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 팔단계행선법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 팔단계행선법
산뜻한 토요일 아침이다. 어제 보다 컨디션은 조금 낫다. 타이레놀 한알 효과일까? 평소와 다름 없이 아침에 먹을 것을 싸가지고 배낭을 메고 나왔다. 안양7동 메가트리아 남문 입구 빠리바케트에서 정통우유식빵 한봉지를 샀다.
수행자는 늘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늘 몸상태를 살핀다. 몸이 불편하면 행선과 좌선하는데 불편이 따른다.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신체 상태에 따라 지배 받는 것이다. 육체라는 제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정신이라는 제2화살은 맞지 말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몸이 아프면 속수무책이다.
가능하면 소식한다. 가능하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가능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음식에 따라 몸상태가 달라진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몸과 마음에 직격탄을 맞는 것이나 다름 없다.
수행자는 늘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음식에 적당량을 알고 음식절제를 하는 것도 하나의 수행과정에 해당된다. 일체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
요즘 음악을 듣지 않는다. 불과 세 달 전에는 이미우이음악을 아침 저녁으로 들었다. 일터에 갈 때는 라따나숫따 음악을 듣고, 귀가할 때는 자야망갈라가타(길상승리게)를 들었다. 2008년부터 듣시 시작했으니 16년동안 매일 조석으로 들은 것이다. 그런 음악을 우안거가 시작되면서 끊어 버렸다.
혼자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음악이 친구가 되었다. 홀로 있는 사무실에서 갖가지 종류의 음악을 들었다. 흘러간 노래가 대부분이다. 7080노래라고도 볼 수 있다. 주로 일할 때 들었다.
일을 하다 보면 따분해진다. 클릭을 수천, 수만번 클릭질하다 보면 지루해진다. 이럴 때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듣는다. 눈으로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클릭질 하고 귀로는 음악이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런 세월을 십수년 살아 왔다.
음악을 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미우이음악은 제외이다. 경전에 있는 경과 게송에 대하여 현대음악으로 만들어 놓은 이미우이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신심이 나고 더 나아가 기쁨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반 음악은 심하게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이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부처님은 음악 듣는 것을 금했다. 어느 정도인가?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 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A3.103)라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수행의 삶을 사는 자에게 세속사람들의 노래는 하나의 울부짖음으로 들리는 것이다.
유명관광지에 가면 축제가 있다. 노래자랑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흐느끼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울부짖는 것 같다. 더구나 춤과 함께 노래하는 것을 보면 삶의 일탈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A3.103)라고 했다.
진흙속의 연꽃처럼
세상에는 세상사람들이 가는 길이 있다. 모두 다 그 길로 가기 때문에 그 길이 바른 길인 줄 안다. 그러나 수행자는 세상사람들과 반대로 간다. 세상사람들이 가는 길을 거슬러 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항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모두 다 한방향으로 길을 간다. 그런데 어떤 이는 흐름을 거슬러 간다. 그러다 보면 어깨가 부딪치고 때로 넘어질지 모른다. 세상사람들이 탐, 진, 치라는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 갈 때 수행자는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가기 때문에 흐름에 대한 저항이 없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는 세상 속에서 산다. 세상을 떠나서 산속에 홀로 산다고 해도 결국 세상 속에서 사는 것과 다름 없다. 마을로 가서 탁발하면 세상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 이는 “청련화, 홍련화,백련화가 물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 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는 비유가 잘 말해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고 했다. 진흙속의 연꽃처럼 사는 것이다.
웃을 일이 있을 때는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음악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불교음악이라도 듣지 않는다. 하물며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은 말할 것도 없다. 노래방에 가서 춤추고 노래하는 일도 없다. 수행자의 삶과 가까워 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음주가무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수행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것은 허물이다. 사진은 어떠할까? 미얀마 사야도의 사진을 보면 거의 대부분 입을 다문 근엄한 모습이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모습의 사진은 보기 힘들다.
춤추는 스님이 있다. 노래하는 스님도 있다. 그림 그리는 스님도 있다. 차를 즐기는 차스님도 있다. 사찰음식을 만드는 쉐프스님도 있다.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면 무어라고 할까? 아마 ‘악작죄(dukkaṭa)’가 된다고 할 것이다.
수행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수행자는 노래를 불로서도 안되고 음악을 들어서도 안된다. 감성을 자극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감성은 해탈과 열반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웃을 일이 있을 때는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행선할 때 머리 글자만 따서 명칭붙였더니
오늘은 어제 보다 조금 더 나은 컨디션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몸상태가 회복된 것은 아니다. 행선과 좌선할 때 알 수 있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각각 삼십분씩 했다. 날씨가 추워져서 영향을 주었다. 특히 행선할 때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오래 할 수 없었다. 이제 바닥에 매트라도 깔아야 할 것 같다. 온풍기라도 설치해야 할 것 같다.
무엇이든지 매일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늘어난다. 행선도 그렇다. 매일 삼십분씩 하다 보면 요령도 생긴다. 오늘은 ‘명칭붙이기’에 있어서 하나의 방법을 발견했다.
행선을 처음 시작할 때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명칭 붙이면 효과적이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에서 마음으로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어떻게 붙이는가? 이는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름”이라고 명칭 붙이는 것이다.
육단계 행선에서 명칭 붙일 때 명칭이 너무 길다. 발을 떼는 사이에 발이 벌써 들려 있다. 두 자리 수, 세 자리 수 명칭이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아침 행선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머리글자만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름”에 대하여 “떼”, “들”, “밀”, “내”, “딛”, “누”라고 한글자 명칭만 붙인 것이다.
“들”, “밀”, “내”, “딛”, “누”라고
떼, 들, 밀, 내, 딛, 누, 이렇게 명칭을 붙이자 발의 속도를 따라 가는 것 같았다. 특히 발을 내리고, 딛고, 누르는 세 단계 과정은 매우 빨리 진행 되는데, 이때 “내, 딛, 누”라고 세 글자 명칭을 붙이면 따라 잡는다.
행선할 때 명칭 붙이면 여러 이점이 있다. 집중하기 쉬운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행선, 즉 걷는 수행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삼매는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삼매가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여섯 단계로 발을 움직이고 여기에다 명칭을 지속적으로 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집중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 행선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방법을 알았으면 계속 적용해야 한다. 육단계 행선에서 “떼”, “들”, “밀”, “내”, “딛”, “누”라고 한글자 명칭만 붙이자 이전 보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밀 때, 즉 이동할 때 다른 동작 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밀을 세 번 하는 것이다. 미는 시간, 즉 이동하는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에 세 번 “밀”, “밀”, “밀”하면 육단계 행선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라고 명칭 붙여 보았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된다면 육단계가 아니라 팔단계 행선이 된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행선을 하면서 나름대로 발견한 것이 몇 개 있다. 명칭붙이기는 기본이다. 눈을 감고 하는 행선도 발견한 것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집중이 훨씬 더 잘 된다. 발을 이동하는 것에 대하여 발모양이나 이미지를 보지 않고 단지 움직임만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발이 보이지 않는다. 발모양은 빤냣띠(개념)이기 때문에 빠라맛타(실재)를 보는데 방해가 된다. 발을 들 때의 경쾌함,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 발을 디딜 때의 딱딱함과 차가움 같은 실재는 발모양을 보지 않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다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눈을 뜨고 한다. 이는 행선에서 집중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을 이동할 때 새김이 좋다. 마치 발에 붙어 가는 것 같다.
여섯 단계 행선에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있다. 발을 밀 때 시간이 걸린다. 이때 마치 미끄럼틀 타는 것처럼 스무스하다. 바닥을 떠서 걷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 위에서 걷는 기분이다. 이는 발모양이라는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케이트 타듯이 행선하는 것도
처음 행선을 하면 비틀거린다. 백권당 행선대의 경우 폭이 고작 75센티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비틀 거라면 벽에 닿고 칸막이에 닿는다. 이를 방지하려면 고정된 다리에 힘을 실어야 한다. 마치 스케이트 타듯이 몸을 기울여 한쪽 다리에 힘을 실어서 체중을 지탱하는 것이다.
스케이트 타듯이 행선하면 자세가 안정된다. 처음 행선을 시작할 때 유효하다. 그러나 삼매가 형성되면 저절로 새김이 있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 행선을 자주 하다 보니 발견한 것이다.
서 있을 때는 눈, 입, 배, 발바닥을
행선은 몸관찰 네 가지 행동양식 가운데 행(行)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행선을 하다 보면 앉는 것(座)만 눕는 것(臥)을 제외하고 걷는 것(行), 서 있는 것(住),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있다. 여기서 방향전환은 행의 범주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행선은 크게 걷는 것, 서 있는 것, 방향전환 이렇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걷는 것에만 신경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서 있는 것과 전환하는 것도 수행이다.
서 있을 때 어떻게 서 있어야 할까? 위빠사나 스승은 전신을 스캔하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나누어서 보았다. 전신스캔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 코, 입, 배, 무릎, 발바닥, 이렇게 여섯 군데를 구분해서 마음을 두었다.
마음은 형태가 없다. 마음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어디에든 내려 앉는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법구경 마음의 품에서는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이런 마음은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은 내마음이 아니다. 내마음 같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내마음이라 할 수 없다. 이런 마음은 다스려야 하고 제어해야 한다. 행선에서 서 있을 때도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마음을 신체의 일부분에 두는 것이다.
서 있을 때는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이 주욱 훑어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편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신체의 특정 부위에 마음을 가 있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 코, 입, 배, 무릎, 발바닥, 이렇게 여섯 군데를 대상으로 했지만 나중에는 눈, 입, 배, 발바닥, 이렇게 네 부위로 줄였다.
기수행하듯이 전신을 스캔 해 보았더니
오늘 행선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서 있을 때 눈, 입, 배, 발바닥에 마음을 두고서 눈의 촉촉함, 입의 맞닿음, 배의 부품과 꺼짐, 발바닥의 딱딱함과 차가움과 같은 실재를 보았으나 전신을 한번 스캔 해 보기로 했다.
전신을 어떻게 스캔 해야 할까? 작년 ‘기수련’ 받을 때 일이 생각났다.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기를 훑어 내리게 하듯이 전신을 스캔해 보는 것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훑어 내리는 것이다.
전신스캔 시작은 코에서 시작했다. 호흡이 있기 때문이다. 코에서부터 입으로, 입에서 목으로, 목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장딴지로, 장딴지에서 발바닥으로 내렸다. 마치 기를 순환시켜 내리듯이 주욱 훑어 내린 것이다.
수행은 체험에 크게 의존한다. 수행 중에 체험이 있었을 때 그것을 일종의 이정표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한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 중에 있었던 체험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체험을 한 바 있다. 기가 몸에서 순환 되었을 때 팔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팔이 저절로 들렸다가 내려 오고 또 다른 팔이 올라갔다가 내려 오는 것이었다. 두 팔이 다 올라간 때도 있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하여 기를 지도하는 사람은 “자발공이 터졌다.”라고 말했다.
서 있을 때 가만 있으면 안된다. 마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대개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이런 마음은 제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행선하다 서 있을 때는 몸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라고 말한다.
스캔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럴 때 편법으로 눈, 입, 배, 발바닥과 같은 특정 신체부위를 보고자 했다. 마음이 달아나지 않도록 붙들어 매두기 위한 것이다. 이런 방법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서 있는 수행을 잘 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 본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서 있을 때 전신을 스캔해 보았다. 마치 기수련 했을 때 기를 몰고 가듯이 아래로 주욱 훑어 내려 본 것이다. 어느 정도 느낌은 있었다. 특히 목에서부터 가슴, 윗배, 아랫배,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바닥으로 내릴 때 약간의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가능성만 보았다. 매일매일 시행해 본다면 아마 전신스캔이 가능할 것 같아 보였다.
글은 그만 쓰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라는데
우언거는 끝났다. 안거는 끝났지만 안거 때처럼 살고 있다. 오전은 오로지 수행만 한다. 이렇게 수행기를 쓰는 것도 수행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기는 것도 담마새김으로 보아 수행범주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
어떤 스님이 충고 해 주었다. 이제 글은 그만 쓰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나이가 듦에 따라 건강상태가 예전만 못한 것을 한탄하는 글을 올리자 애정어린 충고를 한 것이다.
스님의 조언에 감사를 표했다. 또한 유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글쓰기는 멈출 수 없다. 마치 매일 밥 먹듯이 지난 18년동안 매일 써 온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도 행선하는 것이나 좌선하는 것 못지 않게 훌륭한 수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정찬주 선생이 있다. 늘 격려해 주시는 멘토나 다름 없다. 정찬주 선생은 글쓰기도 수행이라고 했다. 주로 불교소설을 쓰는 작가는 글 쓰는 것이 수행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이나 논서를 근거로 해서 글쓰기 하는 것도 훌륭한 수행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수행은 반드시 좌선만을 말하지 않는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좌선 못지 않게 행선도 중시한다. 선원시간표를 보면 짝수시간에는 좌선을 하고 홀수시간에는 행선을 하도록 되어 있다. 글쓰기가 이제 생활화된 재가수행자는 글쓰기 하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다.
교학은 정법시대 조건 가운데 하나
글쓰기는 교학을 익히고 배우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불교수행에 있어서 왜 교학이 중요한가? 이는 교학이 정법시대의 조건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정법시대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이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출현한다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새는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다. 새는 양날개로 하여 하늘 높이 멀리 날아간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교학과 실천이라는 양날개로 하려 통찰과 증득이 있게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 하는 빠리얏띠(pariyatti), 바르게 이해한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빠띠빳띠(patipatti)가 있으면 통찰이라는 빠띠웨다(pativedha)가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와 수행을 병행하고자
법상에 오른 스님이 있다. 스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려 왔다. 이를 어떤 이는 ‘양구’하는 것이라 말한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비유로서는 설명가능 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으로 설해 놓았다. 제자들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법문과 주석을 바탕으로 해서 논서도 만들어졌다.
정법시대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는 빠알리삼장이다. 율서와 경서와 논서, 이렇게 세 종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빠알리삼장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청정도론과 같은 수행지침서는 마치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매일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는다. 현재 머리맡에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있다. 두 번째 읽고 있다. 이 논서를 읽고서 방향을 잡게 되었다. 이 방법대로만 하면 하면 길이 보인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는 이유도 된다.
한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수행해야 한다.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한다. 질병이 찾아 오면 수행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이런 것을 안타깝게 여긴 스님은 지금 당장 글쓰기를 멈추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한다. 그러나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글쓰는 것도 수행으로 본다. 글쓰기와 수행을 병행하고자 한다.
2024-10-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