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명색새김, 담마새김, 체험새김이라는 세 종류의 싸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24. 13:06

명색새김, 담마새김, 체험새김이라는 세 종류의 싸띠
 
 
몸상태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 방금 좌선을 끝냈는데 망상속에서 보냈다.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노화에 따른 현상일까?
 
다리에 힘 있을 때 여행 다니라는 말이 있다. 몸이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한다. 몸상태가 좋지 않으면 앉아 있고 싶어도 앉아 있을 수 없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성과를 내야 한다.
 
몸상태는 마음에 영향을 준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픈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야 한다. 제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삶에 의욕이 없어진다. 수행도 할 수 없다.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늘 가르침과 함께 사는 것이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사는 것도 바람직하다.
 
요즘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재가수행자의 삶이다. 그렇다면 재가수행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하는 삶이다. 아침에 행선과 좌선하는 것은 기본이다. 또한 매일 글을 쓰는 것도 기본이다. 매일 경전이나 논서를 읽는 것도 기본이다. 하루종일 담마와 함께 하는 삶이다.
 
언어적 행위를 최소화
 
재가수행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적 행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는 일체 뉴스를 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 잘 시행되고 있다. 특히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지 않은지 3주가 되었다. 유튜브를 보지 않아도 살만하다. 유튜브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단칼에 끊어 버리자 동네가 조용해졌다.
 
정치유튜브에 푹 빠져 있었다. 작년 12월말부터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대선이후 일체 유튜브를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강서보궐선거후에 분위기가 반전되자 슬슬 보기 시작한 것이 일상이 되었다.
 
유튜브에는 갖가지 볼거리가 있다. 뉴스는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고, TV프로 또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지만 유튜브는 선택권이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편식하게 된다. 특히 정치관련 유튜브가 그렇다.
 
더 이상 정치유튜브에 놀아나지 않는다. 이편 저편 이념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보지 않는다. 정치평론가들의 세 치 혀에 녹아 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말해 지는 것들이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하여 끊임 없이 전파되는 것들이다.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정보라고 볼 수 있다.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들어도 그만이고 듣지 않아도 그만인 것도 있다. 이럴 경우 듣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남들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인다. 단지 들어서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먹방채널’에서 먹는 것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은 보아도 그만이고 보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다.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TV나 유튜브 등 갖가지 매체에서 끊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유익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쓰레기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매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귀중한 시간을 정치평론가들의 세 치 혀에 농락당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정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귀중한 시간을 알면 좋고 알지 못해도 그만인 정보에 넋을 잃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득이 없는 이념투쟁 채널에 마음 빼앗길 필요가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해야 할 것이 많다.
 
유튜브를 끊었더니
 
유튜브를 끊었더니 시간이 철철 남았다. 남은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갑자기 시간부자가 되자 삶에 여유가 생겼다. 마치 한가한 시골에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비로서 자신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시골에 살면 바쁘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일까? 언젠가 고객 가운데 경북 문경에서 ‘흙푸대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태양열을 이용한 건조기 등을 만드는 개발자이기도 하다. EBS에 나오는 것도 보았다. 그 사람 손을 봤더니 거칠고 두툼했다. 아마 끊임 없이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에 살면 일이 끊임 없다고 한다. 끊임 없이 일거리가 있는 것이다. 일거리가 없어도 일이 생긴다고 한다. 마당에 잡초가 자라면 뽑아야 하고, 담이 허물어지면 보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손마디가 굵어지고 일하는 사람 손이 된 것 같다.
 
유튜브를 끊으니 잘 보인다. 이전에는 유튜브 논객들의 주장이 머리에 차 있어서 보는 시야가 좁았다. 마치 주식을 쥐고 있을 때 시장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 털려서 한푼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제서야 시장의 흐름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요즘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마치 시골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끊임 없이 일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결과 미루어 놓았던 일들을 하게 되었다. 자료를 백업 받아 놓는 것도 해당된다.
 
고용량 유에스비 스틱을 구매해서 자료를 다운 받아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화분에 선풍기를 돌려 주는 일 등 사소하고 자잘한 일을 찾아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해도 수행만한 것이 없다.
 
스님의 수행체험기를 기대했지만
 
유튜브는 끊었지만 페이스북은 끊지 못했다. 그대신 일체 정치관련 뉴스를 전하는 사람의 계정은 끊었다. 오로지 생활 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계정이 남게 되었다. 또한 담마와 관련된 계정만 있게 되었다.
 
페이스북에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페이스북도 스님들의 놀이터가 된 것이다. 그러나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변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법을 전하려는 스님들도 있다.
 
어느 스님이 페이스북에 집중수행 다녀 온 이야기를 남겼다. 십일코스에 다녀왔다고 한다. 어떤 수행을 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수행기 올려 주시는 법보시 기대해봅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집중수행 하면 반드시 수행기를 남긴다. 이런 것도 어쩌면 드러내고자 하는 자만인지 모른다. 인정욕구가 발동된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느꼈던 것을 문자로 표현한다. 스님에게 이런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스님이 답글을 남겼다. 스님은 수행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저 지금, 여기 깨어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참으로 허탈했다. 집중수행하면서 체험한 것을 기대 했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이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법문은
 
스님들의 법문을 유심히 듣는다.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신변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경우 받아 적을 것이 없다. 왜 그럴까? 아마도 경전을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재가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생업에 바쁘다 보니 경전 읽을 시간도 없고 수행할 시간도 없다. 대부분 스님의 법문을 듣고 신행생활을 한다. 그런데 귀중한 시간에 스님의 신변이야기나 듣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허탈한 것이다.
 
법문은 가르침에 기반해야 한다. 부처님이 말한 것을 대신 전하는 것이 법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학과 교리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법문은 받아 적을 것이 없다.
 
매번 싸띠를 강조하지만
 
테라와다 가사를 두른 스님이 있다. 스님은 싸띠를 강조한다. 법문 시간 내내 싸띠만 말한다. 싸띠 하나만 가지고 한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도 남는 것이 없다. 왜 그런가? 방법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수행자이든지 싸띠를 말한다. 늘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지,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저 “싸띠해라!”, “알아차려라!”, “깨어있어라!”라고 말할 뿐이다.
 
테라와다 스님은 싸띠를 입에 달고 다닌다. 싸띠 좋은 것에 대하여 침이 마르도록 말한다. 이런 말을 듣고 있다 보면 갈증이 난다. 스님이 ‘사과맛은 사과를 먹어 보아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을 때 답답하기만 하다.
 
수행은 체험의 영역이다. 체험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 이것 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라며 책상을 탕탕친다면 마치 벙어리가 답답해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수행체험한 것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다. 본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비유를 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비유로 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열반에 대하여 안전하기는 섬과 같고, 안온하기는 동굴과도 같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좋은 예이다.
 
싸띠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안거를 행했다. 작년과 올해는 다르다. 좀더 향상되고 좀 더 성장해 가는 것 같다. 특히 수행이 경전적 지식과 결합되었을 때 나름대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싸띠(sati)이다.
 
싸띠에 대한 여러 표현이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마음챙김’이다. 그 다음으로는 ‘알아차림’이다. 여기에서는 ‘새김’이라고 말한다.
 
싸띠에 대하여 왜 새김이라고 하는가? 두 번의 안거를 통해서 이해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싸띠가 ‘기억’에 기반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는 사실이다. 싸띠의 제1의 의미는 기억(memory)이기 때문이다.
 
기억 없는 싸띠를 상상할 수 없다.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기억과는 약간 동떨어진 말이다. 특히 가르침이나 체험과 관련해서는 관련 없는 말이 된다.
 
새김(싸띠)에 대하여 세 가지로 정리한다. 명색새김, 담마새김, 체험새김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최초일지 모른다.
 
명색새김이라는 싸띠
 
첫째, 수행용어로서의 새김이다. 이를 명색새김이라고 말한다. 이는 몸관찰, 느낌관찰 등 사념처에서의 새김을 말한다. 특히 몸관찰에 주목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몸관찰 위주로 수행한다. 행선을 하는 것도 몸관찰을 하기 때문이다. 행선전통이 없는 위빠사나 수행처도 있다. 모곡센터 같은 경우이다. 오로지 좌선만 하는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이는 사대 가운데 풍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풍대는 움직이는 것, 운동성과 관련 있는 것이다. 행선을 중시하는 것도 아마 풍대를 보는 것과 관련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할 때 몸관찰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방법을 알고서 관찰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방법을 모르고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그저 “마음챙김하십시오.”라든가, “알아차리십시오.”라는 말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하시방식에서는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작년에 우안거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다. 그것은 담마와나선원에서 입재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이 “이번 안거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안거가 되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듣고 시행하게 되었다. 이번 올해 안거에서도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두 번 우안거를 지내다 보니 어렴풋이 잡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수행의 의미가 없어진다. 단지 “그저 지금, 여기 깨어있을 뿐입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위빠사나 스승은 늘 알아차림을 말한다. 마음을 보는 수행, 즉 수념처 수행으로 잘 알려진 사야도의 법문을 소개하는 글을 보아도 늘 싸띠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마하시 계통의 선원임에도 마하시 사야도가 강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고 있다. 논서‘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두 번째로 읽고 있다. 이밖에도 아리야와사법문, 담마짝까법문을 읽었다. 재작년 붓다의 날에 한국마하시선원에 갔었는데 그때 일창스님이 선물로 준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고 또 읽는다. 읽을 때마다 새겨서 읽는다. 오래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한줄한줄이 가슴에 와 닿는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머리맡에 놓고 매일 읽다 보니 다 읽게 되었다. 그 결과 수행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체계적으로 파악된 것이다.
 
수행은 머리로 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방법을 알았으니 시험해 보아야 한다. 행선과 좌선에 적용하는 것이다. 핵심방법은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행선할 때 명색을 구분해서 새길 수 있다. 발을 들 때, 발을 드는 것은 ‘움직임’에 대한 것으로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발을 들 때, 발을 들었음을 아는 ‘앎’이 있는데 이는 ‘정신적 현상’이다. 그래서 물질을 새기고 정신을 새긴다. 명색을 구분해서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배가 부풀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그런데 움직임을 아는 앎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 현상이다. 그래서 배가 부푸는 것을 새기고, 배가 부푼 것을 아는 앎을 새긴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면 제3자가 관찰하는 것 같다. 좌선할 때 통증을 새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이 통증을 관찰하듯이 명색의 과정을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보듯이, 마치 제3자가 관찰하듯이 보는 것에 대하여 명색을 구분하여 새긴다고 말한다.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물질따로, 정신따로’가 된다. 정신과 물질이 분리 되는 것이다. 이는 ‘몸따로, 마음따로’인것과 같다. 뭉쳐 있던 것이 분리 되는 것이다. 나라는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라는 개념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는 통증관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다르다. 사마타는 대상에 몰입되어 일체가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제3자가 보듯이 관찰하는 것이다. 무더기로 되어 있는 것을 분해해서 보는 것과 같다.
 
여기 멀쩡한 자전거가 있다.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해서 분해 해 놓으면 더 이상 자전거라고 말할 수 없다. 나라고 여기는 집합체를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쩌면 나라는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인지 모른다. 그 도구는 다름 아닌 싸띠이다. 어떻게 싸띠하는가?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물질따로 정신따로 새기다 보면 명색만 남게 되어 나라는 개념을 해체하게 된다.
 
담마새김이라는 싸띠
 
 
둘째, 가르침으로서의 새김이다. 이를 담마새김이라고 한다. 싸띠라 하여 반드시 수행용어만이 아님을 말한다. 싸띠라 하여 반드시 마응챙김이나 알아차림만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싸띠에 해당된다.
 
경전적 지식도 싸띠에 해당된다. 논서 읽은 것을 기억해 내는 것도 싸띠에 해당된다. 이는 싸띠라는 말이 본래 기억(memory)이라는 제1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수행에 있어서 언어적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수행처에서는 묵언해야 한다. 그러나 허용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담마에 대한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M3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수행처에서 잡담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법담은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수행들이 가르침(Dhamma)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장려 했다. 밤새도록 담마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은 앉아 있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경전적 지식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설하신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 해야 한다. 이를 빠리얏띠(pariyatti)라고 한다.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했으면 자신에게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이를 빠띠빳띠(paṭipatti)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새가 양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겸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통찰이 있게 된다. 이를 빠띠웨다(pativedha)라고 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특히 열반을 실현해야 한다. 열반이 있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한다. 그래서 열반과 사향사과에 대하여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라고 한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주석에 따르면 정법시대의 조건은“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행도상의 정법(paṭipattisaddhamma),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Smp.225)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학과 수행과 증득이 있어야 정법시대를 만족하는 것이다.
 
정법시대는 교법, 행도, 증득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 “교법은 삼장의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해당된다. 또한 행도는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을 말한다. 그리고 증득은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라고 했다.
 
아직까지 가르침이 새김이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작년과 올해 두 번의 안거를 통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교학과 교리 없는 수행, 경전적 지식이 없는 수행은 겉도는 것이 된다. 마음챙김하는 것,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전부인줄 알게 되는 것이다.
 
싸띠만 말해서는 안된다. 싸띠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명색을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그렇게 알기 위해서는 경전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경전뿐만 아니라 논서도 읽어야 한다. 그 가운데 ‘청정도론’만한 것이 없다. 최근에는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푹 빠져 있다.
 
한국불교에는 이론체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책상을 탕탕 치며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 지금 이렇게 분명하게 보여지는 이것뿐입니다.”라며 답답하듯히 말한다. 그러나 경전적 지식에 근거하여 이론체계가 확립되어 있으면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기십시오.”라고 말할지 모른다.
 
체험새김이라는 싸띠
 
셋째, 체험으로서 새김이다. 이를 체험새김이라 말한다. 왜 체험을 싸띠의 범주로 넣는가?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의 법문을 들은 바 있다. 일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버리고 기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수행에서 증득한 체험도 싸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재가우안거에서 몇 가지 체험 했다. 그렇다고 빛을 보는 것 같은 것이 아니다. 작고 소소한 것이다. 좌선할 때 다리가 저렸는데 통증에 대하여 마치 남의 다리 보듯이 본 것이다. 또한 경전이나 논서를 보고서 이해한 것도 있다. 그럼에도 체험은 강렬했다. 왜 그런가?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도 처음 경험한 것은 오래 기억이 남기 때문이다.
 
체험은 수행에서의 체험만을 말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경험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성지순례에 가서 본 것도 기억에 남을 만하다. 특히 해외성지에서 본 것이 그렇다.
 
해외에 자주 나간 것은 아니다. 성지순례 명목으로 나간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인도성지순례 갔었을 때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보름달이다. 또 하나는 미얀마성지순례 갔었을 때 쉐다곤 파고다에서의 장엄한 모습이다. 그리고 스리랑카 성지순례 갔었을 때 루완웰리세이야 대탑의 위용이다.
 

(보드가야대탑)

 
 

(쉐다곤파고다)

 
 

(루완웰리세이야 대탑)

 
 
 
성지순례 갔었을 때 강렬한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모두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런 기억을 간직하는 것도 싸띠 하는 것이다. 성지에서의 대탑도 기억에 남지만 무엇보다 신도들의 신심이다. 특히 스리랑카 사람들의 신심을 보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가능하면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남겨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성지에서의 기억이다. 아무리 위대한 자연의 경관에 경탄하지만 성지에서의 신도들의 신심을 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 보드가야대탑, 쉐다곤파고다, 루완웰리세이야 등 성소에서의 경건한 마음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와 같이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것도 싸띠에 해당된다.
 
싸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홀로 수행을 하고 있다. 스승 없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과 논서는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직접 체험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두 차례 안거를 나면서 싸띠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수행, 가르침, 체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이런 분류방법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다만 경전과 논서를 보고서 수행에 적용시켜 본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도 하나의 수행이론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싸띠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 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그냥 마음챙김하는 것입니다.”라든가, “늘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곤란하다.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 더 나아가 수행체험이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기 쉽다. 또한 경전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싸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세 가지로 구분해서 답하고자 한다.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해서 새기는 것, 그리고 수행에서 체험한 것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을 말한다. 특히 수행체험을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수행이 잘 되지 않을 때 이전에 체험했던 것을 떠올리면 힘을 받는다. 또한 수행체험은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번 체험하면 길을 알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쉽게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 방법대로 하면 이전에 체험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에 있어서 체험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발판이 된다.
 
수행할 때는 세 가지를 새겨야 한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명색을 구분해서 새겨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겨야 하고, 수행에서 체험했던 것이나 성지에서 좋았던 기억을 새기는 것이다. 명색새김, 담마새김, 체험새김, 이렇게 세 가지 싸띠가 있다는 것을 이번 안거에서 알게 되었다.
 
 
2024-10-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