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분할(時分割)로 움직임을 관찰하면
시분할(時分割)로 움직임을 관찰하면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주식시장에서 다 털리고 났을 때 시장을 보는 안목이 생긴다. 일체 뉴스를 접하지 않고 유튜브 마저 끊으니 내가 얼마나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홀로 있다 보니 사람 만날 일 없다. 모임 있는 날을 제외하고 사람 하고 이야기할 일이 없다. 그런데 시비를 걸어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글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다
어떤 이가 염려하는 카톡을 보냈다. 만나서 정정당당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피하는 모습, 도망가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어리석은 자와는 상대하지 않으려 합니다.”라며 짤막하게 답신을 남겼다.
도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법구경에서는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다고 했다. 어떤 자가 어리석은 자인가? 주석에 따르면 열 가지로 설명된다. 이는 1)단행의 계행, 2)중행의 계행, 3)장행의 계행, 4)열 가지 대화의 주제, 5)열세 가지 두타행, 6)통찰의 지혜, 7)네 가지 길(道), 8)네 가지 경지(果), 9)세 가지 명지, 10)여섯 가지 곧바른 앎이 없는 자가 어리석은 자이다.
세상에 열 가지를 갖춘 친구가 있을까? 있다면 성자의 흐름 이상에 든 자일 것이다. 이는 “네 가지 길(道)”과 “네 가지 경지(果)”를 갖춘 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 이런 친구가 있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 가야 한다.
왜 어리석은 자를 사귀어서는 안되는가? 자기 보다 못한 자와 함께 길을 가면 계행, 삼매, 지혜가 퇴락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보다 낫거나 동등한 자와 길을 가면 계행, 삼매, 지혜가 성장한다.
도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면 안된다. 왜 그런가? 주석에서는 “그러한 사람은 연민과 애민의 대상으로 삼을 지언정, 사귀지 말고 가까이 하지 말고 섬기지도 말아야 한다.”(DhpA.II.24)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라고 하여 배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 하면 안된다. 말을 걸어도 안된다. 함께 어울리면 안되는 것이다. 이는 도의 길을 가는 관점에서 그렀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의 길을 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말을 걸어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배척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석에서는 “ ‘그는 나로 인해서 계행, 삼매, 지혜를 성장시킬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도울 수 있다.”(DhpA.II.24)라고 했다.
도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나보다 나은 자, 또는 나와 동등한 자와 길을 함께 가야 한다. 그래야 계, 정, 혜에 있어서 향상과 성장이 있다. 그러나 나보다 못한 자와 길을 함께 가면 계, 정, 혜에 있어서 퇴락이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나 보다 못한 자를 배척해서는 안된다. 배움을 갈망한다면 도와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를 해치려 한다면, 나를 중상모략하려 한다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체조끼를 입은 남녀의 무리가 대오를 형성하여
오늘 아침 6시 37분에 아파트 동 현관을 나섰다. 해가 짧아 졌다. 이제 어둠이 걷히고 세상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다. 옷을 단단히 입었다. 몸이 아직도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겹 껴 입었다. 배낭에는 백권당에서 먹을 것이 있다.
일요일 아침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오전 여섯 시 대의 아침은 쉬는 시간일 것이다. 일주일동안의 피곤에 지친 자들이 늦잠 자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인사업자이자, 블로거이자, 재가수행자인 보통불자는 오늘도 아침 일찍 길을 간다.
일요일 이른 아침 안양천에 활기가 넘친다. 생태하천으로 변한 안양천변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의 무리들이 마라톤을 한다. 단체조끼를 입은 남녀의 무리가 대오를 형성하여 달린다.
산중의 암자나 다름 없는 백권당
일요일 아침에도 쉬지 않는다. 이는 갈 데가 있기 때문이다. 눈만 뜨면 갈 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비용이 든다. 하루에 이만원 들어 가는 것이다. 2007년 이후 17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아지트에 도착했다. 일인사업자에게 일감이 있으면 일하는 일터가 된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면 글쓰는 공간이 된다. 행선대에서 행선을 하고 금강좌에서 좌선을 하면 개인수행처가 된다.
백권당은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다. 도심에 있어도 뉴스를 보지 않고 유튜브도 끊었기 때문에 산중의 암자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하루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양말 신고 행선 해 보았더니
오늘 아침 행선을 30분하고 좌선을 50분 했다. 우안거의 연장선상에 있다. 매일 이렇게 살고자 한다. 행선과 좌선이 끝나면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오전이 다 지나간다.
하루일과 가운데 오전은 수행시간이다. 글 쓰는 것도 수행이다. 글 쓰는 것은 교학에 대한 것이다. 담마를 새기는 것도 수행인 것이다. 교학과 실천이 있어야 통찰이 있게 된다.
날씨가 추워졌다. 행선할 때 맨발로 행선하기가 부담스럽다. 오늘 처음으로 양말 신고 행선 해 보았다.
행선은 맨발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발 신고 행선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발바닥 감촉을 느끼지 못하여 행선의 맛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양말 신고 하면 어떨까? 역시 감각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행선대 바닥은 차갑다. 요즘 같은 날씨에 맨발로 행선하다 보면 발바닥이 시려서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양말신고 행선 했더니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양말신고도 행선할 만하다. 행선대 바닥에 카페트 깔 것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만 두었다. 양말신고도 얼마든지 행선이 가능한 것이다.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명칭붙이기
위빠사나수행자에게 행선은 좌선 못지 않게 중요하다. 중요도를 따진다면 일대일이 될 것이다. 그만큼 행선에서 얻는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빠사나 1단계부터 3단계 지혜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행선할 때 어제 발견한 명칭붙이기를 적용해 보았다. 이는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에 대한 것이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동작에서 밀 때만 두 번 추가한 것이다. 밀 떼, 즉 이동할 때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여덟 단계 행선이 된다.
여기 운동선수가 있다. 운동하는 사람은 매번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프로야구 선수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번 배트를 휘두를 것이다. 축구선수는 하루에도 수십번 골문에 볼을 찰 것이다.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똑 같은 동작을 수십, 수백, 수천, 수만번 반복해야 한다. 위빠사나수행자도 똑 같은 동작을 수십, 수백, 수천, 수만번 반복해야 할 것이다. 행선할 때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라며 명칭을 붙여 일없이 반복해야 한다.
실재성품을 보면 나라는 개념은 사라져
무엇이든지 반복하다 보면 집중이 된다. 이를 다른 말로 삼매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행선할 때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라며 명칭을 붙여 수번, 수십번 반복하다 보면 삼매가 형성되지 않을 수 없다.
삼매가 형성되면 나는 사라진다. 행선을 하다 보면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나는 사라지고 명색과정만 남은 것이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행선을 하다 보면 실재성품을 보기 때문이다.
행선할 때 모양이나 이미지를 보면 안된다. 행선할 때 발모양을 떠올리면 안되는 것이다. 여기서 발모양은 빤냣띠, 즉 언어적 개념에 따른 형성이다. 발모양은 언어적 개념일 뿐 실재성품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성품인가?
위빠사나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어떤 실재를 말하는가? 언어적 개념이 배재된 것이다. 발을 들 때의 경쾌함, 발을 밀 때의 미끄러움,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 발을 딛고 누를 때의 차가움과 딱딱함 같은 것이다.
팔단계 행선 할 때 움직임만 본다. 발모양은 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만을 새겼을 때 나를 잊어 버린다. 나라는 빤냣띠, 나라는 개념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실재성품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성품을 보면 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전신을 스캔해야 할까?
행선을 하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한다. 서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향전환하기 전에 잠시 서 있는데 이때 해야 할 일이 있다. 전신을 스캔하는 것이다.
전신스캔하는 것도 방법이 있을까? 위빠사나 스승은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라고 한다.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서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럽다. 서 있는 것도 몸관찰에 있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 가운데 하나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보기 힘들다. 단지 전신을 스캔하라고만 말한다.
어떻게 전신을 스캔해야 할까? 나름대로 방법을 발견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는 것은 이상론이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명칭을 붙여 보기로 했다.
위빠사나수행에서 명칭을 붙이면 집중이 잘 된다. 서 있을 때 눈부터 발끝까지 명칭을 붙여 보았다. 어쩌면 나만의 방식인지 모른다. 이는 “1)눈 촉촉, 2)코 바람, 3)입 다뭄, 4)가슴 벌렁, 5)배 불룩, 6)골반 훵훵, 7)허벅지 뻐근, 8)장딴지 뻣뻣, 9)발바닥 딱딱”이는 아홉 단계 명칭이다.
전신을 스캔한다고 하여 마치 모래시계 내려 가는 것처럼, 마치 데이터 전송하는 것처럼 할 수 없다. 만약 몸의 모양이나 이미지를 떠올려서 스캔한다면 이는 빤냣띠, 즉 개념이 된다. 실재를 볼 수 없다.
서 있을 때 실재를 보려면 실재로 느낀 것을 보아야 한다. 눈의 경우 감은 눈에서 촉촉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눈 촉촉”이라고 했다. 코의 경우 바람이 나온다고 해서 “코 바람”이라고 했다. 입은 두 입술이 닿은 느낌으로 “입 다뭄”이라고 했다. 마음이 가슴으로 가면 벌렁거림을 알 수 있어서 “가슴 벌렁”라고 했다. 마음이 배로 가면 부품과 꺼짐이 있는데 이를 “배 불룩”이라고 했다. 마음이 골반사이를 지나면 왠지 공허한 느낌이어서 “골반 훵훵”이라고 했다. 마음이 허벅지로 가면 뻐근한 느낌이어서 “허벅지 뻐근”이라고 했다. 마음이 장딴지로 가면 뻣뻣한 느낌이어서 “장딴지 뻐근”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발바닥에 이르면 바닥의 딱딱한 감촉을 느끼기 때문에 “발바닥 딱딱”이라고 했다.
서 있을 때 아홉 단계 명칭을 붙여 보았다. 이런 방식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행하다 보니 이런 방식이 나에게 가장 적합할 것으로 보였다. 모양으로 보지 않고, 즉 눈이나 코와 같은 개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촉촉함, 바람 감촉, 맞닿음 감촉, 벌렁임, 불룩거림, 훵훵한 느낌, 뻐근함, 뻣뻣함, 딱딱함은 실재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여섯 번 고요와 평화와 밝음을 보았지만
행선을 끝내고 금강좌에 앉았다. 오늘도 부처님처럼 보리수 아래 금강좌 앉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앉을 때마다 내가 거룩한 자가 되는 것 같다.
누구든지 금강좌에 앉는 순간 거룩한 자가 된다. 자신이 앉는 자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자리이다. 이 자리에 앉으면 다른 세계에 가 있게 된다. 이 작은 몸안에서 세계를 볼 수 있고 또한 세계의 끝에 다다를 수 있다.
오늘 좌선에서 여섯 번 고요와 평화와 밝음을 맛 보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섯 번 고요와 평화와 밝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마치 맑은 날이 오래 계속되지 않는 것과 같다.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청명한 날은 삼일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점차 구름이 끼여 흐려지다가 비가 내린다. 좌선 중에 일시적으로 고요와 평화와 밝음이 있지만 점차 흐려진다. 이러기를 여섯 차례 반복했다.
일시적으로 고요, 평화, 밝음이 있게 되면 명상하는 맛을 알게 된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어진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은 이런 상태를 즐기지 말라고 했다. 주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라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왜 배를 보라고 할까?
좌선할 때 집중을 필요로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집중하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부푼다, 꺼진다”라며 동사형명칭을 붙이라고 했다.
오늘 좌선하면서 동사형명칭을 붙이는 의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찰나현재법’과 관련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 4단계 ‘생멸의 지혜’에서 ‘강력한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처음 좌선을 할 때 명칭 붙여서 한다. 대개 호흡, 즉 들숨과 날숨을 새긴다. 그러나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에 집중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왜 배를 보라고 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근본적은 요인은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새겼을 때 확실한 몸관찰이 되는 것이다. 이는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명상할 때 대부분 호흡을 본다. 그런데 들숨날숨 그 자체만 본다면 이는 사마타수행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코에서 나오는 바람이나 촉촉함 감촉을 새긴다면 이는 위빠사나가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호흡과 반대로 작동된다. 들숨일 때 배가 부풀고 날숨일 때 배가 꺼지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 배를 보라는 것은 철저히 몸관찰에 대한 것이고 또한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이말은 빤냣띠라는 개념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찰나삼매와 관련된 동사형 명칭붙이기
머리맡에는 논서가 있다. 요즘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두 번째로 읽는다. 최근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좌선할 때 ‘동사형명칭붙이기’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위빠사나선원에서는 복부를 새길 때 아마 대부분 “부품, 꺼짐”이라며 명사형 명칭 붙이기를 할 것이다. 호흡이라면 “들숨, 날숨”이라며 역시 명사형명칭붙이기 할 것이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4단계인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을 보았을 때 동사형명칭붙이기에 대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찰나삼매’와 관련 있는 것이다.
찰나삼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접하고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위빠사는 움직이는 대상, 즉 변화하는 대상을을 새기는 것이기 때문에 순간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찰나삼매에 대하여 수많은 글을 썼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서는 “그것은 어떠한 몰입삼매(appanā samādhi)의 근처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근접삼매는 아니라는 사실, 진짜 근접삼매와 장애가 사라진 모습이나 마음이 집중된 모습으로 서로 같기 때문에 동질비유(sadisūpacā)로 근접삼매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위숫디막가 마하띠까’에 설명해 놓았습니다(Pm. 1436). 그것을 위빳사나로 말하자면 ‘위빳사나 찰나삼매(vipassanā khanika samādhi)’라고 부릅니다.”(담마짝까법문, 191쪽)라고 설명해 놓았다.
찰나삼매라는 말은 빠알리어 ‘카니까 사마디(khanika samādhi)’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카니까는 영어로 ‘momentary; temporary; changeable’의 뜻이다. 일시적인, 순간적인, 변화되는 뜻을 가진 말이다.
찰나삼매는 선정삼매와 다른 것이다. 또한 선정삼매 이전에 형성되는 근접삼매와도 다른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표상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명상과 달리 위빠사나명상은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간 포착해야 한다.
찰나삼매라고 해서 집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순간에 집중 했을 때 근접삼매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이와 같은 위빠사나 찰나삼매에 대하여 “그 근접삼매도 장애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초선정과 같습니다.”(담마짝까법문, 199쪽)라고 했다. 찰나삼매가 초선정과 같은 상태라는 것이 놀랍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을 새길 때 동사형명칭을 붙인다. 그래서 “부푼다, 꺼진다”라고 계속 새기는 것이다. 이는 “부품, 꺼짐”이라고 명사형명칭 붙이는 것과 매우 대조된다.
마하시 전통에서 동사형명칭을 붙이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는 배가 부풀 때 부품 한단계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가 부풀 때는 여러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품”이라고 한번으로 끝나는 명사형명칭보다는 여러 단계의 부품이 있기 때문에 “부푼다”라는 동사형명칭을 붙이는 것으로 본다.
찰나삼매와 생멸의 지혜단계
동사형명칭붙이기는 ‘생멸의 지혜’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다. 위빠사나수행자가 생멸의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좀더 강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는 좀더 나누어 볼 수 있는 강한 집중이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순간포착’하듯이 집중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른바 ‘찰나삼매’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위빠사나수행자에게 하나의 큰 고비가 있는데 4단계인 생멸의 단계가 가장 크다고 말한다. 이 단계를 넘지 못하면 다음 단계가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찰나삼매 상태가 되어야 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멸의 지혜가 성숙하고 예리해졌을 때는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오는 여러 움직임들의 모임이 여러 단계로 많이 생겨나면서 분명하다. 그러한 작은 움직임들은 “ ‘마치 물 표면 위에 작은 빗방울들이 계속 해서 떨어질 때마다, 생겨나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 작은 물방 울들처럼’ 한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으로, 한 단계가 다음 단계로 이르지 못한 채 바로 그 순간에서만 ‘획, 획’하며 생겨나서 사라져 버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60쪽)
이 문구를 보고 동사형명칭붙이기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배가 부풀 때 “부푼다”라며 동사형명칭을 붙이는 것은 여러 단계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는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에 대한 새김이기 때문에 순간집중 또는 찰나삼매가 요구된다.
삼매는 오실로스코프 같은 도구
오늘 좌선 중에 이런 사유가 일어났다. 삼매라는 것은 물질과 정신의 성품법을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마치 실험실에 있는 현미경 같은 것이다.
현미경이 있으면 아주 작은 것도 크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삼매가 형성되면 미세한 것도 볼 수 있다. 배가 부풀 때 여러 단계로 부푸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요구될 것이다.
찰나삼매는 마치 실험실의 현미경 같은 것이다. 작고 미세한 것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전자제품 개발 경험이 있는 자는 삼매에 대하여 마치 오실로스코프(osciloscope)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실로스코프는 매우 친숙하다. 직장생활 할 때 이십년 동안 쓰던 것이기 때문이다. 주파수를 볼 때 사용하는 계측기기이다. 이 오실로스코프 한대만 있으면 전자제품을 개발해 낼 수 있다.
오실로스코프 특징은 시분할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나누고 또 나누어서 보는 것이다. 일종의 시간을 늘려서 보는 기능을 말한다. 이는 주파수와 관련이 있다.
시분할(時分割)로 움직임을 관찰하면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오랜 세월 전자제품을 개발했다. 오실로스코프 앞에 앉아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 기기를 이용하면 감추어진 주파수를 볼 수 있다.
시간과 주파수와 관계는 ‘t=1/f’라는 등식으로 되어 있다. 역비례의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시분할하면, 즉 시간으로 나누고 또 나누면 보이지 않던 변조된 것을 사인(sine)파 형태로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대상을 분명하게 보려면 시분할해야 한다.
명상에서 삼매는 깊이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와도 같은 것이다. 특히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을 새길 때 고도의 순간 집중을 요구하는데 이를 찰나삼매라고 한다.
찰나삼매에 대하여 실험실의 현미경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개발한 경험인 있는 사람이 말한다면 찰나삼매는 오실로스코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시분할이 가능한 기기인 것이 큰 이유이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을 보려면 순간집중을 해야 한다. 찰나삼매가 일어나지 않으면 생멸의 지혜에 이를 수 없다.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4단계인 생멸의 지혜 단계를 가장 넘기 어려운 산으로 말하고 있다.
갈수록 태산
매일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그날그날 몸상태에 따라 다르다. 어떤 날은 집중이 잘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집중이 되지 않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체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행에서 체험한 것은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발판이 되기도 한다. 한번 경험한 것을 등불로 삼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다 보면 또 다른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갈수록 태산인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수행자에게 훌륭한 수행지침서나 다름 없다. 궁극적으로는 스승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기 까지는 지침서는 유용한 것이다.
생멸의 지혜 고개를 넘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다. 이는 찰나삼매와 관련이 있다. 어떻게 해야 찰나삼매를 계발할 수 있을까? 마치 오실로스코프 들여다 보듯이,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시분할 하여 살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24-10-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