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없는 세상 이틀째
유튜브 없는 세상 이틀째
발바닥이 차갑다. 확실히 계절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가을이 되었다. 행선대의 발바닥 감촉이 차갑다. 이런 것도 법이다. 법의 성품을 보아야 한다.
재가우안거 81일째이다. 오늘은 행선만 한시간 했다. 좌선은 생략했다. 행선이든 좌선이든 한시간은 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어떤 법에서나 공통적으로 드라나는 무상, 고, 무아의 성품법이다.
단지 마음의 안정과 평화만을 바란다면
수행을 왜 하는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서 이른바 MBSR수행하는 것도 해당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종교성은 배제 되어 있다. 불교가 없는 것이다.
MBSR에서는 왜 불교를 배제 했을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치 즉문즉설로 유명한 B스님이 윤회를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된다. 이런 말은 불교인들에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넘어서 타종교까지 포섭하며 일반국민들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초월적이거나 신비적인 이야기, 황당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학적 근거를 들어서 법문할 것이다. 즉문즉설스님이 윤회를 부정하는 이유라고 본다.
즉문즉설스님은 이른바 스타스님이다. 불교계는 물로 타종인교도 인정한다. 국민들도 대부분 알고 있다. 어느 정도인가? 예능프로에 종종 스님의 말이 인용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진대 어떻게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완화명상법(MBSR)에 대하여 흔히 마음챙김명상이라고 한다. 불교TV채널에서 본 MBSR강사의 강연을 들어 보았다. 불교적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관찰하라든가, 조건발생이라는 말은 일체 없다.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챙김만 이야기한다.
MBSR에서 종교성을 배제하고 있다. 즉문즉설스님이 윤회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종교와 인종, 민족을 떠나 전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쪽의 반쪽도 되지 않는다. 단지 마음의 안정과 평화만을 바란다면 훌륭한 명상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교학을 배워야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했으니 오래 되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20년부터이고,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23년부터이다. 작년에 재가우안거라고 하여 스스로 안거에 들어간 것이다. 올해도 우안거에 들어가 두 번째 안거를 보내고 있다.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심오하다. 이는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D15.2)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이와 같은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 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2)라고 말했다. 이런 연기법을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2008년 초기불교를 알고 나서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읽었다. 사부니까야는 다 읽었다. 쿳다까니까야의 경우 현재 번역되어 나온 경전은 다 읽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여러 번 보았다. 최근에는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 아리야와사 법문, 담마짝까 법문을 말한다.
경전과 논서를 읽을 때는 머리맡에 놓고서 읽는다. 잠자기 전에 읽고 잠에서 깨서도 읽는다.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도 읽는다. 읽고 나서 다시 잠잔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고 또 읽는다. 현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두 번째 읽고 있다. 그것도 새기면서 읽고 있다. 진도는 많이 나가지 않는다. 하루에 두세 페이지가 고작이다. 시간 지나면 다 읽게 된다.
경전과 논서를 읽으면서 경전적 지식이 쌓이게 되었다. 어떤 이는 이런 것을 좋지 않게 본다.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불교의 선사들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학은 필요하다.
새는 한쪽 날개로 날지 못한다. 새는 양날개로 하여 하늘 높이 날아간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교학과 실천이라는 양날개로 하여 통찰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 없는 수행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수행 없는 교학도 있을 수 없다.
가르침을 배우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통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1)교리의 문구를 배우는 것(pariyatti), 2)실천하는 것(paṭipatti), 그리고 3)관통하는 것(paṭivedha), 이렇게 세 가지가 구족되어야 한다.
뭉치면 내가 있고 흩어지면 내가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수행법이 있다. 그 중에서도 ‘마하시수행법’을 따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가까운 것이 큰 이유이다.
마하시수행법은 철저하게 빠알리삼장에 근거한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법은 전세계적으로 이것 외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더 좋은 방법이 발견된다면 지금이라도 옮겨 갈 것이다. 마하시방식으로 행선과 좌선을 한다.
행선을 할 때 “왼발, 오른발”하며 발을 뗀다. 발의 모양이나 형태, 이미지를 보지 않고 단지 움직임만 본다. 발을 뗄 때의 경쾌함, 발을 밀 때의 미끄러움,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 그리고 발을 디딜 때의 딱딱함을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명색을 구분해서 보기 위한 것이다.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명색을 구분해서 볼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분리해서 보아야 하는가? 덩어리로 보면 나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분리해서 관찰하고자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은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정반대이다. “뭉치면 내가 있고 흩어지면 내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무더기가 뭉쳐 있으면 나라는 개념이 형성되어서 내가 괴로운 것이다.
무더기를 부수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다섯 가지 무더기의 결합체를 잘게잘게 부수면 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마치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해서 분해 해 놓으면 더 이상 자전거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라는 개념이 부수어졌으니 괴로움이 있을 리 없다.
분명히 아는 것에 대하여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 이 말은 대념처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빠알리어 “갓찬또 와 갓차미띠 빠자나띠(Gacchanto vā gacchamīti pajānāti)”(D22)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갓차미(gacchamī)는 일인칭단수이므로 ‘나는 간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번역서이든지 ‘나는 간다’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행선하다 보면 걷는 나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관행적으로 붙이는 말이다.
갈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고 했다. 이때 ‘분명히 안다(pajānāti)’는 뜻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번역서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보니 분명히 안다는 뜻의 ‘빠자나띠’에 대하여 “다양하게 안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빠자나띠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knows clearly’의 뜻이다. 분명히 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분명히 안다는 것인가? 이는 정신과 물질을 분명하게 안다는 뜻이 된다. 명색을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빠자나띠는 다양하게 안다는 뜻도 된다.
행선을 하다 보면 분명히 알게 된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발을 옮기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이 옮겨지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의도는 정신이고 움직이는 것은 물질인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 왜 물질일까? 이는 지수화풍 사대가운데 풍대에 대한 것이다. 풍대는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부풀거나 꺼지는 것도 해당된다. 그래서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몸관찰에 해당된다.
물질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
정신과 물질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정신은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에 대한 것이다. 물질은 지수화풍 사대와 파생된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물질은 무엇일까?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이때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세 가지가 화합하면 접촉이 일어나는데 이후 연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형상은 물질로 본다. 이는 파생된 물질이다.
지금 창 밖에서 차 소리가 들린다. 귀가 있어서 들리는 것이다. 이때 소리는 물질에 해당된다. 형상도 물질이고, 냄새도 물질이고, 맛도 물질이고, 감촉도 물질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물질은 부서진다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서 부서진다는 말에 사무쳤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부서지는 것이다. 이는 정신도 부서지고 물질도 부서진다는 말과 같다.
의도가 있어서 발을 움직인다. 이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수행자는 의도를 새겨야 하고 움직임을 새겨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겨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순간집중이다. 이를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고 한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순간집중을 요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삼매가 형성되어야 한다. 삼매의 힘으로 새기는 것이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삼매는 형성되게 되어 있다.
새김이 좋을 때 시작과 끝이 보인다. 의도도 보인다. 이때 법의 성품을 본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조건에 따라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사라질 때는 그냥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지는데 있어서 조건은 없는 것이다. 부서지는 것이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밴드에서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유튜브를 보지 않기 때문에 밴드에 올려져 있는 영상법문을 듣는다. 스님은 일상에서도 사띠가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수행자라면 일상에서도 새김(sati)이 유지되어야 한다. 행선할 때나 좌선할 때만 새김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도 새김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튜브도 해당될 것이다.
오늘로서 유튜브를 보지 않은지 이틀 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언제까지 갈지 알 수는 없지만 안거가 깊어짐에 따라 필요성을 느꼈다.
유튜브를 보면 시간을 빼앗긴다. 무엇보다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다. 나의 삶이 아니다. 경전에 따르면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유튜브 없는 세상에서 이틀째 살고 있다. 동네가 조용한 것 같다.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일체 뉴스를 접하지 않으니 번뇌도 없다.
유튜브 없는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 이는 뉴스 없는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과 같다. TV보지 않은지는 몇 년 되었다. 일체 뉴스를 보지 않고자 한다.
스마트폰에 날씨 앱이 깔려 있다. 스마트폰 초기화면에 뜬다. 스마트폰을 켜면 첫화면에 날씨정보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광고가 있는 것이다. 한줄짜리 뉴스도 보였다. 날씨 앱을 삭제했다.
여러 개의 카톡방이 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정치성이 농후하다. 열어보면 정치투쟁에 대한 것이다. 슬그머니 나와 버렸다.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고자 한다. 작년 12월부터 지금까지 11개월동안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타버렸다. 이제 멀리 하려 한다.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는 않는다.
정치는 너무 가까이 하면 타버리고 너무 멀리하면 방관자가 된다. 불가근불가원이 좋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유튜브를 끊어 버리는 것은 너무 가까이 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방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에 매달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천원짜리 당원이 아니라 5천원짜리 당원이다.
유튜브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대부분 쓰레기로 가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진주와도 같은 채널은 있다.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은 들을만하다. 나직하고 분명한 어조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회수는 형편없다.
철학을 요점 정리하여 소개하는 ‘5분뚝딱 철학’ 들을만 하다. 전쟁영화를 다룬 씨네모리도 볼만하다. 전쟁의 참상이나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을 알려 준다. 닥터제이는 태평양전쟁을 다룬 다큐이다.
이번 안거에서 변화가 있다. 그것은 일체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매일 조석으로 듣던 이미우이음악도 끊었다. TV를 보지 않으니 드라마, 예능, 영화도 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이제 유튜브마저 끊으려 한다.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행선과 좌선에서 형성된 새김이 일상에 까지 연장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부자가 되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한 조건은 마련 되어 있다. 혼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백권당에 혼자 있으면 말 걸 사람이 없다. 최대 적에 해당되는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시간부자가 된 것 같다.
시간부자 되면 해야 할 것이 많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는 것도 해당된다.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 물질에 대하여 부서지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부서지는 것이다.”(S22.3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서지는 것은 물질만 부서질까? 아니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부서진다. 조건 발생된 것은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매우 빨리 부서진다. 찰나생찰마멸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상한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이 세상에 부서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일까 “아난다여, 물질은 무상하고 조건지어지고 연기된 것으로 부서지고 마는 것, 무너지고 마는 것, 사라지고야 마는 것,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22.21)라고 했다. 이는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해당된다.
부서지고 마는 것에는 조건도 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부서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 쌍윳따니까야 ‘찬탄의 경’(S22.55)에 따르면,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은 괴롭다.”, “물질은 실체가 없다.”, “물질은 조건지어졌다.”, “물질은 부서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해야 할 일이 많다. 이는 언어전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 되는 삶이 가능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적 지식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유튜브 없는 세상 이틀째
오늘 행선을 한시간 했다. 이런 날은 좀처럼 드물다. 행선은 일이십분 하다 말았다. 좌선을 하기에 앞서 몸풀기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행선은 좌선 못지 않게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2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를 얻기 좋다.
요즘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 백권당에서 홀로 있으니 사람 만날 일이 없어서 알 수 없다. 그러나 근엄한 모습인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는 어쩌면 거룩한 모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일상에서도 가능할까?
일상에서도 새김을 유지하는 것이 큰 화두가 되었다. 행선과 좌선에서 형성된 새김을 일상에서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유튜브를 보지 말아야 한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동네가 조용한 것 같다. 또한 시간부자가 된 것 같다.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행선과 좌선 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 유튜브 없는 세상 이틀째이다
2024-10-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