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번도 같은 때가 없었다
나는 한번도 같은 때가 없었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행선하다 그만 두었고 또 좌선하다 그만 두었다. 아마도 몸 상태 때문일 것이다. 어제와 오늘 계속 한기가 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수행하기 힘들다.
우안거가 끝난지 팔일 되었다. 안거 기간 중에는 집중이 잘 된 편이었다. 마음 자세 영향도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행선과 좌선에 임했을 때 잘 견디어 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다.
학문은 젊어서 해야 한다. 서른이 되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신체와 정신 기능이 가장 왕성할 때 해 내는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능하면 한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성과를 내는 것이다.
수행의 적기는
노년수행이 어렵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나이 들면 신체기능이 하나 둘 망가져 간다. 몸이 불편하면 앉아 있기 힘들다. 그렇다면 몇 살까지 수행이 가능할까? 우 쿤달라 비왐사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20대에서 40대에 올바른 수행을 한다면, 한 달 안에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 50대에서 60대가 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시기에는 지혜를 완성하는 데 약 두 달이 걸린다. 어떤 이는 그렇게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지혜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70대를 넘어 80대가 되면, 인내심을 가지고 수행을 하더라도 분명 하게 법을 이해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수행은 어렵고 노력을 해도 성과가 없다. 늦게 수행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80세가 넘으면 수행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75-276쪽, 행복한 숲)
수행의 적기는 이십대에서 사십대이다. 오륙십대가 되면 늦은 것이다. 칠팔십대가 되면 아주 늦은 것이다. 팔십대 이상이 되면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몇 달 후가 되면 지공거사가 된다.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이 되는 것이다. 지공거사가 된다고 해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은 늘 청춘이기 때문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징후는 있다. 오늘 건강하다가도 내일 어떤 상태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 특히 그렇다. 몸상태는 이미 노인이 된 것 같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보면 좀더 젊을 때, 좀 더 건강할 때 수행하라고 한다. 그래서 “늙기 전에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유익하다. 늙으면 수행을 한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젊었을 때 수행을 해야 법의 성품을 보기 쉬움을 말한다.
불교와 인연 맺은지 오십일 년
나이가 들어 몸이 노쇠하면 앉아 있기도 힘들다.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있는데 오래 좌선하기 힘들다면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 보게 된다.
불교를 알게 된지는 오래 되었다. 중학교 때 불교학교에 들어 간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때 당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에 다녔다. 이른바 뺑뺑이로 들어간 것이다. 이런 것도 불교와의 어떤 인연이 있기 때문일까?
중학교 때 불교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불교시간에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는데 마치 흰광목천에 물감이 베이듯이 받아 들여 졌다. 이런 것도 어쩌면 전생에 불연이 있었는지 모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불교를 잊어 버렸다. 사십대가 될 때까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사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불교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삼십일 년 만에 불교에 다시 입문한 것이다. 이제 불교와 다시 인연 맺은지 이십 년이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불교와 인연 맺은지 오십일 년이 된다.
누군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지난 세월을 돌아 보면 아쉬운 것이 많다. 누군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막 살았던 것 같다. 세상의 흐름대로 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 때 나도 탐, 진, 치로 산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고자 한다. 재가우안거를 하는 등 재가수행자로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우안거를 하면서 변화된 것이 많다. 가장 큰 변화는 어떤 정보도 접하지 않는 것이다. 뉴스를 끊은 지는 몇 해 되었다. 최근에는 유튜브를 끊었다. 마치 세상과 단절하듯이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소음으로 가득한 도심에 있어도 암자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다.
철없는 늙은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은 열어 놓았다. 글을 쓰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게재하기 때문에 페이스북은 살려 놓은 것이다.
페이스북은 지식인들의 놀이터나 다름 없다. 각자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보여 준다. 어떤 이는 여행을 전문으로 한다.
그 사람은 오토바이 하나로 세계일주 한다.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었음에도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 다니면서 몇 달씩 머문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과 함께 소식을 전한다.
세계를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의 포스팅을 종종 접한다. 마치 자유로운 영혼을 보는 것 같다. 걸림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때로 방종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철없는 늙은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세계를 떠도는 방랑자는 내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다. 오늘이 최고로 행복한 날처럼 보인다.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소비만 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을 로망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정보를 접하면 다른 나라로 건너 간다. 오로지 지금 이순간을 즐기는데 충실한 사람의 삶을 보면 철없는 늙은이로 보이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자유로운 영혼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페이스북은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다. 스님들도 페이스북을 놀이터로 삼은 것 같다. 자신의 일상을 보여 주는 것에 있어서는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어느 스님은 개나 고양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 같다.
개와 같이 사는 스님이 있다. 스님이 홀로 살면서 개를 기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사진을 올리는 스님을 보면 출가자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과연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면 무어라고 말했을까?
출가수행승이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될까? 디가니까야 2번 경을 보면 “닭이나 돼지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D2.42)라는 계행이 있다. 수행자는 가축을 길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개나 고양이를 길러서도 안될 것이다.
출가수행승은 농사를 지어서도 안된다. 이는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읩니다.”(D2.42)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농사를 지으면 살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설령 농사를 짓지 않고 개나 고양기를 기른다고 해도 율장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한국의 스님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인 것 같다. 그 어떤 것이든지 서슴없이 행하는 것 같다. 동물을 키우는 것도 그렇다. 아마 율장에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말라는 항목이 있을 것이다. 없다면 새로운 계율을 만들 것이다. 지금 부처님이 계시다면 아마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말라, 키우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말씀 하실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노는 스님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행처에서 정진하는 스님들도 많다. 또한 페이스북에서 담마를 전하는 스님들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페이스북에서 노는 스님들은 속인들과 다를 바 없다.
머리를 깍았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수행승은 아니다. 도피형 출가도 있고 생계형 출가도 있다. 몸은 산중에 있지만 갖가지 정보를 접하고 있다면 도심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출가자에게서 얻을 것은 없다.
사진보다 콘텐츠로 승부하고자
매일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있다. 대체로 긴 글이다. 대부분 읽다가 지친다고 한다. 아마 끝까지 읽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매일 올리는 것은 담마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사익형이고 또 하나는 공익형이다. 사익형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공익형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공익형 사람이 되고자 한다.
세계를 방랑하는 사람의 글은 사익형이기 쉽다. 세상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으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먹방채널’에서 먹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한다. 사진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글은 지양한다. 자랑이 되기 쉬운 것이 큰 이유이다. 가능하면 경전문구를 근거로 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사진보다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 사진이나 영상을 나열하는 것은 자신의 자랑밖에 되지 않는다. 글에는 메시지가 담겨야 한다. 경전 문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무엇보다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한다. 글로 인하여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들었을 때 유익한 글이 된다.
글을 쓰다 보면 때로 불리한 것도 있다. 감추고 싶은 것, 숨기고 싶은 것도 쓰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랑할만한 것, 유리한 것을 쓴다. 그러나 진실한 글은 있는 그대로 쓴 글이다. 성찰하는 글을 보는 것은 어렵다.
허공의 번개처럼 빠른 마음 하나
어제 새벽에 읽은 글이 기억에 남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본 것이다. 이런 글을 보았을 때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이 기뻤다. 또한 공유하고 싶어 진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청정도론을 근간으로 한다. 청정도론의 게송을 해설하기도 한다. 어제 읽은 것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Adassanato āyanti, bhaggā gacchantudassanaṁ;
Vijjuppādova ākāse, uppajjanti vayanti ca.
“보이지 않게 와서
괴멸한 뒤에 보이지 않게 된다.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sm.20.72)
청정도론 20장 도비도지견청정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본의 번역이다. 찰나생찰나멸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대역이 있다. 빠알리와 일대일로 번역한 것이다. 일종의 주석적 번역 같은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한 빠알리 대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역)
“(sankhara)형성법들은 adassanato볼 수 없는 곳으로부터, 보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ayanti왔다. 즉 생겨났다.
((아직 생겨나기 전에 어느 곳에 무더기로 모여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생겨날 때도 어느 곳에서 나와 이동하여 온 것이 아니다. 그 생겨나는 바로 그 곳에서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볼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왔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자면,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전혀 성품이나 모습이나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아직 생겨나기 전의 형성들은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다. 생겨났을 때 비로소 성품이나 모습, 형체가 있어 경험하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bhagga소멸한 형성법들은 adassanṁ볼 수 없는 곳으로,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곳으로 gacchanti가 버린다.
((소멸되어 버렸을 때도 어느 곳에서 모여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소멸한 장소에서 어떠한 성품이나 모습, 형체를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 소멸해 버린다는 말이다))
akase허공의 vijjuppădo iva번개처립
uppajjanti그 이전에 전혀 없었다가 새로 생겨나서는
vayanti ca전혀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40쪽)
대역을 보면 게송에 대한 의미가 더 구체적이다. 번개가 치듯이 생겨났다고 사라져 버리는 정신성품법에 대한 것이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한번도 같은 때가 없었다
대역에서 괄호 두 개가 쳐 진 것이 있다. 주석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설명문에서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전혀 성품이나 모습이나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아직 생겨나기 전의 형성들은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다. 생겨났을 때 비로소 성품이나 모습, 형체가 있어 경험하고 볼 수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을 보고서 한참동안 오래 사유하고 숙고했다.
현재 나의 모습을 본다. 이 몸과 이 성향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다. 세월에 따라 얼굴은 늙어가고 성향도 변한 것은 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청소년기나 청년기나 장년기나 지금이나 한번 갖추어진 골격은 그대로인 것이다. 이런 모습과 성향은 이전 생에도 없었고 앞으로의 생에서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이번 생 한번뿐이다. 이런 시상이 떠올랐다.
“한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
한순간도 같은 때가 없었다
한생도 같은 일생인 때가 없었다
나는 한번도 같은 때가 없었다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얼마나 소중한 일생인가
나는 이전에도 없었고
나는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직 지금 이때만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
다시 오지 않을 때이다
부지런히 명색을 새기자
부지런히 담마를 새기자
부지런히 체험을 새기자”
종종 공원에서 산책 나온 개를 본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개는 목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개이든지 개는 모두 천박해 보인다는 것이다. 혐오감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개주인은 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일지 모른다.
사람의 눈에 개는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개라는 동물자체가 혐오를 유발한다.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개가 야생에서 자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더 이상 혐오의 감정이나 연민의 감정은 나지 않는다.
사람의 손에 길러지는 개를 볼 때마다 “어쩌다가 개로 태어났을까?”라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개가 인식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한심해 보일 것이다. 태어나 보니 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 하나 생멸하는 것에 따라
이 세상 사람들 얼굴은 모두 다 다르다. 일란성 쌍생아라고 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다른 구석이 있다. 또한 성향도 다르다. 모두 다 개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얼굴과 성향이 다른 것은 어떤 이유일까?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했다. 이전에 지은 행위(業)로 인하여 차별이 생긴 것이다. 행위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모양이나 성향 또한 제 각각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서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면 그 존재는 나와 어떤 관계일까에 대한 것이다. 예전에는 몸은 다르지만 정신만큼은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좀더 알게 됨에 따라 현재의 나와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이른바 ‘상속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없던 것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이전에 어떤 존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똑같지도 않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이는 상속개념으로 설명된다. 이와 관련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nibbattena na jāto, paccuppannena jīvati;
Cittabhaṅga mato loko, paññatti paramatthiyā,
“생겨나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고
현재 생겨남으로 생존한다.
마음이 괴멸하면 세상은 멸하니,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Vism.20.72)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본 번역이다. 마음의 생멸에 대한 것이다. 이를 확장하면 일생의 생과 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미가 심오하기 때문에 게송만 보아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대역해 놓았다.
(대역)
“anibbattena아직 생겨나지 않은 마음으로,
즉 생겨날 마음으로
na jato태어나고 있는 것, 존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paccuppannena 생겨나고 있는 현재 마음으로만
jivati생존하는 것이다.
cittabhaṅga마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loko세상이라고 부르는 중생이 mato죽는다.
(evaṁ pi)그렇지만, 즉 마음이 소멸할 때마다
중생들이 죽지만,
Paññatti ‘철수가 살아 있다’라고 불리는 상속 개념은
paramatthiya말할 때 현재 마음으로는
생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실재성품과 비슷하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37쪽)
짤막한 사구게에 이런 심오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삼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마음 하나가 생멸하는 것에 중생이 죽는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순간윤회에 대한 것이다. 매순간 태어났다가 매순간 죽는 것이다.
이 생과 저 생 사이는 무간(無間)
윤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순간윤회와 일생윤회를 말한다. 그런데 일생윤회는 순간윤회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마음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임종에서 재생까지는 무간(無間)이다. 마치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생겨나는 것처럼 빠른 것이다. 그래서 “임종 마음과 재생연결 마음도 서로 틈이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71쪽)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중유(中有), 즉 중간 존재나 영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죽어서 49일 동안 잠시 머무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에 쓰여진 것은 소설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죽음과 삶 사이에도 무간이다. 죽자마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마음 한 순간이다. 찰나지간이다.
이 생과 저 생 사이는 무간이라는 말은 놀랍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불교상식을 깨는 말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봄, 들림 등의 바로 다음에 새겨 앞이 생겨나는 것처럼, 새겨 앞의 바로 다음에 봄, 들림 등이 다시 생겨나는 것처럼 ‘죽는다’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마음 하나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새로 운 생에 태어난다’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마음 하나가 새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이전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이 사라짐과 동시에 과거 업 때문에 새로운 생에서 제일 첫 마음 하나가 생겨날 뿐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71쪽)라고 했다.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상속되는 마음
청정도론의 게송은 심오하다. 대역해 놓은 것도 심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일까 마하시 사야도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의미)
생겨날 마음 어느 하나하나도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들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겨나고 있는, 머물고 있는 마음만 분명하다. 따라서 생겨나고 있는 마음으로만 살아 있을 수 있다. 이미 생겨났던 마음도 소멸하고 사라져 버렸을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의 임종 마음처럼, 다시 생겨나지 않은 채 완전히, 철저히 소멸하고 사라지기만 할 뿐 이다. 따라서 ‘마음 하나하나가 계속해서 사라져 버릴 때마다 중생들은 죽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철수가 살아 있다. 영희가 살아있다’ 등으로 말할 수 있는 상속 개념은 항상 옳은 실재성품과 비슷하다. 무엇 때문인가? 그렇게 말할 때 마음이 계속해서 새로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37-238쪽)
이 설명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상속’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궁극적 의미에서 상속은 없다는 것이다. 이전 마음과 이후 마음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데 이를 상속으로 본다.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이전 마음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을 상속으로 본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상속은 없다는 것이다. 왜 상속이 없을까? 상속이라는 말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항상 존재한다. 언어적으로 개념 지어졌기 때문에 생멸이 없어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윤회가 없다고 말한다. 궁극적 의미에서 윤회가 없는 것은 맞는 말이다. 윤회에 대하여 상속개념으로 본다면 윤회는 없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 의미에서 윤회가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전 것을 조건으로 해서 이후 것이 생겨 났을 때 분명히 윤회는 있다. 이는 상속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상속 개념은 항상 옳은 실재성품과 비슷하다.”라고 했다. 이는 마음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 한 윤회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만약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전 마음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딱 멈추어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다시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다면 중생은 진실로 죽어 버린다.”(238쪽)라고 했다. 어떤 경우인가?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서 윤회가 끝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중생들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 특히 지옥중생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렇지만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M130)라고 했다.
나는 어쩌면 매순간 죽고 있는지 모른다. 마음 하나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죽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죽는다’라고 하는 것도 지금 새겨 아는 마음 하나하나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238쪽)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매순간이 생일이고 매순간이 죽음이다.
수행은 불사(不死)가 되기 위한 것
논서를 읽다 보면 사유와 숙고를 하게 된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인생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는 것 같다. 예로부터 청정도론을 읽고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명 받았을까?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여기에 플러스가 된다. 법의 맛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명학공원에 산책가면 볼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공원에서 사는 고양이다. 그런데 고양이의 앞 발 하나가 불구라는 것이다. 다리를 펴지 못한다. 마치 세 발로 다니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혀를 찬다.
고양이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날 것이다. 공원에서 보는 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어쩌다가 개의 태에 들어간 중생은 개로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개의 본능으로 사는 것이다. 영역표시 하는 것처럼 나무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다면 이 세상 살아가기가 축생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생을 벗어나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천상에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업이 다할 때까지 죽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살아간다. 잠시 일시적으로 행복한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괴로움의 바다에 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죽는다고 해도 업이 다하지 않는 한 또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불사가 되어야 한다.
질병이 오기 전에 빨리
수행은 불사(不死)가 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려면 좀더 젊을 때, 좀더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한다. 노년이 되면 질병으로 인하여 좌선하고 싶어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오래 앉아 있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자세를 자꾸 바꾸면 법의 성품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질병이 오기 전에 빨리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좋다.
병이 오고 나면 고통이 나를 지배하여
집중을 하기가 어렵다.
힘을 잃고 고통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더 이상 수행을 할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81쪽, 행복한 숲)
점점 늙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하루 하루가 다르다. 이럴 때 “좀 더 젊었을 때 수행했으면 좋았을걸”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더 늙기 전에 더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정진해야 한다.
2024-10-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