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은 반갑게 맞이 해야
손님은 반갑게 맞이 해야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 왔다. 통증이라는 손님이다. 이게 얼마만인가? 거의 일년 된 것 같다. 손님은 반갑게 맞이 해야 한다. 오늘 아침 좌선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통증이라는 손님과 함께 했다.
오늘 재가우안거 59일째이다. 추석명절 전날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이 텅 빈 것 같은 빌딩에 나 혼자만 있는 듯하다. 백권당의 아침이다.
수행기를 쓰는 것에 대하여
수행은 누군가에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행기를 쓰는 행위는 정당한 것인가?
매일 수행기를 쓰고 있다. 좌선을 마치면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하얀 여백을 대한다. 그리고 느낀 것, 경험한 것, 체험한 것을 인터넷에 올린다. 이런 것도 인정받기 위한 것일까?
수행기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행선과 좌선에서 체험한 것과 일상에서 느낀 것을 올려 놓는다. 또한 수행관련 경전이나 논서에서 읽은 것도 올려 놓는다. 이런 것도 인정투쟁일까?
글쓰기는 생활화 되어 있다. 2006년 이후 18년동안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 중에 있었던 것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수행기를 쓰는 것도 수행이다. 막 좌선을 끝낸 상태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써 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진실된 것인지 모른다.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볼 때는 볼 때뿐이고
그날그날 컨디션은 다르다. 그날그날 행선과 좌선도 다르다. 오늘은 대체로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 어제와 비교하면 천지차이가 난다. 어제는 가슴통증으로 인해서 행선과 좌선을 각각 십여 분 하다 말았다.
컨디션이 좋다고 하여 수행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이 그런 날 같다. 행선과 좌선을 각각 삼십분 했지만 삼매는 형성되지 않았다.
행선대에서 행선을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발을 천천히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하면 이전과는 다른 마음 상태가 된다. 그러나 발의 모양이나 형태로 본다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대념처경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의 고찰에 대한 것을 보면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모양을 보지 말고 실재를 보라는 말이다. 발이라는 명칭이나 발이라는 이미지를 보지 말고 단지 운동성만 보라는 것이다.
매일 수행하다 보면 응용력이 생기는 것 같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했을 때 이를 ‘보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볼 때는 본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응용할 수 있다.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닿을 때, 인식할 때도 응용이 된다.
우다나에 ‘바히야의 경(Bahiyasutta)’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여 인식할 때는 인식할 때뿐이다.”(Ud.6)라고 했다. 이는 “뿐이고”의 연속이다.
부처님은“볼 때는 보여질 뿐이다.(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라고 했다. 빅쿠보디는 영역에서 “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ly the seen”(S35.95)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단지~일뿐”이라는 뜻의 ‘merely’가 사용되었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본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듣는다. 여기서 “볼 때는 보여질 뿐”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때 형상만 보라는 것이다. 어떤 영원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일뿐(merely)”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볼 때는 보여질 뿐”이라는 말은 “볼 때는 본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응용할 수 있다. 이는 수행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어떤 것인가?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보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고 보아서 아는 것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 어떤 것이든지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파악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번뇌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명색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지 않으면 “내가”라는 개념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내가 보고, 내가 듣는 것이 된다. 이는 괴로움의 시작이다.
오늘 아침 행선할 때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에 대하여 “볼 때는 본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응용해 보았다. 행, 주, 좌, 와, 이렇게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고찰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육문에서 일어나는 것에서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새겨 보자는 것이다.
일상에서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때 뿐”이라고 여기면 어떻게 될까? 대상에 끄달려 가지 않을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욕망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세상만물을 감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면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대상을 바라 본다. 매혹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느낌이 발생하고, 혐오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느낌이 발생된다. 이때 새김이 없으면 대상에 끄달려 가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
새김(sati)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 매혹적인 여인을 보았을 때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과 같다.
여기 어떤 남자가 있다. 그는 매혹적인 여성만 보면 눈이 따라 간다. 여성을 끝까지 추적하며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는 여성을 원망한다. 여성이 유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결코 유혹한 적이 없다. 그래서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다.”(S1.34)라고 했다.
욕망으로 가득 찬 남성에게 매혹적인 여성은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 여성을 보고 또 보는 것은 탐욕에 따른 것이다. 이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S1.34)라고 한 것이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설령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얇은 옷을 입고 돌아 다녀도 여성에게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탐욕의 마음을 가진 남성에 있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를 바라보는 남성에게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의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인지 문제인지 알았다.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을 감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욕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라고 했다. 나의 욕망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욕망을 없애는 것이 현자의 할 일이다.”라고 한 것이다.
삼매는 능숙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 행선을 삼십분 했다. 이렇게 오래 한 날은 많지 않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십분이 지나도 새김의 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법을 달리 했다. 명칭을 붙여 보기로 한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이 잘 되지 않을 때 명칭을 붙이면 효과적이다. 마치 “돈다, 돈다”라고 말하면 돌아 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행선할 때 “발을 뗀다, 올린다, 민다, 내린다, 디딘다, 누른다”와 같이 동사형 명칭을 붙여 보았다.
명칭을 붙여서 행선하면 어느 정도 집중이 된다. 지속적으로 새기면 삼매가 형성될 것이다. 찰나삼매를 말한다. 그러나 오늘은 삼십분이 되도록 삼매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좌선하게 되면 좌선도 기대할 것이 없게 된다.
그날그날 날씨 다르듯이, 그날그날 컨디션도 다르다. 그날그날 행선도 다르고 그날그날 좌선도 다르다. 행선과 좌선이 잘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방석에 앉았다. 자리 옆에는 노트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연필도 챙겨 놓았다. 좌선 중에 체험을 쓰기 위한 것이다. 행선할 때도 노트를 했다.
좌선 중에 노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좌선할 때는 오로지 좌선에만 집중해야 하고 행선할 때는 오로지 행선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기록한다면 방해 받을지 모른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노트하면 몰입이 깨지지 않는다. 이는 누군가와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몰입 상태에서 쓰는 것은 새김이 깨지지 않는다.
삼매는 능숙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어느 때이든지 선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날그날 컨디션이 다르고 그날그날 감정이 다른 상태에서 반드시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행선과 좌선에 들어가면 집중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통증이라는 손님
오늘은 행선을 삼십분 했지만 집중에 이르지 못했다. 삼십분 앉아 있었지만 역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통증이 왔다. 오랜만에 통증이 왔다. 마치 반가운 손님이 온 것 같다.
작년 처음으로 우안거를 매일 한시간 했을 때는 통증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올해 우안거 때는 삼십분으로 바꾼 후부터 다리저림과 같은 통증은 거의 없었다. 아마 평좌가 생활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시간에서 삼십분으로 단축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손님이 오면 반갑게 맞이 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예우이다. 통증이라는 손님이 왔을 때 주관찰 대상으로 삼았다.
마하시 전통에서 주관찰 대상은 복부이다. 배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복부 움직임보다 더 강력한 대상이 나타나면 주관찰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통증이 왔을 때 통증을 주관찰대상으로 했다.
통증을 주관찰 대상으로 하여
자리에 앉은지 이십분이 지났을 때 통증이 왔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지속된 것이다. 이를 지켜 보기로 했다.
통증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통증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남의 허벅지 보듯이 관찰했다. 관찰한지 십분이 지났을 때 삼십분 타이머 알람이 울렸다.
허벅지 통증을 계속 보고자 했다. 알람이 울렸지만 계속 진행 했다. 통증은 이제 주기를 띠었다. 묵직하던 것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 오는 것이다. 콕콕 찌르기도 했다. 남의 다리 보듯이 계속 지켜 보았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보면 사라진다.”라는 말이 있다. 통증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지켜 보았을 때 통증은 점차 약화 되었다. 주기도 길어졌다. 십오분정도 지났을 때 주기는 더 길어졌다. 간헐적인 통증만 약하게 있게 되었다. 통증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삼매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명칭을 붙여서 삼매를 형성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좌선에서 통증을 관찰하게 되었다.
통증을 관찰하는 것은 수념처에 해당된다. 통증이라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괴로운 느낌에 해당된다.
느낌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 느낌을 내것이라고 보면 “내가 괴롭다.”라고 여길 것이다. 좌선할 때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 왔을 때 이를 “즐겁다.”라고 본다면 “내가 즐겁다.”라고 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객관명상이라고 말한다. 마치 이 몸과 마음을 남 보둣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리에 저림과 같은 통증이 왔을 때 남의 다리 보듯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아프다.”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법의 성품을 보기 좋은 통증
통증을 지켜 보았다. 손님과 같은 통증이다. 오랜만에 찾아왔다. 그렇다면 왜 통증은 손님과 같이 반가운 것일까? 이는 법의 성품을 보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통증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다. 통증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통증 따로, 마음 따로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명색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과 같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을 명색으로 새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명색으로 환원해서 새겨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생겨났다가 즉시 사라지는 법의 성품이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이것 역시 명색을 새기는 것이다. 배가 부풀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배가 부풀 때 부푼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렇게 물질 따로 정신 따로 새긴다. 이렇게 명색에 대하여 환원하여 새기면 나(我)라는 개념이 들어갈 수 없다.
통증을 새길 때 정신과 물질로 분리해서 새기고자 했다. 아픔이 있을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아픔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다리저림이라는 통증이 밀려 왔을 때 “이것은 물질이고 이것은 정신이다.”라며 새기는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통증이라는 손님이 왔다. 통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 왔지만 쫓아내지 않았다. 손님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왜 그런가? 법의 성품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통증이기 때문이다. 어떤 손님이든지 찾아 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어야 한다.
2024-09-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