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줄기무침 만들기
고구마줄기무침 만들기
버스정류장에서 고구마줄기를 샀다. 껍질 깐 것이다. 할머니 노점좌판에서 샀다. 일부러 팔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 싸게 샀다. 천원 때문에 가책 받았다.
노점에서 야채 등 먹거리를 파는 노점을 보면 지나치지 않고자 한다. 아무거라도 하나 사고자 한다. 고구마순이 눈에 띄었다. 얼마인지 물어 보았다. 칠천원에 다 가져 가라고 했다.
오천원어치만 사고자 했다. 된장국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나물무침해 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머지 것까지 모두 봉지에 넣으면서 육천원에 가져가라고 했다. 졸지에 천원 깍은 셈이 되었다.
콩나물 가격 깍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노점 좌판 물건은 가능하면 부르는 대로 주라는 것이다. 그래 보았자 이천원, 삼천원이다. 많아야 오천원이다.
고구마순은 껍질을 벗겨 내야 하는 노고가 있다. 이런 노고를 고려한다면 달라는 대로 주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천원 깍은 셈이 되었다. 마치 콩나물 값 깍듯이 싸게 산 것이다.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종종 국제구호단체 광고를 접한다. 어떤 광고를 보니 “엄마, 저 사람이 예수님인가봐요.”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어머니가 자녀의 말을 전달하는 식으로 울먹이며 말한 것이다.
구호단체광고를 보면 비참한 장면을 보여 준다. 먹지 못해서 비쩍 마른 제3세계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 준다. 여기에 그 어린이를 예수라고 말한다. 예수가 비참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이다.
버스정류장 노점상을 볼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저 사람 관세음보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비참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님인가봐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보는 것이다. 버스정류장이나 재래시장 근처에서 고구마, 감자, 호박 등 먹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트럭에 물건을 싣고 파는 사람들도 해당된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대부분 외면하고 말 것이다. 노점에서 살 일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불량식품이나 불량품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한 혐오로 볼지 모른다.
어느 사회나 하층민은 있다. 대체로 경제적 측면으로 구분한다. 집도 없고 차도 없으면 없는 사람 측에 속한다. 여기에 배운 것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다면 세상 살아가기 참으로 힘들다.
버스정류장 노점은 하층민 가운데 하층민이다. 먹거리를 팔아 돈을 벌면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이런 경우 달라는 대로 주어야 한다. 깍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노점상 물건은 누가 사줄까? 유심히 관찰하면 나이 든 중년의 여인들이 주로 팔아 준다. 마트에서 보다는 더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서민의 것은 서민이 팔아 주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버스 타고 다닐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버스정류장 노점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유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관세음보살을 만날 기회도 적어지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이 버스 탈 기회도 있을 것이다. 노점 좌판을 볼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건을 사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불량식품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노점 것은 정말 못 먹을 정도일까?
노점에서는 호박, 고구마순, 상추 등 갖가지 먹거리를 판다. 주로 저녁에 먹을 것들이다. 그런데 노점 먹거리를 보면 어느 것 하나 방부제 처리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두 제철에 나는 싱싱한 먹거리이다.
노점좌판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 것이나 하나 팔아 주고자 한다. 이번에는 고구마순을 샀다. 껍질 벗긴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서 먹어야 할까?
제철에 먹는 음식은 보약과도 같다. 제철에 먹는 음식은 왕의 식탁이 부럽지 않다. 방부제 처리 된 것도 아니다. 그날 채취한 싱싱한 먹거리이다. 고구마순을 무침으로 해서 먹기로 했다.
요즘 유튜브시대이다. 고구마순무침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몇 개의 영상을 보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급음식은 무엇일까? 아마 제철에 나는 음식일 것이다. 그 가운데 제철에 나는 나물이 가장 좋다. 나물이야말로 왕의 식탁이 부럽지 않은 최상의 ‘웰빙음식’이다.
고구마순무침을 만들었다. 처가 만든 것이다.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 쉽게 만들 수 있다. 씹는 맛이 나고 감칠 맛 나는 무침이 되었다.
버스정류장에 가면 노점좌판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행위는 단속하지 않는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는 팔아 주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해서 경제는 돌아가고 서민의 삶은 계속 된다.
노점좌판을 볼 때마다 “혹시 저 사람 관세음보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관세음보살이 나이 든 노파로 위장해서 앉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상상력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마치 제3세계의 비참한 어린이 영상을 보여 주면서 “엄마, 저 사람이 예수님인가봐요.”라며 울먹이며 말하는 것과 같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과거에 지은 업이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듯이,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은 부유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생에서 가능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기약할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듯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강남에 아파트가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재산은 백억 가까이 된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한평에 일억이 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로소득에 따른 재산형성이다.
불로소득도 실력에 따른 것일까? 주식에서 초단타매매로 돈을 번 사람은 자신의 노고와 실력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 역시 자신의 노력으로 벌었다고 말할 것이다.
불로소득자들은 대체로 씀씀이가 크다. 불로소득으로 마음껏 물질적 향락을 누린다. 새로운 복을 짓지 않고 즐기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 생에서는 어둠의 세계로 갈지 모른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부동산 투기도 못하고 주식투기도 못한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현재 조건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주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노점좌판은 주는 사람이다. 거래에 있어서 돈을 빼버리면 노점좌판은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사는 사람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 공덕이 더 클까?
식당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 돈거래 하는 장면을 빼 버린다면 식당주인은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먹는 사람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누구 공덕이 더 클까?
장사하는 사람은 주기만 하는 사람이다. 손님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돈거래를 뺐을 때 풍경이다. 주기만 하는 사람의 공덕이 더 클 것이다.
사람들은 물건 살 때 자신의 돈을 주고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돈이 부정한 돈이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또한 불로소득으로 이루어진 부라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서 하층민 사람들은 오로지 주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오로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돈 거래를 뺀 것을 가정한 것이다. 누가 더 복 받는 삶일까?
버스정류장 노점은 주기만 하는 사람이다. 먼데서 본다면 주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도 주기만 하는 사람이다. 먼데서 본다면 돈 거래는 보이지 않는다. 카드로 결재 했을 때 돈은 보이지 않는다.
부유한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주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삶이 축적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인생이 역전 될 수 있다. 현생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내생에서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
받기만 하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노점에서 고구마순을 육천원에샀다. 이를 팔아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받은 것이 된다. 노점상이 준 것이다. 팔아 준 공덕이 더 클까 준 공덕이 더 클까?
노점상을 보면 지나치지 않고자 한다. 무어라도 하나 팔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다. 이럴 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노점상이 어쩌면 관세음보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 주변에 예수님이 많다고 한다. 예수님이 비참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말라고 말한다.
불자들은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관세음보살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주변에는 예수와 관세음보살로 위장해서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2024-10-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