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하늘을 벌겋게 달군 노을처럼
서쪽하늘을 벌겋게 달군 노을처럼
하루도 같은 날 없다. 오늘 컨디션은 대체로 나쁜 편이다. 날씨도 좋지 않다. 습도가 무려 90프로가 넘는다. 짜능나고 불쾌지수 높은 날이다. 오늘 행선과 좌선에 영향 줄 수 있다.
재가우안거 63일째이다. 백일이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백일기도하면 운명이 바뀐다고 한다. 재가자가 삼개월동안 안거를 하면 사람이 바뀌고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오늘도 걷는다마는”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있다. 오늘도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해야 한다. 안거는 명상과 동의어가 되었다. 앉아 있어야 명상하는 것처럼 보이고 안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오늘 명상은 기대하지 않았다.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컨디션은 좋지 않다. 날씨도 꾸물꾸물해서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행선에서 잘 집중 되지 않았다. 그런데 컨디션이 너무 좋아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깥 날씨가 너무 좋아도 잘 되지 않는다. 결국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행선은 십여분하다 그만 두었다. 자리에 앉았다. 어제 백권당 명상공간을 청소했다. 매트 바닥에 습기가 있어서 바닥을 닦고 서큐레이터를 이용하여 말렸다. 이렇게 청소를 하니 몸도 마음도 산뜻했다.
오늘 좌선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삼십분 하기로 했으니 시간을 때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달려 보아야 안다. 의외로 성과가 있었다.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은 없다. 처음부터 집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좌선은 새김의 확립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김을 확립할 수 있을까? 이는 찰나삼매로 확립된다. 선정근처에서 생겨나는 근접삼매와 같은 집중을 말한다.
찰나삼매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따라가며 면밀하게 새기는 것으로부터 형성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잘 되지 않으면 명칭을 붙여야 한다.
눈 앞이 안온해지면서
수행을 오래한 사람은 힘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수행의 힘이다. 마치 운동을 하면 근력이 생기는 것과 같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은 쉽게 선정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을 일년도 아니고 십년, 이십년 한 사람이 있다. 삼십년, 사십년, 평생 수행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과 수행초보자와는 힘에 있어서 비교 되지 않는다.
수행초보자는 선정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선정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자주 앉다 보면 어느 정도 능숙하게 된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재가우안거를 하고 있다. 매일 방석에 평좌하고 앉는다. 매일 앉다 보니 이제 앉는데 익숙해졌다. 그렇다면 삼매에 들어가는 것도 익숙해질까?
잠을 잘 때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잘 자기 위한 조건을 만들면 잠을 잘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음이다. 탐욕의 마음, 분노의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는 잠을 잘 잘 수 없다.
잠자는 것과 깨달음과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잘 잔다. 왜 그런가?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탐, 진, 치가 소멸된 성자는 잠을 잘 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좌선에서 새김을 확립하는 것도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새김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석에 앉은지 십여분 되었을 때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아 불편 했는데 어느 순간 싹 달아난 것이다. 눈 앞이 안온해지면서 몸과 마음이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좌선을 오래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의 변화된 상태를 알 수 있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이것은 깨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오늘도 그랬다.
몸과 마음의 상태가 바뀌면 그때부터는 잘 달리게 되어 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좌선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불편했으나 이전 마음이 되어 버렸다. 마치 시동이 걸린 차가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과 같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는 걱정이 없다. 문득문득 생각이 치고 들어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쉽게 제압되는 것이다. 바깥에서 나는 차 소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 소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한시간 이상도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
잠 자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새김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 더 쉽다. 배위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기고 있다 보면 새김이 확립되고 새김의 토대가 마련 되는 것이다. 마치 시동 걸린 자동차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동차는 시동이 걸리면 달려 간다. 새김이 확립 되었을 때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있다. 마음의 고속도로를 달려 가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마음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삼매에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과 같다. 마하시 방식에서는 명칭 붙이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따라서 배가 부풀 때마다 꺼질 때마다 그 생겨나는 순간과 잘 일치하도록 ‘부푼다, 꺼진다, 부푼다, 꺼진다,’하며 끊임없이 새겨라.”(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3쪽)라고 했다.
초보수행자는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한다. 스승이 없다면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활용해야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지침서대로 따라 해 보았다. 처음에 방석에 앉았을 때는 잘 집중이 되지 않는데 명칭 붙여서 해 본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효과가 있었다.
한번 효과를 보면 계속 하게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명칭 붙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명칭 붙여야 할까? 이에 대하여 “마음으로만 새겨야 한다.”(63-64쪽)라고 했다. 입으로 명칭 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명칭 붙이는 것이다.
명칭 붙여서 새길 때 작위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부품과 꺼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호흡을 거칠게 해서는 안된다. 호흡을 일부러 느리게 하거나 빠르게 바꾸어서는 안된다.”(64쪽)라고 했다. 평상시 호흡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하시 방식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호흡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 배는 호흡과 엇박자가 난다는 사실이다. 들숨에서 배의 부품이 있고, 날숨에서 배의 꺼짐이 있는 것이다. 배에 집중하다 보면 들숨과 날숨은 잊어 버린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하는 것은 풍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바람의 요소를 말한다. 이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풍대를 보아 몸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호흡만 본다면 사마타가 된다. 그래서서일까 아나빠나사띠는 마흔 가지 사마타명상 주제 가운데 하나에 해당된다. 마하시 방식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배를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주관찰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망상이 일어 났을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주관찰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마치 등정할 때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것이다. 소리, 생각 등 갖가지 강력한 대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베이스캠프에서 나와서 진압해야 할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망상이 치고 들어 올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그 여러 가지 생각들을 그 현상 그대로 따라 새기기만 하라.”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새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생각하면 ‘생각함’하며 새겨라, 망상하면 ‘망상함’하며 새겨라. 상상하면 ‘상상함’하며 새겨라. 숙고하면 ‘숙고함’하며 새겨라,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면 ‘달아남’하며 새겨라, 어느 곳으로 마음이 도착하면 ‘도착함’하며 새겨라. 생각 속에서 누군가와 만나면 ‘만난다’하며 새겨라, 생각속에 서 무언가를 보면 ‘본다, 본다’하며 새겨라, 그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까지 거듭해서 새겨라. 생각 속에서 누군가와 말을 하고 있으면 ‘말한다’하며 새겨라. 이렇게 새긴 후에 [다시] ‘부푼다, 꺼진다’하며 원래 새기던 대상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새겨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4-65쪽)
망상이 일어 났을 때 이를 놓치면 망상의 집을 짓게 된다. 집을 짓기 전에 새겨야 한다. 망상이라고 새기면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좌선 중에 자세를 바꿀 때
좌선 중에 다리가 저릴 때가 있다.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래야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증이 심하면 자세를 바꾸어 주어야 한다. 어떻게 바꾸는가? 마하시 사야도는 “참을 수 없어서 자세를 바꾸고 싶으면 그 마음을 ‘바꾸려 함’하며 새기고, 자세를 바꾸는 여러 가지 동작들도 그대로 명칭 붙이면서 계속해서 새겨라.”라고 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발이나 다리를 올리려 하면 ‘올리려 함’하며 새겨라. 올릴 때는 올리는 동작에 따라서 계속해서 움직일 때마다 ‘올린다, 올린다’하며 새겨라. 펼 때는 ‘편다, 편다’하며 새겨라. 굽힐 때는 ‘굽힌다, 굽힌다’하며 새겨라. 내릴 때는 ‘내린다, 내린다’ 하며 새겨라. 급하게 하지 말라. 천천히 바꾸어라. 어느 곳에 닿으면 ‘닿음’하며 새겨라, 이렇게 자세를 바꾸었을 때라든가 새기다가 저절로 뺏뻣함 등이 사라졌을 때는 ‘부푼다, 꺼진다’하며 원래 새기던 대상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새겨라.”(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5-66쪽)
자세를 바꿀 때는 천천히 해야 한다. 이 방법대로 해 보았다. 다리를 풀을 때 천천히 내 밀고 천천히 자세를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자세를 바꾸는 것도 수행이다. 왜 그런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기 위한 방편이다. 명칭을 붙여서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면 붙이지 않아도 된다.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저절로 새김이 있게 된다.
허리아픈 환자처럼
세상에서는 빠릿빠릿한 것이 미덕이다. 군대에서는 동작이 빨라야 한다. 동작이 굼뜨면 고문관 취급 당한다. 일을 할 때도 빨리빨리 해야 한다. 마치 축구선수가 한템포 빠른 것과 같다. 농구선수가 한박자 빠르면 큰 성과를 낸다. 그러나 수행자는 동작을 빠르게 해서는 안된다.
뒤를 돌아 볼 때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획 돌아 본다. 그러나 수행자는 천천히 돌아 볼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80종호 가운데 “몸을 돌려 보는 것이 코끼리 같은 것”(Mil.75, 여든 가지 미세한 특징)과 같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허리아픈 환자처럼 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마음을 현재에 두기 위해서는 병자와 같이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위빠사나 수행자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77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허리환자는 아주 천천히 앉고, 아주 천천히 일어서고, 물건을 잡을 때도 천천히 잡는다. 허리 아플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도 허리가 아픈 사람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아픈 사람처럼 움직여서 현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 법을 볼 수 있다.”(위빠사나 수행자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78쪽)라고 했다.
빛과 같이 빠른 현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동작이 빠른 것은 미덕이다. 반박자만 빨라도 크게 주목 받는다. 그러나 수행자는 동작이 빨라서는 안된다. 누가 부른다고 하여 고개를 획하고 돌려서는 안된다. 마치 허리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언제나 초보 상태
위빠사나 초보수행자이다. 위빠사나를 안지가 십년도 넘었지만 언제나 초보 상태를 넘지 못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부터 늘 다시 시작한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읽고 또 읽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두 번째 읽는다. 1권은 이미 두 번 읽었다. 이번에 2권을 두 번째로 읽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에서는 수행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칭붙이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기초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좌선할 때 명칭붙이기 하면 효과적이다. 명칭붙이기 하다 보면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삼매가 형성된다. 삼매가 형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명칭붙이지 않아도 된다.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하여 새기다 보면
위빠사나 수행은 직접 하는 것이다. 이는 들어서 아는 것과 다르다. 그런데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자신의 입만 보라는 것 같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자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견성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른바 ‘언하대오’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직접경험하여 아는 수행이다. 몸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 배의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 된다. 배의 부품이라는 물질을 새기고, 배의 부품이라고 아는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 따로 새기고 정신 따로 새길 때 고도의 집중이 요청된다.
수행은 일상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볼 때나 들을 때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볼 때는 보여진 것을 볼 뿐이고, 들을 때는 들려진 것을 들을 뿐이다. 이것 역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는 다음과 같은 진행과정으로 알 수 있다.
“그 뒤 관찰되는 물질·정신이 계속해서 관찰하는 중에 즉시 생겨나서는 계속 사라져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어 ‘항상하지 않은 것이구나. 두려워할 만한 괴로움이구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아가 아닌 성품법 들일 뿐이구나’라고 관찰하면서 바로 알고 보고 이해합니다.”(담마짝까법문, 466쪽)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다 보면 생겨남과 사라짐을 보게 된다. 어느 것도 항상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물질과 정신이 함께 일어났다가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법의 성품을 아는 것과 같다.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다.
관찰하는 나(我)가 있다는데
유튜브 견성채널을 보면 관찰자 이야기를 한다. 어떤 변치 않는 관찰자가 있음을 말한다. 이를 참자아 또는 참나라고 말한다. 본래부터 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말을 한적이 없다.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견성채널 진행자들은 참나를 말한다. 지켜 보는 어떤 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나와 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참나와 같은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개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개념을 부수는 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기 때문이다. 이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를 보는 것과 같다.
실재를 보면 개념은 부수어진다. 집착의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했을 때 항상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개념은 항상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개념은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칭이나 이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서 생멸이 있을 수 없다. 참나가 있다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 명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관찰자가 있다든가, 지켜 보는 자가 있다든가, 참나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하다. 언어적 명칭으로만 있는 것이다. 명칭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 또는 하나님, 브라하마, 진아와 같은 명칭은 영원하다. 생멸이 없기 때문에 개념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수행해야
견성채널에서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론도 없고 수행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는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다섯 수행승에게 사성제를 설했다. 꼰단냐 존자에게 가장 먼저 법안이 생겨났다. 이는 약설지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처님은 나머지 네 명의 수행승에게 별도로 수행 지도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단지 법문을 듣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것 정도로 수다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왑빠 존자 등이 하루나 이틀 정도 힘들게 노력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482-483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듣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수행해야 법의 증득이 있게 된다. 만약 듣는 것만으로 깨달을 수가 있다면 힘들게 수행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으로 되지 않으면 두 번 설했을 것이다. 수다원이 될 때까지 거듭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라고 지도한 것이다.
꼰단냐 존자는 법문만 듣고서도 수다원이 되었다. 이는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약설지자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수행자들은 별도의 수행과정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수행해야 수다원이 될 제도가능자(neyya)들이기 떄문에 부처님께서 훈계하고 지도하셨다.”(담마짝까법문, 483쪽)라고 말한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수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유튜브 견성채널을 보면 이론도 없고 수행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쳐다 보라고 한다. 자주 듣다 보면 어느 때 견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지켜 보는 자, 관찰자, 참나가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재가우안거 오전일과는 수행으로
오늘 행선은 잘 되지 않았다. 날씨도 덥고 습도도 높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좌선에서는 반전되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명칭을 붙여 새겼더니 삼매가 형성된 것이다.
한번 삼매가 형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마치 시동 걸린 자동차와 같은 상태가 된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잘 닦여진 도로를 달리면 기분은 상쾌하다. 삼매가 형성되어서 마음의 고속도로를 달리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몸이 아픈 것도 잊어 버린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은 글쓰기에서도 있다는 것이다.
삼십분 좌선을 하고 두세 시간 글을 쓴다. 글쓰기하다 보면 오전이 다 지나간다. 하루일과 가운데 사분의 일은 수행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우안거의 오전일과는 수행으로 보낸다.
서쪽하늘을 벌겋게 달군 노을처럼
어제 저녁노을은 장엄했다. 구름이 벌겋게 달구어졌다. 도시에서 저녁노을을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잠시 짬을 내서 서쪽 하늘을 바라 보았다.
장엄한 저녁노을은 금방 사라져졌다. 마치 노인의 최후를 보는 것 같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달구고 금새 사라지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노년에 이를수록 초조해진다. 해 놓은 것도 없이 세월만 흘러 가는 것 같다. 이럴 때 서쪽하늘을 벌겋게 달구고 사라지는 해처럼 살고 싶다. 수행을 하고 글을 쓰는 것도 장엄한 최후를 맞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2024-09-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