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그냥 앉아 있었다. 행선도 생략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보지 않았다. 다만 허공을 주관찰대상으로 했다.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여기에 지혜는 없다. 단지 마음의 안정과 평화만을 바란 것이다.
재가우안거 83일째이다. 명상이 매일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누워 있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좌선이 끝난 후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오늘 새벽에 좀 무리했다. 책을 한시간 본 것이다. 그것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보았다. 논서‘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에 실려 있는 ‘조건파악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무려 17페이지를 보았다. 평소에는 두세 페이지가 고작이다.
감동을 넘어 감격한 것은
논서를 보면서 감격했다. 감동을 넘어선 것이다. 읽을 때마다 느낀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번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줄한줄 새기며 읽는다.
책은 온통 울긋불긋하다. 노랑색과 빨강색 형광메모리 펜이 덧칠 되어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연필로 밑줄 그어 놓았다. 더 나아가 연필로 생각나는 것을 써 놓았다.
논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두 번째 읽고 있다. 새로운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몸으로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새로 읽는 기분이다. 청정도론도 그랬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청정도론’에 기반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무애해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청정도론과 무애해도, 그리고 주석까지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빠사나 수행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행의 경지가 높아도 벙어리가 되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불교인을 가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니까야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 청정도론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오늘 아침 생각난 것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이 나온지는 오래 되었다. 5세기 스리랑카 붓다고사가 편집한 것으로 수많은 수행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청정도론은 2000년대 말에 접했다. 세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이다. 불교 교리에 대한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훌륭한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다. 이책을 다 읽어 보았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인내로 완독한 것이다.
청정도론을 읽고 또 읽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 된 때에는 교정자로 참여 했다. 두 번 읽어 보았다.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청정도론을 읽지 않고 법을 논할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제아무리 수행의 경지가 높아도 ‘벙어리’가 되는 것은 교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희망을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전에는 방법도 모르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위빠사나 수행방법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경전과 논서를 근거로 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어판에 부치는 말’을 보니 2012년의 일이다.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불교는 니까야 번역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을 들었다. 2000년대 듣던 말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한국불교의 수행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매일 새벽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접한다. 머리 맡에 있어서 손만 뻗으면 펼칠 수 있다. 스탠드 불을 켜고 돋보기 안경을 쓰고 형광메모리펜을 쥐고서 읽는다. 한줄한줄 읽을 때마다 새롭다. 어떤 구절에서는 딱 멈추어 버린다. 그리고 사유한다.
나는 만명 가운데 하나에 들어갈까?
흔히 도를 닦는다고 말한다. 이때 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말할 때 그런 도일까? 노자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가도비상도”를 말하는 것일까? 선불교에서 말하는 도를 말하는 것일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도는 이와 다르다.
초기불교에서도 도를 말한다. 그런데 반드시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말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쌍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쌍팔배의 성인이라고 말한다. 네 종류로 되어 있는 여덟 사람이라는 뜻이다. 수다원 도와 과, 사다함 도와 과, 아나함 도와 과, 아라한 도와 과를 말한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도는 꽃이 핀 것과 같고 과는 열매가 맺는 것과 같다. 누구나 도를 닦으면 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와 과를 얻기는 쉽지 않다. 미얀마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 사야도는 ‘만명에 하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만명 가운데 하나에 들어갈까? 전생에 수행자로 살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현생에서 오랜세월 수행을 했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방법을 알아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훌륭한 스승과도 같은 논서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알게 된 것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다. 2022년 봄 붓다의 날에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때 담마짝까법문, 아리야와사법문과 함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을 받았다.
일창스님에게서 받은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 네 권을 모두 다 읽어 보았다. 특히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두 번째로 읽고 있다. 1권은 이미 두 번 읽었다. 2권은 두 번째로 읽고 있는 중이다.
삼세에 걸친 업과 업의 과보에 있어서
어느 한구절도 놓칠 수 없다. 모두 외워 버리고 싶다. 진도를 빠르게 나아갈 수 없다. 하루 한두 페이지가 고작이다. 한줄 읽고 사유하고, 또 한줄 읽고 사유하고 숙고한다. 기억하기 위해서 새기며 읽고 또 읽는다. 오늘 새벽 읽은 것 가운데 이런 게송이 있다.
Kammassa kārako natthi, vipākassa ca vedako;
Suddhadhamma pavattanti, evetaṁ sammadassanaṁ.
Evaṁ kamme vipäke ca, vattamāne sahetuke;
Bījarukkhādikānaṁva, pubbā koşī na nāyati;
Anāgatepi sarṁsāre, appavatti na dissati.(Vis.ii.237)
(대역)
“kammassa선업, 불선업을karako행하는 이, 개인, 중생도 natthi없고,
vipakassa좋고 나쁜 과보를
vedako ca경험하는 이, 개인, 중생도 natthi없다.
suddhadhamma개인, 중생 등과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업과 과보라는 법들만
pavattanti번갈아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생겨날 뿐이니,
evaṁ이와 같이 etaṁ이것이, 이렇게 보는 것이
sammadassanaṁ틀리지 않은, 바른 앎과 봄이다.
evaṁ이와 같이, 즉 이렇게 설한 방법을 통해
(diṭṭhe)직접 볼 수 있는 bījarukkhādikanṁ씨앗과 나무 등의
pubba koți그 처음 시작을 na nayati iva알 수 없는 것처럼
sahetuke vattamane의지하는 과보라는
원인과 함께 생겨나는 kamme ca업과
sahetuke vattamane업이라고 하는
원인과 함께 생겨나는 vipake ca과보의,
pubbā kotr업과 과보라고 하는 정신·물질 연속의
처음 시작을 na nayati알 수 없다.
anāgatepi미래에서도 saṁsare정신·물질의 연속인 윤회는
(sati)원인인 업을 도의 지혜로 아직 다 잠재울 수 없는 한
계속 있던 대로 여전히 존재한다.
appavatti업과 과보의 연속이 생겨나지 않음 = 끊어짐을
na dissati볼 수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5쪽)
위 빠알리 게송은 청정도론에 실려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 빠알리 게송을 미얀마로 대역했다. 일창스님은 미얀마로 되어 있는 대역을 우리말로 또 대역했다. 빠알리어 단어나 구절에 대한 주석적 번역인 것이다.
대역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주석적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은 어느 정도 파악된다. 그러나 초보자가 이 책을 본다면 이해가 되지 않아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것이다.
게송의 핵심은 업과 과보에 대한 것이다. 삼세에 걸친 업과 업의 과보에 있어서 오로지 정신과 물질, 그리고 조건발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나, 중생,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지침서이다. 청정도론에 기반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내용 역시 위빠사나 수행방법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하시 사야도가 5세기에 편집된 붓다고사의 글을 좀더 알기 쉽게 써 놓은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정신따로 물질따로 새기는 것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우안거철을 맞이하여 매일매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매일 앉아 있는다고 해서 깨닫게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누구나 방석에 앉아 있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절에 산다고 해서 자동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방법을 모르고 앉아만 있다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스트레스완화기법명상 같은 것이다. 흔히 ‘마음챙김명상’이라고 한다. MBSR이 대표적이다.
MBSR은 종교성이 배제된 명상기법이다. 불교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것이다. 단지 불교명상 기법만 가져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띠(sati)에 대한 것이다. 호흡을 지켜 보라는 식의 명상방법이다. 이런 것을 위빠사나라고 할 수 있을까?
위빠사나 명상은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우리 몸과 마음을 명색으로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정신따로 물질따로 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위빠사나명상 출발점이다. 그러나 MBSR과 같은 마음챙김 명상법에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긴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출발점부터 다른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 출발점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견해를 부수기 위함이다. 나라는 견해를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유신견을 말한다.
쪼개고 또 또 쪼개다 보면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면 수행지침서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는 쌍윳따니까야를 보면 알 수 있다.
니까야에는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까야는 수행지침서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도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이다. 왜 그런가?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해서 설명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뭉쳐 있으면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일까 과학자들은 물질을 나누고 또 나눈다. 쪼개고 또 또 쪼개다 보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텅 빈 공간일 것이다. 이는 양자론으로도 설명된다. 어쩌면 부처님 가르침도 이처럼 설명할 수 있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었다. 또한 육처로 구분했다. 이렇게 나누고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체해서 보아야 실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빠사나수행 1단계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행선 할 때 여섯 단계로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를 말한다. 이렇게 여섯 단계로 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보기 쉽기 때문이다.
발을 떼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이를 아는 것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 양자를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발을 떼는 물질을 따로 새기고, 이를 아는 정신을 따로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겼을 때 나라는 개념은 발 붙이지 못한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만 있게 되는 것이다.
조건발생에 따른 인과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도 생겨나게 된다. 행선할 때 잘 보인다.
발을 떼려 할 때 의도가 있게 된다. 이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발을 떼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의도는 원인이 되고 발을 떼는 것은 결과가 된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이를 조건발생의 지혜라고 하는데 위빠사나 2단계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2단계 지혜는 인과에 대한 것이다. 앞에 있는 게송은 인과에 대한 게송이다.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다. 발을 떼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을 움직이게 되는데 이는 조건발생에 따른 인과에 해당된다. 위 게송에 대한 마하시 사야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보시할 때 보시하려는 마음, 의도가 생겨난다. 죽일 때 죽이려는 마음, 의도가 생겨난다. 그 의도와 함께 적당한 몸, 말의 행위 = 물질도 생겨난다. 이 마음의도와 몸·말의 행위인 물질들만을 선업, 불선업이 라고 한다. 이렇게 정신·물질 두 가지 모두를 업 = 행위 = 작용이라고 이름하더라도 “cetanāhaṁ, bhikkhave, kammaṁ vadāmi = 비구들이 여의도를 업이라고 나는 말한다”라고 하신 가르침에서처럼 바탕으로서 결과를 줄 수 있는 의도만을 업이라고 설하셨다. 이것은 근본 (padhāna)방법이다. 근본이 아닌(appadhāna) 것으로는 의도와 함께 생겨나는 정신·물질 두 가지 모두를 업 = 행위 = 작용이라고 한다. 따라 선업이 생겨날 때는 행하고자 하는 마음, 의도와 함께 몸과 말의 행위 라고 하는 정신·물질, 두 가지만 생겨난다. 바로 그 정신·물질을 집착해 서 ‘한 개인이 보시한다. 한 개인이 죽인다’라는 등으로 부르고 표현하고 말한다. (이것은 단지 말하고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행위 = 작용 = 업 이라고 하는 그 정신·물질을 행하게 할 수 있는, 성취하게 할 수 있는,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어떠한) 개인,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존재 하지 않는다.
그 밖에 볼 때, 들을 때 등에 좋고 나쁜 대상들을 앎, 느낌이라고 하는 과보만 생겨난다. 과보인 바로 그 정신·물질을 집착해서 “한 개인이 느낀다”라고 부르고 표현하고 말한다. (이것도) 단지 말하고 표현하는 것 일 뿐이다. 과보인 정신·물질을 생겨나게 하여 느낄 수 있는 개인, 중생 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 생에 업을 행했을 때는 선업, 불선업만 생겨났다. 지금 생에서 재생연결 때, 바왕가 마음이 생겨날 때, 볼 때, 들을 때 등에는 그 업 때문에 경험하고 겪는 것인 과보만 생겨난다. 그 결과인 과보를 의지 해서 지금 생에서 선업, 불선업이라고 하는 업만 생겨난다. 그 새로운 업 때문에 다음 생에서 경험하고 겪는 것인 과보만 다시 생겨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업과 그 과보만 번갈아 가면서 생겨나고 있다. kāraka atta = 업·행위를 행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vedaka atta = 과보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보고 알고 이 해하는 것을 ‘바르게 봄(sammadassana)’이라고 부르는 ‘조건파악의 지혜(paccayapariggaha ñāṇa)’라고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6-167쪽)
위빠사나 2단계 조건파악의 지혜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삼세가 등장한다. 필연적으로 전생과 윤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스님의 윤회관을 보면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윤회는 없다.”라는 말이다. 스님이나 교수 등 불교식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가 그렇다는 것이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B스님이 있다.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스님의 법문은 훌륭하지만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스님에 대한 글을 쓰면 매번 구업을 짓는 것 같다.
B스님은 왜 윤회를 부정할까? 아마 그것은 스님의 명성에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스타스님인데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B스님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도 존경하는 스님이다. 국민들도 존경하기 때문에 ‘국민스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스님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강연이 있는 도시에서는 구름청중을 몰고 다닌다.
국민스님이 된 B스님의 윤회관은 문제가 있다. 블로거가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최근에 들어 보아도 윤회관은 바뀌지 않았다.
국민스님은 힌두교 윤회를 말한다. 윤회는 힌두교에서 사성계급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부처님은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스님의 교학적 지식을 의심하게 된다.
B스님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수행도 오래 했다. 스님은 윤회를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스님의 명성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국민스님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종교를 떠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에서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생활법문 위주이다. 고부관계, 부모자식관계 등의 주류를 이룬다.
윤회를 믿음의 문제라고 하는데
B스님은 매우 과학적이다. 스님의 출가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불교 경전에 있는 신화적인 이야기, 초월적 이야기를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정한다. 윤회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스님은 유튜브 영상에서 수차례 윤회를 부정했다. 그때마다 블로거는 경전적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스님은 최근에는 믿음의 문제라고 했다. 부정하는 것에서 한단계 물러선 것 같기도 하다.
B스님은 윤회를 믿음의 문제라고 했다. 이는 “윤회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윤회가 있다고 믿을 것이고, 윤회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윤회가 없다고 믿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회의론이다. 부처님 당시 회의론자 산자야 벨라뿟따를 떠 올리게 한다.
B스님이 윤회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모를까 전국민을 대상으로 법문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보는 것 같다.
윤회는 믿음의 영역일까?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니까야를 보면 윤회는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존재론적 윤회를 말하지 않는다. 이는 ‘윤회가 있다고 말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말하면 단견에 빠진다’라는 식의 존재론적 윤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법적 윤회를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는 수행을 하면 연기법적 사고를 갖게 된다. 연기법적으로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윤회는 믿음의 영역이 아님을 알게 된다.
윤회를 믿음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은 과학적 사고에 따른 것이다. 주로 유물론자들이 이런 시각을 갖는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사고 방식을 갖는 자들이다.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만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내생도 윤회도 믿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도 과학적 잣대를 대기 때문일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삼세에 걸친 인과에 대한 것이 위빠사나 2단계 조건파악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함께 2단계 조건파악의 지혜가 갖추어지면 ‘작은 수다원’이 된다. 성자의 흐름 일보직전이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또한 윤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윤회를 부정한다거나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본다면 한발자국 나가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삼세에 걸친 연기법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윤회를 부정하거나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본다면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인과를 부정하는 것은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오늘 새벽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은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라는 말이다. 이는 “과보인 정신·물질을 생겨나게 하여 느낄 수 있는 개인, 중생 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7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고, 업보는 있지만 감수자는 없다.”라는 말과 같다.
B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또한 윤회에 대하여 믿음이라고 말한다. 스님이 공부를 하지 않았거나,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명성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본다. 이럴 때 스님이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늘 대중을 상대해야 하는 스님 입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같다. 초기경전과 논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새벽에는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라는 말을 떠 올렸다. 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에 원인인 정신-물질과 결과인 정신-물질만 생겨나고 있다.”(2권, 173쪽)라는 말로도 확인 된다. 이를 2단계 조건파악의 지혜라고 한다. 나도 조건파악의 지혜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일까?
2024-10-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