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닝을 타고 다녀도 벤츠가 부럽지 않은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20. 10:13

모닝을 타고 다녀도 벤츠가 부럽지 않은 것은
 
 
아침 커피가 입에 착착 달라 붙는다.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시지도 않는 맛이다. 이 말은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시기도 하다는 말과 같다. 오늘 아침 절구커피는 쓴맛과 단맛과 신맛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커피 마실 때 백권당의 아침은 가장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이다. 이제 막 아침식사를 마친 상태에서 마시는 절구커피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맛의 커피보다도 최상이다. 아마 그것은 어쩌면 손수 절구질해서 만든 커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커피맛은 매일 다르다. 똑 같은 조건이지만 어제의 맛과 오늘의 맛은 같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원인은 아마 현재 몸상태에 있는지 모른다. 몸상태가 좋지 않으면 커피는 쓴맛이 강하다. 그러나 컨디션이 날아갈 듯 하면 커피는 단맛이 강하다. 그러나 최상의 커피맛은 쓴맛과 단맛과 신맛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여기에다 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이른 아침 백권당에서 매일아침 하얀여백을 접한다. 오늘 이박삼일 자연휴양림으로 출발하는 날에 속도전해야 한다. 주제는 미리 정해 놓았다. 써야 할 줄거리는 스마트폰에도 메모했고 노트에도 기록해 놓았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람들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 이를 “끼리끼리 어울린다.”라고 말한다. 한자어로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 된다. 이 말은 초기경전에서도 발견된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자는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 시는 자는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25)
 
 
오계에 대한 것이다. 이 경을 접하고 매우 놀랐다. 유유상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구체적인 것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다섯 번째 ‘음주’에 대한 것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려면 그 사람 친구를 보라고 했다. 어떤 사람과 어울리고 관계를 맺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사람이 사기꾼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이 도둑질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면 그 사람은 ‘도둑놈’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면 그 사람은 ‘난봉꾼’일 가능성이 높다.
 
유유상종에는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릴 수 있다. 부처님 제자들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리뿟따 존자가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목갈라 존자도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깟싸빠 존자도, 아누룻다 존자도 등도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이들 존자들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승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유유상종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지혜제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은 사리뿟따 존자를 추종하는 수행승들에 대하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들이다.”(S14.15)라고 했다. 목갈라나 존자를 추종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모든 수행승들은 위대한 신통을 지닌 자들이다.”(S14.15)라고 했다. 그렇다면 깟싸빠 존자를 따르는 수행승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일까? 이에 대하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두타행을 실천하는 자들이다.”(S14.15)라고 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만 보아도
 
사람들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그래서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고, 탁월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계를 조건으로 지각이 생겨나고 견해가 생겨나고 사념이 생겨난다.”(S14.13)라고 했다.
 
 
여기서 세계를 뜻하는 다뚜(dhātu)는 주석에 따르면 경향(ajjhāsaya)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과 세계가 비슷한 사람, 즉 경향이나 기질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각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신과 세계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서로 통할 것이다. 그래서 “저열한 세계를 조건으로 저열한 사념, 저열한 의도, 저열한 소망, 저열한 욕구, 저열한 인격, 저열한 언어가 생겨난다.”(S14.13)라고 했다. 탁월한 자는 이와 반대일 것이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관계를 맺고 어울리는 사람의 언어만 들어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와 세계가 관계를 맺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종교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절에 다니고 있다. 현재 자주 다니고 있는 절은 테라와다불교의 ‘담마와나선원’과 한국선종의 ‘천장사’이다. 이 밖에도 테라와다불교의 ‘한국마하시선원’과 한국불교의 ‘성원정사’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능인선원은 불교교양대학 도반이 있어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절에 다니는 사람은 교회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다니는 사람 역시 절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이는 자신의 종교적 성향과 관계가 있다. 또한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 기질이 비슷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어제 천장사에서 성지순례 갔었다. 전세버스로 20여명이 보은에 있는 복천암으로갔다. 그런데 별도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멀리 부산에서도 온 사람도 있었다. 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차를 가지고 왔다. 여기에 노부부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법주사 입구 상가동에 있는 버섯전골전문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모두 여섯 테이블이 준비 되었다. 그런데 노부부는 들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노부부의 벤츠를 타보니
 
노부부는 차를 가지고 왔다. 그것도 ‘벤츠’이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거사는 천상사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불공을 드린다고 했다. 채팅방에도 들어와 있지 않다. 거사는 주지스님 하고만 소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노부부는 어울리지 하려 하지 않을까? 이런 의문은 순례 내내 들었다. 함께 이동할 때도 말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일반사람들과 달라 보였다. 옷도 달랐고 태도도 달랐다. 매우 점잖고 품위 있어 보였다. 일반사람들과 어울릴 스타일은 아니었다.
 
노부부의 차를 탈 기회를 가졌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잠시 탄 것이다. 처음 타보는 고급승용차는 모든 것이 달랐다. 네비의 화면은 마치 노트북처럼 큰 것이었다. 뒷죄석에도 모니터가 있었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집처럼 보였다.
 
일행 중에는 벤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노부부가 탄 벤츠를 보더니 S그룹 회장 정도 되는 사람이 타는 것이라고 했다. 차대는 수억원원 될 것이라고 했다. 너무 부유해서 일반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럴 때 유유상종을 떠올려 보았다.
 
나에게 모닝이 있는데
 
나에게도 차가 있다. 배기량 구백구십구씨씨짜리 경차 모닝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차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차를 끌고 다니다 보니 혜택도 있다는 것이다. 공용주차장에서는 반값의 주차료만 내면 된다. 무엇보다 통쾌한 것은 고속도로 통행료이다. 정확하게 절반만 내면 된다.
 
경차는 차가 작다. 키가 큰 사람, 몸무게가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사람은 경차 타기 힘들다. 또한 명예와 지위를 중시하는 사람은 타기 힘들 것이다. 세컨카로는 활용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타고 다니는 경차는 가족차이다. 경차에 세 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경차를 타고 다니면 무시 받는 것을 각오 해야 한다. 한적한 지방도로에서 달리다 보면 추월 당하기 일쑤이다. 때로 비켜 달라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이럴 경우 방어운전을 한다.
 
모닝을 운전할 때 큰 차는 피해간다. 외제차는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 가거나 차선을 바꾼다. 오르막에서는 힘이 달리기 때문에 알아서 옆으로 비켜 준다.
 
벤츠 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더구나 수억원에 달하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들이 사는 집은 얼마나 화려할까? 스물두 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가서 보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자는 부자들끼리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유유상종의 법칙이 작동되는 것이다.
 
누구나 말못할 고민 한가지 이상은
 
벤츠부부는 자신의 차로 따로 왔다. 그러나 복천암까지 갈 때는 봉고차에 합석했다. 그러나 일체 말이 없다. 누구도 물어 보는 사람도 없다. 오로지 주지스님만 바라보고 온 것 같다.
 
벤츠부부를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매우 진지한 모습이다. 스님의 법문을 흐트러짐 없이 잘 경청한다. 절을 하며 불공 드리는 모습은 매우 정성이 있고 또한 간절해 보인다. 이런 모습을 보자 “큰부자라도 말못할 괴로움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대부분 행복한 모습이다. 건강하고 젊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만 봐서 그런 것일까? 요양원에 있는 사람은 늙고 병들어 괴로운 나날을 보낼 것이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지금 젊고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한꺼풀만 열고 들어가면 말못할 고민이 있을지 모른다. 지금 엄청난 부자도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말못할 괴로움이 있을지 모른다.
 
그룹회장이나 타고 다닌다는 벤츠가 있다. 그런 벤츠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성지순례를 함께 했다. 부로 따지자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순례에 참가해서 정성스럽게 불공 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부자에게도 말 못할 고민은 있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부를 막론하고 누구나 말못할 고민 한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행복해 보일 뿐이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부자들은 대체로 자신을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노출하는 것 자체를 손해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부를 가진 자가 페이스북에 자신의 신변이야기를 써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으로 본다.
 
페이스북은 지식인들의 놀이터라고 말한다. 그런데 페이스북은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놀이터도 된다는 것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에서부터 가족자랑도 서슴지 않는다. 특히 손주자랑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엄청난 부를 가진 자가 자신을 드러냈을 때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마치 자신의 호주머니에 백만원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치안이 엉망인 나라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는 많다. 큰 부자인 사람,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지위를 중시하는 사람, 가문을 중시하는 사람 등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울린다면 그들과 급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리라 본다. 부자는 부자들끼리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리고,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지위가 있는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거친 말을 하고 거친 행위를 하는 일반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받기만 하는 사람과 주기만 하는 사람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큰 부자가 있을 때 그들의 재산을 빼버리고 보는 것이다. 마치 목욕탕에서 서로 알몸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럴 때 부자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부자에게서 부를 빼 버렸을 때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것이다. 부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지은 행위를 말한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부자들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 등으로 형성된 불로소득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불법과 탈법, 편법을 저질렀다면 그 부는 타인의 눈물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른다.
 
부자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돈거래를 빼버렸을 때의 상황을 말한다. 어디를 가든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식당에 가서도 받기만 하고, 가게에서도 받기만 한다. 심지어 인사도 받기만 할 것이다.
 
여기 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식당 주인은 주기만 한다. 장사하는 사람은 주기만 한다. 하인은 인사만 한다. 일종의 주는 사람이다. 물론 돈거래를 생략했을 때를 말한다.
 
받기만 하는 사람과 주기만 하는 사람, 누가 더 공덕이 되는 삶일까? 돈거래를 빼 버렸을 때 주기만 하는 사람은 공덕을 쌓는 것이 되고, 받기만 하는 사람은 공덕을 까먹는 삶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부자가 불로소득으로 형성된 재산을 자신의 감각을 즐기는 데만 사용한다면 공덕을 까먹는 삶이 된다. 밝음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갈지 모른다.
 
모닝을 타고 다녀도 벤츠가 부럽지 않은 것은
 
부로 사람의 ‘등급’을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가진 자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상해 하는 것 같다. 이는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부의 척도로 판단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한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람의 삶에서 부만 쏙 빼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집을 가졌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차를 가졌는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목욕탕에서 알몸이 된 것처럼 부와 명예, 지위, 가문, 태생을 빼버리고 등급을 정하자는 것이다.
 
부로 따진다면 나는 하류에 해당된다. 물론 소형아파트 한채도 없고 경차도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부자가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부의 기준으로 본다면 가난한 자에 해당된다.
 
명예로 따졌을 때 나는 내세울 것이 없다. 지위와 가문, 태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가지 비빌 언덕은 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관통하는 삶을 산다면 부, 명예, 지위, 가문, 태생이 부러울 것이 없다. 모닝을 타고 다녀도 벤츠가 부럽지 않다.
 
 
2024-10-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