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사야도법문

끊임 없이 흐르는 명색(名色)의 강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23. 14:42

끊임 없이 흐르는 명색(名色)의 강
 
 
익숙한 것은 능숙한 것이다. 일상에서 늘 하던 일은 익숙하기도 하고 능숙하기도 하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가평 칼봉산자연휴양림에서 이박삼일 있었다. 오늘 아침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른 아침 백권당으로 걸어와서 가장 먼저 식사를 했다. 늘 그렇듯이 고구마와 찐계란이 주식이다. 이런 것도 일상이다. 그리고 능숙하다.
 
식사를 했으니 커피를 마셔야 한다. 늘 그렇듯이 절구질해서 절구커피를 만들어 마신다. 이것도 일상이다. 절구질에 능숙하다. 향과 함께 쓴맛, 신맛, 단맛이 조화를 이루는 최상의 절구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셨으니 이제 수행을 해야 한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은 매일 아침 늘 하는 일이다. 매일 하다 보니 능숙해졌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행선대를 걷고 금강좌에 앉으면 저절로 되는 것 같다.
 
우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의 삶을 살 수 없다. 생업이 있는 일인사업자는 현실을 떠날 수 없다. 마치 가게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고객을 기다리는 것처럼 메일 오기를 기다린다.
 
행선하는 것은 일상
 
매일 행선하는 것은 일상이다. 행선이 일상이 되다 보니 이제 능숙해졌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은 일상이 되었다. 발을 떼자 마자 ‘움직임’이라는 물질과 움직임을 아는 ‘앎’이라는 정신을 새고자 했다.
 
육단계 행선을 하면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은 최상의 명상지혜임을 말한다. 어떤 것인가?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 ‘앞으로 나아갈 때 생긴 물질은 물러날 때 이르지 못한다’라고 관찰하고 아는 모습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발걸음마다 여섯 부분씩 나누어 알고 보는 모습까지, 설명한 방법대로 분명하게 알고 보고 이해하면 물질에 대한 명상의 지혜가 최고로 미세하게 된 상태이다. 그보다 더 미세 해질 수 없다. 명상의 지혜의 끝이라는 뜻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21쪽)
 
 
이 말에 크게 고무 되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여섯 단계 행선을 마치 매일 밥을 먹듯이 행하고 있다.
 
한번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매순간 일어나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절절하게 알 수 있다. 발의 움직임과 배의 움직임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면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여섯 단계 행선하는 것에 대하여 “앞으로 나아갈 때 생긴 물질은 물러날 때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삼매와 새김(sati)은 서로 상승작용을
 
발을 뗄 때 발을 뗌과 동시에 떼는 물질적 현상이 발생된다. 동시에 이를 아는 앎인 정신적 현상이 발생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이와 같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거의 동시에 따로따로 새겨야 한다. 변화하는 대상을 새겨야 하기 때문에 대단한 집중과 몰입을 필요로 한다. 삼매가 형성되지 않으면 보기 힘들다.
 
삼매는 현미경 같은 것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작고 미세한 것을 볼 수 있듯이, 삼매가 형성되면 정신과 물질의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른바 생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하는 생멸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삼매와 새김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발의 움직임이나 배의 움직임을 새기고자 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명칭 붙여서 새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발을 움직일 때는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고”라며 마음으로 명칭을 붙인다. 배의 경우 “부푼다, 꺼진다”라며 미얀마식으로 ‘동사형명칭’을 붙인다. 이렇게 명칭 붙이는 것은 삼매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삼매와 새김(sati)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명칭 붙여 새기고자 노력하면 어느 순간 삼매가 형성되는데, 한번 삼매가 형성되면 새김은 명확해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과 물질 현상의 처음과 끝을 명백히 아는 것을 말한다. 새김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삼매가 더 형성되면 그때 새김은 자동으로 저절로 되는 것 같다.
 
생겨나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있는데
 
청정도론에서는 여섯 단계 행선에 대하여 명상의 지혜의 정점이라고 했다. 이는“Tassevaṃ pabbapabbagate saṅkhāre vipassato rūpasammasanaṃ sukhumaṃ hoti”라는 말에 근거한다. 이 빠알리어를 대역하면 “이와 같이 여러 단계, 여러 부분이 된 형성들을 관찰하는, 관찰할 수 있는 그 수행자의 물질에 대한 명상의 지혜는 미세하게 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21쪽)가 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육단계 행선을 하면 “물질에 대한 명상의 지혜는 미세하게 된다. (rūpasammasanaṃ sukhumaṃ hoti)”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물질에 대한 명상의 지혜가 최고로 미세하게 된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더 나아가 “그 보다 더 미세할 수 없다.”라고 했다. 더구나 “명상의 지혜의 끝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3단계인 ‘명상의 지혜(sammāsana ñāna)’또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 대한 설명이다.
 
여섯 단계로 행선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물질에 대한 명상의 정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앞으로 나아갈 때 생긴 물질은 물러남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나아 가는 그곳에서 멸한다. 물러날 때 생긴 물질은 앞을 봄에, 앞을 볼 때 생긴 물질은 돌아봄에, 돌아볼 때 생긴 물질은 구부림에, 구부릴 때 생긴 물질은 폄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그곳에서 멸한다. 그래서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이다’라고 삼특성을 제기한다.”(Vism.20.65)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것도 생겨난 것은 전달되지 못함을 말한다. 생겨나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마치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형성들이 부수어진다.” (Vism.20.65)라고 비유를 들어서 표현했다.
 
명상의 지혜 또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그 어떤 것도 생겨나자마자 사라진다. 이처럼 생겨나는 것은 사라져 버림을 아는 것은 하나의 지혜에 해당된다. 이를 위빠사나 16단계에서는 4단계 생멸의 지혜라고 한다. 그런데 생멸의 지혜 전단계에서는 ‘명상의 지혜’ 또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라고 하여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의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명상의 지혜는 어떻게 아는가? 어느 것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아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앞으로 나아갈 때 생긴 물질은 물러날 때 이르지 못한다.”라며 관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여섯 단계 행선에서 발을 뗄 때가 있다. 뗄 때의 물질적 현상은 발을 들 때의 물질적 현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발을 뗄 때 물질적 현상은 끝나 버린다. 다만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또는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또 다른 명색이 생겨날 뿐이다.
 
어리석은 일반 범부들은
 
행선에서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것은 명색과정이 진행되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볼 때 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일반 범부들이 ‘볼 때의 물질들이 들을 때까지 이른다. 들을 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잘 머문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 한 것(= 눈 감성물질)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 귀 감성물질)은 하나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하나이다’라고만 잘못 생각하고 집착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보고 난 다음에 바로 냄새 맡는 것이 분명할 수도 있다. 그때 어리석은 범부들은 ‘볼 때의 물질이 냄새 맡을 때까지 이른다. 냄새 맡을 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잘 머문다. 보는 것 그 자체가 다시 냄새 맡는 것이 되어 버린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 눈 감성물질)과 냄새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코 감성물질)은 하나 이다. 보는 것도 ‘나’다. 냄새 맡는 것도 ‘나’다. 한 존재가 보기도 한다. 냄새 맡기도 한다”라고도 잘못 생각하고 집착한다. 이 정도가 다가 아니 다. 보고 난 다음 바로 먹어서 앎, 닿아서 앞, 생각하여 앎 등도 분명하게 생겨날 수 있다. 그때 어리석은 범부들은 “보는 그 자체가 먹고, 닿고, 생각하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보는 것도 ‘나’다. 먹는 것, 닿는 것, 생각 하는 것도 ‘나’다. 한 존재이다”라고도 잘못 생각하고 집착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30쪽)
 
 
이 대목을 보면 한국선사들이 말한 것이 생각난다. 불교방송 등에서 들은 법문에 따르면, 한국선사들은 듣고 보고 냄새 맡는 놈이 있다고 말한다. 보면 볼 줄 알고, 들으면 들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아는 그놈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참자아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의 근원이다. 가짜 나와 참나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변함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어떤 조건인가? 위빠사나수행을 하다 보면 명색이 조건이 된다.
 
명색은 존재의 원인이 되기도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는 위빠사나수행을 해보면 알 수 있다.
 
행선할 때 발을 드는 것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치 몸은 나무토막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의도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이때 의도는 원인이 되고 발을 드는 것은 결과가 된다. 또한 의도는 정신적 현상이고 발을 드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발을 움직이는 것은 명색과정에 따른다. 명색이 있어서 발을 움직이는 것이다. 배후에 나가 있다거나 관찰자가 있다거나 주재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명색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을 어리석은 일반범부들은 모른다.
 
언어적 명칭은 생멸이 없어서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명색이 발생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떤 것도 항상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 어떤 것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함을 말한다. 한번 생겨난 것은 생겨난 것으로 끝난다. 이 말은 사라짐을 말한다.
 
생겨난 것은 사라질 운명에 있다. 그것도 매우 빨리 사라진다. 찰나생찰나멸로 설명된다. 이렇게 빨리 생겨났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에 있어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무아(無我)가 된다.
 
어떤 이는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영혼이 이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관찰자가 있다고 말하고 주재자가 있다고 말한다. 있다면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언어적 명칭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언어적 명칭은 생멸이 없으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나, 너, 중생, 관찰자, 주재자, 참나, 창조주는 실체가 없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생멸도 없다. 생멸이 없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적 명칭은 사람들이 개념 지어 놓으면 그 언어적 명칭을 기억하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감각을 초월하는 초자아가 있다는데
 
어리석은 범부는 내가 보고 내가 듣는다고 말한다. 이는 보고 듣고 느끼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보는 그 자체가 먹고, 닿고, 생각하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보는 것도 ‘나’다. 먹는 것, 닿는 것, 생각 하는 것도 ‘나’다. 한 존재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종종 선사들의 법문을 듣는다. 선사는 법문에서 볼 때는 볼 줄 아는 그놈이 있고, 들을 때는 들을 줄 아는 그놈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히 존재하는 소소영영한 그놈이 있다고 한다. 정말 이런 자아 또는 영혼, 초자아는 있는 것일까? 밀린다팡하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면에 있는 영혼이 우리가 여기 전당에 앉아 어떤 창문으로든 보고자 하는 대로 각각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동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고, 서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북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남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 시각으로 형상을 보듯, 그와 같이 그 내면에 있는 영혼으로 청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후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미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촉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정신으로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촉각으로 사실을 식별할 수 있습니까?”(Mil.55)
 
 
이런 자아는 있을 수 없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자아가 있다면 이는 모든 감각기관을 다 감지할 수 있는 초자아가 된다. 그러나 이 말은 모순이다. 이에 나가세나 존자는 방안의 창문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눈으로 형상을 볼 수 있다. 초자아가 있다면 눈으로 들을 수도 있고 냄새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여러 개의 창이 있는 방에서 이 창 저 창 내다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눈과 귀는 각각 감각영역이 있어서 눈으로는 형상만 보고 귀로는 소리만 듣는다.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떤 것도 관계 없이는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 어떤 것도 관계와 관계밖에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아, 영혼, 참나, 주재자, 관찰자,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이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적 관계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관계와 관계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다. 또한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면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는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와 동시에 접촉, 느낌, 지각, 의도, 심일경성(心一境性), 명근(命根), 정신활동 등 이와 같은 모든 원리들이 조건적으로 생겨납니다. 여기에 영혼은 없습니다.”(Mil.56-57) 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핵심은 조건발생이다. 조건발생을 다른 말로 연기법이라고 한다. 이는 관계와 관계에서만 발생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발생하는 것은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이다. 자아, 영혼, 참나, 주재자, 관찰자, 창조주와 같이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아침에 좌선하다가 중단한 것은
 
오늘 아침 좌선하다가 중단했다. 30분 목표에 6분 남겨 놓고 그만 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분명한 사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명색에 대한 사유를 말한다. 어쩌면 명색에 대한 통찰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사람들은 ‘내가 있다’라고 믿는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나나 창조주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오로지 명색의 과정만 있다고 믿는다.
 
행선할 때 내가 발을 움직일까? 발을 올릴 때 내가 올리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발을 올릴 줄 아는 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면 발을 올릴 줄 아는 나는 없다. 명색을 원인으로 하고, 명색을 조건으로 하는 명색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좌선할 때 의도는 볼 수 없다. 다만 배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이는 마하시 방식에 따른다. 그런데 배의 움직임은 물질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행선에서 의도가 원인이 되는 것과 달리 물질이 원인이 된다.
 
좌선할 때 평좌를 하면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다. 단지 아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배가 부풀 때 부품을 아는 마음, 배가 꺼질 때 배가 꺼짐을 아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이때 배가 부풀거나 꺼지는 것이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
 
이 세상에 다른 것 없다. 오로지 명색과정만 있을 뿐이다. 나라는 자아는 없다. 당연히 배후의 관찰자도 없다. 더 나아가 주재자도 없고 창조주도 없다. 있다면 정신적 물질적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명색이 원인이 되고 명색이 조건이 되어서 명색과정만 진행된다는 것이다. 마치 강물이 흘러 가는 것과 같다.
 
시내물이 흐를 때 똑 같은 물은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똑 같은 물로 보인다. 명색과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색과정은 강물과도 같은 것이다. 어느 한 명색도 같은 것이 없다. 마치 어느 포인트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 보았을 때 새로운 늘 새로운 물의 흐름을 보는 것과 같다.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끊임 없이 명색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에 자아나, 영혼, 관찰자, 주재자, 창조주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행선할 때는 의도가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 이는 명색에서 정신에 대한 것이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됨을 말한다. 좌선할 때는 배의 움직임이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 이는 명색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됨을 말한다.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 어떤 것이든지 명색을 원인으로 하고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끊임 없이 명색과정이 진행됨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하게 되자 좌선을 그만 두었다.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어서
 
어제 저녁 정찬주 선생과 통화했다. 정찬주 선생은 불교와 관련된 소설을 쓰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휴양림에서 귀가 중에 전화가 왔으나 받지 못했다. 어떤 일로 전화 했는지 매우 궁금했다. 저녁에 통화해 보니 어제 쓴 시에 대한 것이었다.
 
어제 휴양림에서 글을 하나 올렸다. 그제 휴양림에서 산책하면서 시상이 떠올라 시를 하나 썼는데 명색에 대한 것이다. 정찬주 선생은 시에 대하여 조언해 주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시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를 썼다. 블로그에는 수백편의 시가 있다. 이를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세 권 만들었다.
 
한때 시인이 되고자 했다. 시인이 되려면 등용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그만 두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초기경전에서 심오한 게송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시는 상징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짤막한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법구경, 수타니파타, 테라가타, 테리가타, 이띠붓따까, 우다나, 그리고 쌍윳따니까야 1권 시와 함께 편을 보면 심오하기 그지 없다. 이런 게송을 보았을 때 과연 “나는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라며 의문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에는 자칭타칭 시인이 많다. 그들은 서로가 시인이라고 불러 준다. 시 한편 볼 수 없음에도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시를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대부분 긴 문장을 잘게 나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운문이라기 보다 산문에 가까운 것도 많다. 심오한 게송과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어제 저녁 정찬주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일인지 궁금이 가득했다. 통화 할 때는 활기차고 씩씩하게 말했다. 통화하니 의외였다. 정찬주 선생은 시에 대하여 칭찬 했다. 수행에서 우러나오는 시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평소 존경하는 사람이 칭찬해 주면 우쭐하는 경향이 있다. 정찬주 선생이 칭찬해 주니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더 좋은 시가 되기 위한 조언의 말을 해 준 것이다.
 
언어의 선택에 대하여
 
정찬주 선생에 따르면 시는 상징어라고 했다. 이는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그런데 시가 설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시가 산문이 되어서는 안됨을 말한다. 그래서 설명문처럼 되어 있는 문구를 빼고 핵심만 남기라고 했다. 어떤 것인가? 본래 시는 이런 것이었다.
 
 
“저벅저벅 소리가 부서진다.
새소리가 부서진다.
물소리가 부서진다.
보는 것도 부서진다.
생각도 부서진다.
나도 부서진다.
모든 것(일체)이 부서진다 .
움직이는 물질과 아는 정신만 있다.
세상에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와
움직이는 물질과 움직임을 아는 정신만 있다.”
 
 
이 시는 산책길에서 명색의 부서짐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 대하여 정찬주 선생은 “새소리가”에서부터 “나도 부서진다”까지만 취하라고 했다. 나머지는 설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찬주 선생에게 전화가 온 것은 뜻 밖이었다.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닌 블로거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이런 것이 너무나도 과분하고 황송한 느낌이었다. 이는 아마도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정찬주 선생의 의견을 존중했다. 긴 시를 다음과 같이 줄였다.
 
 
“새 소리가 부서진다.
물 소리가 부서진다.
보는 것도 부서진다.
생각도 부서진다.
나도 부서진다.”
 
 
여기서 새소리와 물소리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소리도 물질로 본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물질의 범주에 들어간다. 보는 것도 당연히 물질에 해당된다. 그런데 물질은 부서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쌍윳따니까야 ‘찬탄의 경’(S22.55)에 따르면,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은 괴롭다.”, “물질은 실체가 없다.”, “물질은 조건지어졌다.”, “물질은 부서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몸도 부서진다. 마음도 부서지고 만다. 궁극적으로 나라는 개념도 부서진다.
 
정찬주 선생은 단어의 선택에 대해서 칭찬했다. 그것은 ‘부서진다’라는 말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상하다’, ‘무너진다’, ‘소멸한다’등의 여러 말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부서진다는 말이 가장 강력한 언어전달력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부서짐은 가장 강력한 메타포
 
부서진다는 말은 니까야에서 본 것이다. 전재성 선생이 번역한 쌍윳따니까야에서 본 것을 시어에 적용한 것이다. 어떤 것인가?  ‘박깔리의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박깔리가 있었다. 박깔리는 부처님의 삼십이상(三十二相)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부처님의 설법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남학생이 미모의 여선생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선생은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지요? 수업에 집중하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법문에 집중하지 않는 박깔리를 나무랐다. 부처님은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alaṃ, vakkali, 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라며 질책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하겠는가?”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부서져 가는 몸’은 빠알리어 ‘뿌띠까야(pūtikāy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the body which contains foul thing’의 뜻이다. 더러운 몸이라는 뜻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부서져 가는 몸”이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썩어문드러질 이 몸”이라고 번역했고, 빅쿠보디는 더러운 몸이라는 뜻을 지닌 “this foul body”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번역어의 메타포는 “부서져 가는 몸”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명색의 사라짐에 대하여 여러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부서진다’라는 말이 강렬한 메타포이다. 이전에 본 것이 있기 때문에 ‘부서진다’라는 말을 시어에 써 보았다.
 
진리는 본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비유로서 표현은 가능하다. 열반에 대하여 안전하기는 섬과 같은 것이고, 안온하기는 동굴과 같은 것이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수많은 비유가 있다. 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명색의 무너짐에 대하여 사라짐, 무너짐, 소멸 등의 여러 표현이 있지만 가장 절절이 와 닿는 말은 부서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과 마음은 계속 부서지고 있다.
 
시어가 들어간 액자를 만들고
 
정찬주 선생은 바쁜 와중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 단지 시에 대하여 조언을 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선생님이 저를 이쁘게 보아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며 활기차고 씩씩하게 말했다.
 
정찬주 선생은 올린 글에 대하여 종종 공감을 표현해 준다. 때로 댓글도 남겨 준다. 이렇게 전화를 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이쁘게 보아주는 것일까? 정찬주 선생은 좋은 시를 썼다고 칭찬하면서 액자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찬주 선생의 제안을 즉각 실행했다. 오늘 점심 때 다이소에 가서 액자를 사고 알파문구에서 문구를 인쇄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액자값 2,500원에 문구 디자인과 출력비용을 합하여 5,000원 들었다. 모두 합하여 7,500원에 액자가 뚝딱 만들어진 것이다.
 

 
 
액자의 글자체는 ‘태백산맥체’이다. 마치 붓글씨로 쓴 것 같다. 아트용지에 인쇄하니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더구나 액자에 넣으니 더 살아나는 것 같다. 내가 쓴 시를 이렇게 액자로 만들어 걸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찬주 선생이 조언을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백권당’이라는 당호도 정찬주 선생이 지어 주었다.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백권이 되었을 때 백권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준 것이다.
 
백권당이라는 당호를 받았을 때 즉각 실행에 옮겼다. 현판 업체에 제작을 부탁 했다. 한자로 백권당(百卷堂)이라는 현판을 받았을 때 사무실 출입문 바깥에 상호와 함께 걸어 놓았다. 사무실에도 이름이 생긴 것이다.
 

 
끊임 없이 흐르는 명색의 강
 
모든 것은 부서져 간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일체가 부서진다. 생각하는 것도 부서지고 심지어 나라는 개념도 부서진다. 어느 것 하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다. 명색도 부서진다.
 
명색은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생겨난다. 다른 것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조건이 되어서 새로운 몸과 마음이 생겨난다. 그런데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명색은 지금 이순간에도 부서지고 있다. 시각도 부서지고 청각도 부서진다. 느낌도 부서지고 지각도 부서진다. 부서지면 또다시 생겨난다. 명색을 원인으로, 명색을 조건으로 명색이 또다시 생겨난다. 마치 끊임 없이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이를 ‘명색의 강’이라고 해야 할까?
 
명색의 강은 흐름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명색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정신적인 과정과 물질적인 과정을 각각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여섯 단계 행선과 배의 움직임을 보는 좌선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서짐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명색을 새기다 보면 언젠가 명색이 끊길 날이 있을지 모른다.
 
 
2024-10-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