재 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안거가 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청정도론에서 수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 한마디에 재가우안거를 하게 되었다.
행선과 좌선할 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김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쉽게 새김의 토대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끊임 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이나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마치 무가치한 일을 하릴없이 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남들 보기에 돈도 되지 않고 쓸데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선대에서 “왼발, 오른발”하며 여섯 단계로 지속적으로 끊임 없이 새기다 보면 어느 때 새김이 확립된다. 마음 상태가 달라 지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재가우안거 2년째이다. 작년과 올해는 다르다. 작년에는 어거지로 한 것 같다. 단지 시간을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한시간 좌선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삼십분 좌선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차이 난 것은 이제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오늘 아침 좌선을 하면서 기록했다. 노트와 연필을 바로 옆에 두고 느낌을 적어 놓은 것이다. 필기 했다고 해서 새김은 깨지지 않는다. 새김의 토대가 탄탄해지면 노트한다고 해서 달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한다면 여지 없이 깨질 것이다.
좌선 중에 몸이 나른 했다. 몸은 가볍고 경쾌했다. 마음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여기에 잔잔한 기쁨도 있었다. 세상에 이런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는 다름 아닌 놓아 버림에 대한 즐거움이다. 마음의 장애가 없는 즐거움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상쾌할 수 없다.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없다. 우울한 마음도 날아가 버렸다. 명상하는 맛을 느낀다. 수행은 아무 의미 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바보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2024-09-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