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도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2. 11:10

나도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을까?
 
 
망상속에서 삼십분 보냈다. 오늘 좌선은 실패이다. 그러나 소득은 있었다. 망상을 망상이라고 안 것이다. 망상도 새겨야 할 법인 것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75일째이다. 오늘은 컨디션이 너무 좋다. 컨디션이 너무 좋아도 탈이다. 건강의 자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끔찍이 더웠다. 무려 두 달 동안 열대야가 지속되었다. 이제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늘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등 시린 것이 없다. 뜨거운 여름날 등이 서늘할 때 사는 맛이 나지 않았다. 머리 아픈 것도 없다. 한번 편두통이 시작 되면 그 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다. 잠을 잘 잔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더 이상 열대야에 시달리지 않는 것도 큰 이유가 된다. 이럴 때 건강의 교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날씨가 푹 떨어졌다. 오늘 아침 날씨는 14도 이하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최적의 날씨이다. 이런 좋은 날에 병이 있는 자는 얼마나 괴로울까?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날씨라도 나와 무관한 것이 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필요 없는 것이 된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오늘 주식이 상한가 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건강할 때 이루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건강을 남용한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건강이 회복 될 때 술을 찾을 것이다. 건강이 악화 되면 다시 술을 멀리 할 것이다. 이런 세월을 살았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만다. 중병에 걸려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절망의 나날을 보낼 때 무슨 생각이 들까? 아마 이 병이 나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것이다.
 
건강의 교만이 일어날 때 중환자를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은 ‘야마왕’의 말을 빌어서“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중태이고,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앉혀 주어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M130)라고 말했다. 맛지마니까야 130번경 ‘천사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죽음은 은폐되어 있다. 장례식장에 가도 죽음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병도 은폐되어 있다.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가서 보기 전에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공원에서 종종 휠체어를 탄 중환자를 볼 수 있다.
 
공원에서 휠체어 탄 사람은 근처 요양원에서 온 사람이다.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산책 나온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걸을 힘도 없다. 기저귀를 차고 있을지 모른다.
 
사람은 힘이 넘칠 때 힘을 행사하고 싶어 진다. 조폭의 주먹이 근질근질한 것과 같다. 건강이 넘칠 때 술을 마시는 등 건강을 남용하기 쉽다. 이럴 때 천사(天使: devadūta)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중병에 걸린 사람이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왜 천사인가? 미리 알려 주기 때문이다. 미래에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야마왕’의 입을 빌어서 “이 사람아, 지성적이고 성숙한 사람인 그대에게 이와 같이 ‘나도 병들어야만 하고 질병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나는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는가?”(M130)라고 묻는 것이다.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삶은 죽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건강과 이 젊음과 이 삶이 천년만년 계속될 것처럼 자만하며 살아간다. 이럴 때 천사가 나타난다. 그것은 질병의 천사, 늙음의 천사, 죽음의 천사이다.
 
질병의 천사는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가면 볼 수 있다. 늙음의 천사는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어느 날 만난 어른이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TV와 같은 영상에서 형편없이 늙어 버린 연예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죽음의 천사는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다.
 
도처에 천사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해서 건강의 교만, 젊음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건강은 질병에 삼켜지고, 젊음은 늙음에 삼켜지고, 삶은 죽음에 삼켜진다.
 
천사는 하늘의 사자이다. 하늘의 사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때로 중병에 걸린 비참한 환자의 모습으로, 때로 형편없이 늙어 버린 노인의 모습으로, 때로 죽어 누워 있는 시체의 모습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방일하네.
비속한 몸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랜 세월 슬퍼한다.
 
천사의 경고를 받고 나서야
이 세상에서 참사람들은
언제나 고귀한 가르침에
교훈을 찾고 방일하지 않는다.
 
집착에서 두려움을 보고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하고
태어남과 죽음을 부수었다.
 
안온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M130)
 
 
지금 이순간에도 천사의 경고는 계속되고 있다. 비참한 모습으로, 형편 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모습으로 알려 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메세지를 애써 무시하려는 것 같다.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건강의 교만, 젊음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천사의 경고를 생각한다면 가만 있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한다. 한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수행해야 한다. 대충하면 안된다. 목숨 걸고 해야 한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잘 먹고 원 없이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즐기는 삶은 악덕(惡德)이다. 왜 그런가? 탐욕의 삶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욕망에 끌리는 삶은 불선업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래오래 즐기는 삶을 살면 악업만 증가하게 되어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즐기는 삶보다 공덕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공덕인가?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덕을 쌓으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저 세상’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단지 ‘있다’ ‘없다’라 하여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양극단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은 조건발생법이다. 조건발생법에 따르면 저 세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나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새로운 하늘과 땅인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몰랐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그냥 산 것이다.
 
누군가 “왜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어떤 이는 “사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냥 사는 겁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질문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뚜렷한 답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달라진다. 그것은 삶의 방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왜 사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에는 조건발생적인 답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십이연기로 답한 이유가 된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있기 마련이다. 이는 인과법이다. 그런데 과보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법은 ‘인연과(因緣果)’로 설명된다.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법인 것이다.
 
일은 벌어졌다. 과거에 지은 행위는 조건이 형성되면 과보로서 나타날 것이다. 업이 익으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익는 시간이 달라 시간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한번 업을 지은 것은 언젠가 과보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지금 건강할 때, 한살이라도 젊을 때 공덕을 지어 놓아야 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이다. 나는 얼마나 ‘공덕의 마일리지’를 쌓아 놓았는가?
 
오늘 아침 백권당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보시공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나도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을까?”라고 감히 생각해 본 것이다.
 
보시 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이 있다. 사업을 해서 번 돈을 모두 타인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미얀마 사람 중에는 이런 사업가가 있다고 한다.
 
연말에 종종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이름 모를 독지가가 쌀을 놓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적선(積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다.
 
적선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선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월급생활자로 살 때는 꿈도 꾸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사업자로 살다 보니 가능한 일이 되었다.
 
지난 봄 보시전용통장을 만들었다. 보시를 생활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전에는 사업자 주거래통장에서 돈이 빠져 나갔으나 효율적인 관리가 되지 않았다. 입출금통장이 늘 마이너스 상태인 것도 이유가 된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아예 보시전용통장을 새로 개설한 것이다.
 

 

 
모든 보시는 보시전용통장에서 나간다. 현재 보시전용통장에는 잔고가 285만원 있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보시전용통장은 보시를 생활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에는 몇 건 되지 않는다. 저축하자고 쌓아 놓은 것은 아니다. 소진 시켜야 한다.
 
어떻게 해야 돈을 쓸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선물보내기이다. 페이스북에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선 그들을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글은 대체로 길다. 쓰고 싶은 것이 많아서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 이는 엄지모양의 ‘좋아요’나 하트모양의 ‘최고에요’이모티콘을 눌러 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공감해 주는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매번 글을 올릴 때마다 빠짐 없이 공감해 주는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이들의 명단을 만들어서 선물을 보내고자 한다. 과일박스와 같은 먹거리를 보내고자 한다. 이런 것도 보시의 생활화에 해당될 것이다.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에게 들은 말이 있다. 수행을 하다가 진척이 되지 않을 때 바라밀공덕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전에 바라밀공덕을 쌓았다면 차고 나갈 힘이 있다는 것이다. 보시, 지계, 수행 등 바라밀 공덕이 짧을 때 장애가 있음을 말한다.
 
보시를 생활화하고자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공덕을 쌓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나를 위한 보시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남에게 보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자신에게 보시하는 것임을 말한다.
 
몇 달 지나면 지공거사가 될 것이다. 이 나이에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나이에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오월에 내는 개인사업자의 종합소득세는 십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 중소기업 신입사원 연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시를 확대하고자 한다. 수입의 반을 보시전용통장에 넣는 것은 무리일까?
 
강남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있다. 강남에 오래 산 이유 하나만으로 수십억 재산가가 되었다. 아파트 한채가 백억가까이 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돈 많은 부자는 얼마나 보시를 할까?
 
보시는 액수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월소득이 백만원인 자가 십만원 보시하는 것과 월소득이 일억원인자가 백만원 보시는 것 가운데 누가 공덕이 더 클까? 전자가 열 배 공덕이 더 크다. 보시는 능력껏 하기 때문이다.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다른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보시는 단지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보시바라밀은 초월적이다. 아끼는 것을 주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다.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바라밀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타카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면,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라.
이러한 첫 번째의 길을
그대는 확고하게 실천하라.
 
옹기에 물이 가득 찼는데,
누군가 뒤집으면,
물이 남김없이 쏟아져서,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되듯,
 
요구하는 자를 보면,
천한 자이든 귀한 자이든 중간이건,
뒤집어진 옹기처럼,
남김없이 그대의 보시를 베풀어라.”(Jat.I.20)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라고 했다. 단지 주는 것, 단지 베푸는 것, 단지 나누는 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마치 뒤집어진 옹기처럼 남김없이 주라는 것이다.
 
보시바라밀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 (청정도론 Vism.9.124 각주, 테리가타 의석 서문 17번 각주)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이렇게 보시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목표를 가지고 하나 둘 실천하다 보면 어느 때 꽤 진도가 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글을 쓸 때도 그랬고, 책을 만들 때도 그랬고, 수행을 할 때도 그랬다.
 
글쓰기 한지 18년 되었다. 2006년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많이 쓸 줄 몰랐다. 무려 7,800개 가량 쓴 것이다. 처음 책을 만들었을 때 이렇게 많이 만들 줄 몰랐다. 2018년 처음 책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136권이 되었다. 처음 수행을 시작했을 때 안거 날 줄 몰랐다. 2020년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었는데 자주 앉아 있다 보니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안거에 들게 되었다. 보시는 어떠할까?
 
보시전용통장을 만든 것은 올해 3월달의 일이다. 일감 수주 한 것에서 한 건을 보시전용통장에 넣은 것이 시초이다. 이번에 수주한 일감에서 한 건을 또다시 넣고자 한다. 그러나 통장잔고는 줄어들고 있지 않다. 쌓아 두기 위한 통장은 아니다.
 
탄경스님은 ‘다나밥차’를 운영한다. 전국을 무대로 뛰어 다닌다. 멀리 스리랑카, 미얀마까지 가기도 한다. 스님은 왜 이렇게 보시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마치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목숨 걸고 보시바라밀행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목숨 걸고 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보시를 하기로 했으니 목숨 걸고 해야 할 것이다. 일감 수입의 반은 보시전용통장으로 넣고자 한다.
 
보시보국(布施報國)을 실천하고자 한다.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이 사회와 이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나도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을까?
 
 
2024-10-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