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21. 12:20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뒤로 벌러덩 누웠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이다. 막 타이머가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나자 벌러덩한 것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 명상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64일째이다. 매일매일 좌선을 하고 있다. 안거기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명상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좌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좌선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는 것이다.

 

날씨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어저께까지만 해도 무더웠다.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날씨였다. 그러나 오늘부터 급전직하가 되었다. 현재 925분이다. 온도는 18도이다. 습도는 92프로이고 비가 내리고 있다. 이번 내린 비로 이제 완전히 가을에 들어 간 것 같다.

 

안거중에 철이 바뀌었다. 무더웠던 여름에 시작하여 이제 본격적인 가을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 이십여일 지나면 안거가 끝난다. 담마와나선원에서는 1013() 우안거 해제 법회가 나흘 앞당겨 열린다.

 

지난 여름 땀을 흘렸다. 백권당 명상공간에서 가만 앉아 있을 때 가슴골로 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런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누군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업경대는 알고 있을 것이다.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원장스님은 카메라를 찍고 있다고 말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업의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가 다 지켜 보고 있다는 말과 같다.

 

지금 이순간에도 업의 카메라는

 

대웅전의 불상을 보면 항마촉지인상이다. 오른손의 손가락을 아래로 하고 있는 수인상을 말한다. 왜 오른손을 아래로 하는 것이 악마를 항복시키는 수인인가? 그것은 땅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은 맞지만 결국 땅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동물이나 식물 역시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땅을 어머니로 하여 나고 진다.

 

부처님은 보살행을 하여 부처가 되었다. 자타카에 따르면 사아승지십만겁동안 십바라밀을 닦은 것이다. 그 한량없는 세월에서 얼마나 나고 죽는 일을 반복했을까? 오로지 땅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금강좌를 빼앗으려 할 때 땅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보살은 오른손을 아래로 했다. 땅을 가리킨 것이다.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보살행 한 것은 땅이 알고 있음을 말했다. 그러자 그때 내가 그대의 증인이다.”(Jat.I.74)라며 대지가 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것도 여기저기서 백의 외침, 천의 외침, 십만의 외침이 있었다.

 

금강경에 여래실지실견(如來 悉知悉見)”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자는 다 실()’자이다. 이는 모두 다의 뜻이다. 영어로는 (all)’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원장스님이 지금 이순간에도 카메라로 찍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의 근거가 되는 말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업의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다. 숨어서 몰래 행위를 해도 모두 찍히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죽어서 업경대를 보면 고스란히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 수행을 한 것도 고스란히 찍힐 것이다.

 

액면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

 

사람들은 이미지 관리를 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은 이미지 관리에 철저하다. 불리한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은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수행자는 이미지 관리를 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대중 앞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숲속에서, 빈집에서, 동굴에서 홀로 사는 자는 잘 보이게 하고자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거울은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매일 거울을 본다. 대부분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며 만족의 미소를 띨지 모른다. 그런데 거울에는 마음의 거울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거울은 액면 그대로 비추어 준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미모에 만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액면 그대로 비추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거울은 어떠할까?

 

여기 사기꾼이 있다. 그는 세상사람들을 속인다. 그러나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부끄러움을 알고 외면적인 창피함을 아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짐승 같은 사람이다. 왜 그런가? 축생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축생은 오로지 생존본능과 번식본능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아무하고나 관계를 맺는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다.”(Iti.36, A2.9)라고 했다.

 

요즘 공원에서 개와 함께 산책 나오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개는 오줌을 눈다. 아마 영역표시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개는 똥을 싼다. 개 주인은 똥을 치워 준다. 똥을 싸는 것도 영역표시하는 본능의 하나일 것이다.

 

개는 본능으로 살아간다. 가만 내버려 두면 아무 하고나 관계를 맺을 것이다. 개의 세계에 있어서는 어머니도 없고 이모도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축생과 같은 사람이다. 만약 세상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하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마 개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Iti.36, A2.9)라고 했다.

 

절에 가면 일주문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는 문이다. 일주문은 두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어 있다. 인간세상에도 일주문이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두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문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축생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시대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과 같다. 액면 그대로 비추어 준다.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의 거울(dhammadasa)’도 있다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청정에 대한 것이다. 가르침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

 

가르침의 거울은 빠알리어로 담마다사이다. 내 법명이기도 하다. 일반사람이라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마음의 거울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수행자라면 가르침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좀더 현실적인 마음의 거울은 없을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 나는 자주 성내는가, 나는 자주 성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는가,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는가,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분노하는가,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는가,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는가,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게으른가, 자주 열심히 정진하는가? 나는 자주 집중에 들지 못하는가, 자주 집중에 드는가?”(A10.51)

 

 

거울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액면 그대로 비추어 준다. 마음의 거울은 마음을 액면 그대로 비추어 줄 것이다. 때때로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 등 마음의 오염원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한번도 꼰대가 되어 본 적이 없는데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한다. 이런 것을 누가 알아줄까? 이렇게 글을 남기면 세상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일까? 세상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일까?

 

블로거가 글을 쓰는 것은 일상이다. 지난 18년 동안 밥 먹듯이 매일 하고 있는 일이다. 이번 우안거 기간동안 행선하고 좌선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 되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쓴다거나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쓰는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일상이다. 이런 것도 어쩌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면 아무것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당연히 선행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주었어도 티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드러낸다면 수행이 덜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한번도 선생이 되어 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한번도 꼰대가 되어 본 적이 없다라는 말과 같다. 늘 배우는 입장에 있다. 항상 학인의 위치에 있다.

 

학인은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하다. 나이가 이순을 너머서 고희에 이른다고 해도 탐, , 치로 산다면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다. 나이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

 

고요하고 평온하고 안온한 세계가 있는데

 

오늘도 달린다.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하거나 오토바이로 오지여행하는 것만이 달리는 것은 아니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등 마음을 닦는 것은 내면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

 

백권당 명상공간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다. 마치 외딴 곳에 있는 빈집이나 동굴 같은 곳이다. 불을 끄고 자연채광에 의지하여 앉아 있으면 외딴 곳에 있는 것 같다.  

 

오늘 좌선은 대체로 실패했다. 약간의 삼매만 형성되었을 뿐이다. 내면의 고속도로를 질주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삼십분 타이머가 다 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다.

 

명상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다르다. 그날그날 몸상태에 따르고, 그날그날 날씨상태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집중해서 들어가서 보면 똑 같은 세계가 있다. 고요하고 평온하고 안온한 세계이다.

 

두 개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나는 현실의 세계이고, 또 하나는 명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명상의 세계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명상을 잘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방법에 달려 있다. 명상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에게서 알 수 있다.

 

위빠사나를 알게 된지 15년 되었다. 2008년 한국명상원에서 처음 접한 이래 드문드문 하게 되었다. 본격화 된 것은 20201월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고 나서부터이다. 작년 우안거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일상이 되었다.

 

아직까지 위빠사나명상 초보단계에 있다. 위빠사나를 알게 된지 15년 되었지만 늘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단계와 2단계인 조건을 파악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놀랍게도 초기경전에 따르면 전생부터 수행자였던 자가 이번 생에도 수행자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는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선정에 들어야 지혜가 나온다. 그렇다면 누구나 선정에 들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누구나 가능하지 않다. 전생에 선정을 닦는 자가 이번 생에 선정에 들 수 있다. 전생에 한번도 선정을 닦지 않은 자가 이번 생에 선정에 들기 어려움을 말한다.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감각이 예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각이 무딘 사람도 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혜가 얕은 사람도 있다. 이는 업의 다양성으로 설명된다.

 

자신이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 산출된다. 전생에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을 했다면 그 과보는 나타날 것이다.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과거에도 수행자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라고 한 것이다.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과거생에도 수행자로 살았다. 이는 지혜를 갖춘 사람(naro sapañña)”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빤냐라는 말은 有智慧者, 具有智慧的의 뜻이다. 지혜가 구족되어서 태어난 자를 말한다.

 

수행자는 일반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 자이다. 일반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만 수행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탐, , 치로 살아가지만, 수행자는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타고난 사람이다. 왜 그런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지혜를 갖춘 자(naro sapañña)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Vism.1.7)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무탐, 무진, 무치의 세 가지 원인이 있는 선업의 과보로서 생겨난 이숙식임을 말한다.

 

약설지자, 상설지자, 제도가능자, 선업토대자

 

아무나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자로서 조건을 타고 나야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명백히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라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상세한 설명으로 아는 자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가 있다수행승들이여세상에 발견되는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A4.134)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네 종류의 수행자가 있다. 이는 1) 약설지자(ugghațitaññū略說知者), 2)상설지자(vipañcitaññū詳說知者), 3)제도가능자(neyya: 濟度可能者), 4)선업토대자(padaparama: 善業土臺者)를 말한다.

 

약설지자는 설명하는 즉시 법을 관통하는 사람이다. 간단한 게송만을 듣고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 도와 과를 증득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 존자가 대표적이다. 법문을 들으면서 특별한 법을 얻는 자가 이에 해당된다. 이는 전생에 수행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전생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상설지자는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할 때 법을 관통하는 사람이다. 조금 긴 게송이나 법문을 듣고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 도와 과를 증득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 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수행승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듣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수행해야 특별한 법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제도가능자는 일반 학인을 말한다. 설명하고 질문하고 바르게 마음기울이고 선지식을 의지하고 섬기고 공경하며 점차적으로 법을 관통하는 사람이다. 언제 도와 과를 이룰지 알 수 없다. 지혜가 덜 갖추어져 태어났기 때문에 이번 생에 노력을 해야 한다. 수십년 노력해서 말년에 특별한 법을 얻을지 모른다.

 

선업토대자는 공덕을 쌓는 자이다. 많이 듣고 많이 읊고 많이 수지하고 많이 말하더라도 태생적으로 법을 관통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아서 차고 나갈 힘을 기르는 것이다. 바라밀 공덕을 쌓아서 고비가 닥쳤을 때 치고 나갈 힘을 갖추는 것이다.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특별한 법을 얻기 어렵다.

 

네 종류의 사람 중에 나는 어디에 속할까? 2004년 불교입문 이래 2008년부터 위빠사나를 알아 왔지만 특별한 법은 얻지 못했다. 아마 지혜를 타고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노력은 해 보고자 한다. 이번 생에 안되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이번 생에서 토대라도 마련해야 한다.

 

잠을 잘 자는 것도 수행

 

이 세상에서 잠자기가 가장 힘든 것 같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 새벽 잠에서 깼을 때 잠자기와 관련된 것을 읽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누워서 자려고 하면누우려 함’, 또는자려 함이라고 새겨라. 누우면 서 움직이는 손이나 발의 여러 동작들을든다, 편다, 누른다등으로 새겨라.

 

누울 때 한 동작씩 눕혀지는 몸에 집중해서눕는다, 눕는다또는잔다, 잔다하며 새겨라. 베개나 잠자리에 닿음을닿음, 닿음하며 새겨라. 처음 눕기 시작해서부터 손이나 발, 몸의 여러 동작들도 새기면서 천천히 움직여라.

 

새기면서 특별한 것이 없을 때는 부르는 것과 꺼지는 것에만 집중해서부푼다. 꺼진다하며 끊임없이 새겨라. 이렇게 새기고 있을 때 뻣뻣함, 뜨거움, 아픔, 가려움, 어지러움 등의 특별한 느낌들이 생겨나면 그 느낌들에 집중해서 앉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새겨라.

 

침을 삼키고 뱉는 것, 망상하고 생각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새겨라.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돌아누우려 할 때, 팔이나 다리를 구부리거나 펴려고 할 때 등에 생겨나는 의도들을 새기고 나서 그러한 여러 동작들도 놓치지 말고 새겨라. 새기면서 특별한 것이 없을 때에는부푼다, 꺼진다하며 원래 새기던 대상만을 끊임없이 새겨야 한다.

 

졸음이 오 면졸린다, 졸린다하며 새겨라. 눈을 감는 것도감는다, 감는다하며 새겨라. 수행이 성숙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렇게 새기면 졸음이 사라져서 다시 정신이 선명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선명함, 선명함하며 새긴 후, ‘부푼다, 꺼진다하며 원래 새기던 대상만을 다시 새겨라.

자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새김을 버리고 자지 마라. ‘잠들지 않고 하나의 새김으로 계속 새기며 수행할 것이다라고 마음먹고 부품과 꺼짐 등 새기던 대상을 끊임없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몸이 피곤하면 이렇게 계속해서 새기고 있는 중에 차츰 눈꺼풀이 감기고 잠이 들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70-71)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데 억지로 잠을 잘 수 없다. 이럴 때 차라리 잠 자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쉬는 마음으로 있다 보면 잠 들게 될 것이다.

 

수행자는 늘 새김을 유지해야 한다. 깨어 있는 한 늘 새김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잠을 잘 때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S35.239)라고 했다.

 

잠을 잘 때 자기 직전까지 새김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잠에서 깨자마자 새김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가 되면 꿈을 꿀 수 없다. 아니 꿈을 꾸더라도 꿈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다. 늘 깨어 있을 때 꿈 꿀 시간이 없다. 초기경전에서 꿈의 비유가 거의 없는 것도 늘 새김을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을 잘 자는 것도 수행이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새김이 잠 자기 직전까지도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도 잠 자기 직전과 같이 새김이 유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S35.239)라고 했을 것이다. 과연 이렇게 잠을 자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던 사람은 잠도 잘 잘 것이다.

 

만명 가운데 하나 정도

 

누구나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 담마마마까선원장 우 에인다까 사야도는 만명 가운데 하나 정도 위빠사나의 특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도 삼십분 앉았다. 내일도 앉아 있을 것이다. 안거가 끝나도 계속 될 것 같다. 앉는 것을 생활화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특별한 법을 얻을 날도 있을 것이다.

 

이번 생에 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지금 이순간에도 업의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골방에서 기도하듯이 작은 명상공간에 앉아 있는다. 오늘도 오전이 다 지나갔다.

 

 

2024-09-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