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수행자는 철저하게 분별론자가 되어야
위빠사나 수행자는 철저하게 분별론자가 되어야
현재시각 오전 8시 28분, 막 좌선을 끝내고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오늘은 어제 보다 컨디션이 더 낫다. 밤에 잘 때 전기찜질매트를 사용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옷을 잔뜩 끼여 입고 온열기까지 가동해 놓았다.
오늘 행선은 20여분 했다. 좌선은 30분 했다. 매일 밥 먹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의 일상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행선하는 재미
행선에서는 어제와 그제 발견한 행선법을 연습했다. 서 있을 때 전신을 스캔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눈 촉촉, 코 바람, 입 다뭄, 가슴 벌렁, 배 불룩, 골반 훵훵, 허벅지 뻐근, 장딴지 뻣뻣, 발바닥 딱딱” 이라며 명칭 붙여 한 것이다.
행선과 좌선은 명칭 붙여서 행하면 효과적이다. 초기에 명칭 붙이면 집중을 유도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명칭 붙이지 않아도 된다. 이쯤 되면 이 세상에는 명색만 남게 된다. 수행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재미로 산다. 재미를 추구하는 삶이다. 재미 없는 삶은 괴로울 것이다. 나이 든 어르신이 ‘사는 재미가 없다’라고 말할 때 쓸쓸함과 허망함을 본다.
수행자도 재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부에서 재미를 찾을 때 수행자는 내면에서 찾는다.
행선할 때는 육단계로 한다. 요즘은 팔단계로 늘었다. 이는 “떼, 들, 밀, 밀, 밀, 내, 딛, 누”라는 여덟 단계를 말한다. 떼고, 들고, 밀고, 밀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덟 단계를 말한다.
여덟 단계 행선을 하면 자신을 잊어 버린다. 오로지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세상의 근심, 걱정, 슬픔은 없다. 오로지 명색의 과정만 있을 때 나라는 개념은 자리 잡을 수 없다. 내가 없으니 근심, 걱정,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금강좌(金剛座)
행선이 끝나면 자리에 앉는다. 나의 금강좌(金剛座)에 앉는 것이다. 금강좌에 앉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다.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 고요와 평화와 밝음이 찾아 올 때 여기가 극락이고 여기가 천상이다.
좌선하면서 이런 찰나삼매에 대한 사유를 해보았다. 생멸의 지혜 단계에 이르려면 찰나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보일까?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고도의 집중을 하는 수밖에 없다.
명상에서 삼매가 있어야 지혜가 생겨난다.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삼매와 지혜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분명히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다. 지혜와 선정은 항상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좌선 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배가 부풀 때 “부푼다”라며 동사형명칭을 붙인다. 명사형이 아닌 동사형명칭을 붙이는 것은 부푸는 것도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삼매가 깊으면 새김도 깊어지기 때문에 단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찰나삼매는 찰나의 순간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찰나삼매를 이용하여 순간순간의 생멸하는 변화를 보는 것이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마치 오실로스코프를 이용하여 주파수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실로스코프 한대만 있으면
오랜 세월 전자제품 개발자로 일했다. 이십대 중반부터 사십대 중반까지 이십년 동안 셋톱박스(Settopbox) 하드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계측기 다루는 것이 능숙하다. 그 가운데서 주파수와 전압, 노이즈 등을 볼 수 있는 오실로스코프(osciloscope)는 마치 오늘날의 스마트폰처럼 늘 가까이 하는 것이었다.
전자제품개발자는 오실로스코프 한대만 있으면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 그것은 모니터를 이용하여 모든 것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주파수를 세밀하게 볼 수 있다.
여기 수정진동자가 있다. 업계에서는 보통 ‘크리스탈’이라고 부른다. 씨피유(CPU)를 구동하는데 있어서 4Mhz(메가헤르쯔) 수정진동자가 사용된다.
수정진동자의 주파수가 4메가인 것을 확인하려면 오실로스코프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4메가는 고주파수이기 때문에 주기가 있는 사인(cine)파를 눈으로 확인하려면 시간을 분할해서 보아야 한다. 밀리세크(mill sec)로 시간을 쪼개서 보면 사인파가 분명히 보인다. 개발자는 오실로스코프 한대만 있으면 전자품을 개발할 수 있다.
삼매는 명색을 새기기 위한 도구
좌선에서 배의 부품을 볼 때 잘 보면 여러 단계가 있다. 한번에 부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품, 부품, 부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매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것도 찰나삼매가 형성되지 않으면 보기 힘들다. 이때 찰나삼매는 오실로스코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삼매는 명색을 새기기 위한 도구라고도 볼 수 있다. 삼매가 형성되어야 정신과 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생성, 멈춤, 소멸도 볼 수 있다. 또 더 나아가 부품에도 여러 단계를 볼 수 있고, 꺼짐에도 여러 단계를 볼 수 있다.
각 단계마다 생성과 멈춤, 소멸이 있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것과 같다. 고주파수를 시간을 밀리 단위로 분할하여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구분하고 분할해서 분석적으로 보면 무엇이 보일까? 그것은 생성과 멈춤과 소멸이다. 줄여서 ‘생멸을 본다’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쩌면 생멸을 보기 위한 수행인지 모른다. 무더기로 되어 있는 물질을 나누고 또 나누어서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취온이라는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출발점이다.
세계의 끝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았다.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침묵했다면 오늘날까지 담마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별론자’라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철저하게 분별했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해체해서 설명한 것이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진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몸 안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이 몸 안에서 세계의 끝이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걸어서든 탈것으로든 평생 가도 우주 끝까지 갈 수 없지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면 세계의 끝이라 불리우는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열반은 괴로움의 끝이기도 하고 윤회의 종식이기도 하다.
세계의 끝에 이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해체해서 관찰해야 한다. 오온에 집착된 무더기로는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부처님은 분별론자(Vibhajjavādin)
빠알리니까야를 다 읽었다. 시중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다 읽은 것이다.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쿳다까니까야의 번역본은 다 읽었다. 교정작업에 참여한 것도 다 읽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니까야 뿐만 아니라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도 읽었다. 청정도론은 십여년 전부터 읽던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완역 되었을 때 교정자로 참여하여 두 번 읽은 바 있다.
초기경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부처님은 ‘분별론자(Vibhajjavādin)’라는 것이다. 니까야 자체가 분석적인 경전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 시작이다. 이렇게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윤회를 끝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ṇava)”(M99)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철저하게 분별론자가 되어야
위빠사나 수행자는 철저하게 분별론자가 되어야 한다.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진리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석적 접근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사부니까야를 읽다 보면 위방가경이 있다. 번역서에서는 이를 ‘분석경’ 또는 ‘분별의 경’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십이연기분석경(S12.2), 팔정도분석경(S45.8)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은 근본 가르침을 설할 때 먼저 용어 정의를 해 놓았다. 위방가경이 대표적이다. 십이연기분석경을 보면 무명, 형성, 의식 등 각 열두 가지 고리가 정의 되어 있다. 팔정도분석경을 보면 정견, 정사유 등 여덟 가지 고리가 정의되어 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사유해야 한다. 아예 통째로 외우면 더 좋다. 한번 외워 놓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머리에서 꺼내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십이연기분석, 팔정도분석경은 모두 다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다.
니까야는 수 많은 위방가경이 있다. 여기서 위방가라는 말은 ‘distribution; division; classification’의 뜻이다. 구분하는 것, 분석하는 것, 분별하는 것의 뜻이다. 이렇게 분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 수행승은 이전에 어리석은 범부였을 때는 재가자였건 출가자였건 이 몸에관하여, 성립한 대로, 바라는 대로 덩어리로 식별(ghanavinibbogam)해서 요소의 세계로 관찰하지 않는 한, ‘뭇삶이다.’라든가 ‘사람이다’라든가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Smv770)라는 주석으로 알 수 있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분별해서 관찰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몸과 마음을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몸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느낌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좋으면 “좋아 죽겠다.”라고 말하고 싫으면 “죽도록 싫다.”라고 말한다. 모두 다 내가 개입되어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쩌면 나를 죽이는 수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는 아상이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 보면 나라는 것은 하나의 언어적 개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를 죽일 수 있을까?
금강경은 니까야를 모티브로 하여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이 있다. 그것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라는 아름다운 문구이다. 여기서 ‘전(電)’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게송 ‘여로역여전’에서 전(電)은 일반적으로 ‘번개’로 번역된다. 유위법은 번개와 같이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관(觀)’하라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은 나와 있지 않다.
금강경은 아름다운 문구로 가득하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한 금강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독송한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던 첫 해인 2004년에 금강경 5,249자를 모두 다 외운 바 있다.
수많은 금강경 해설서가 있다. 그러나 수행방법과 관련된 것은 드물다. 일체유위법에 대하여 번개처럼 보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은 보기 힘들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청정도론에 번개와 관련된 게송은 다음과 같다.
Adassanato āyanti,
bhaggā gacchantudassanaṁ;
Vijjuppādova ākāse,
uppajjanti vayanti ca.
“보이지 않게 와서
괴멸한 뒤에 보이지 않게 된다.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sm.20.72)
청정도론에서는 이 게송에 대하여 찰나생찰나멸로 설명한다. 번개처럼 빠르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고 했다.
송곳 끝의 겨자씨는 얼마나 오래 머물까? 아마 올려 놓자 마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명색도 그렇다는 것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생겨나는데 머무는 시간은 찰나적인데 이에 대하여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환술, 아지랑이, 꿈, 선화륜, 신기루, 파초 등처럼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3)라고 했다.
대승경전을 보면 초기경전에서 본 내용이 있다. 이는 아마도 대승경전 저자가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원음을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불교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라는 말도 니까야에서 발견 된다. 쌍윳따니까야 ‘포말의 경’에 실려 있는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4)라는 게송이 아마 모티브가 되리라고 본다.
석화(石火)로 비유된 찰나생찰나멸
니까야에서 번개와 관련된 가르침이 몇 군데 보인다. 이는 번개와 같이 빠르고 또한 빨리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다나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 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처럼 올바로 해탈한 님
감각적 쾌락의 속박의 거센 흐름을 건넌 님,
동요를 여의고 지복에 도달한 님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Ud.93)
대장간에서 쇠망치를 치면 불꽃이 생겨난다. 그러나 머무는 기간은 매우 짧다. 번개보다 더 짧다. 인생도 이렇다는 것이다.
언젠가 장례식장에서 본 문구가 있다. 커다란 액자에 “石火光中(석화광중), 爭長競短(쟁장경단), 幾何光陰(기하광음). 蝸牛角上(와우각상), 較雌論雄(교자논웅), 許大世界(허대세계)”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 한글로 “석화 같은 빛속에서 길고 짧음을 다툰들 그 세월이 얼마나 되며 달팽이 뿔 위에서 승패를 겨룬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겠는가”라고 설명문을 곁들였다. 채근담에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금강경에서는 유위법에 대하여 번개불로 비유했다. 우다나에서는 쇠망치불꽃으로 비유했다. 채근담에서는 돌맹이 부딪치는 불꽃(石火)으로 비유했다. 모두 찰나생찰나멸에 대한 것이다.
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청정도론에서는 명색에 대하여 찰나생찰나멸로 설명한다. 그런데 찰나생찰나멸에 있어서 머묾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머묾은 찰나 중의 찰나이기 때문이다. 마치 송곳 위에 있는 겨자씨와도 같은 것이 머묾이다.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생주멸’이라 하지 않고 ‘생멸’이라 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는 말은 아름답다. 사람들은 이 게송을 외우며 위안 받는다. 그러나 관하는 방법에 대한 것은 보기 힘들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는 관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의 ‘비파의 비유’(S35.246)를 들고 있다.
“이 명색이 생겨나기 전에 생겨나지 않은 더미나 집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생겨나더라도 더미나 집적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소멸하더라도 방향이나 사잇방 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소멸한 것이라도 어떤 곳에 더미나 집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를 들어, 비파를 연주할 때 생겨난 소리는 생겨나기 전에 쌓여 있던 것은 아니고, 생겨나더라도 쌓여 있던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더라도 방향이나 사잇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소멸한 것이라도 어떤 곳에 쌓여 있는 것이 아니고, 비파와 연주와 연주자의 적당한 노력을 조건으로 전에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고,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 의 명색의 현상은 전에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고, 생겨난 것은 소멸하 는 것이다.”(Vism.20.96)
부처님은 비파의 비유를 들어서 조건발생을 설명했다. 비파소리가 나는 것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나는 것이다. 그런데 소리는 나면 곧바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치 소리는 번개와도 같고, 석화와도 같다. 그 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생겨났다가 즉시 사라졌을 뿐이다. 소리가 어디로 갔다면 실체가 있는 것이 된다. 자아라는 실체, 영혼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어리론가 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파소리는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소리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생겨났다가 즉시 사라졌을 뿐이다. 이는 수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명색을 구분해서 새긴다. 물질따로 정신따로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번 일어난 것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은 없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떤 실체가 있는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물질도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는 사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다 보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게 된다. 발을 들 때 의도가 있어서 들게 되는데 이는 정신이 원인이 된다. 그리고 발을 드는 행위가 있게 되는데 이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관계가 형성된다. 또한 의도에서 시작 되었기 때문에 의도에 따른 조건발생이 된다.
발을 한번 드는 행위로 인하여 두 가지 지혜가 생겨난다. 하나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또 하나는 조건 파악의 지혜이다. 이는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도 성립된다.
배가 부풀 때 부푸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부푼 것을 아는 앎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배가 부품에 따라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배가 부푸는 것은 부푼다고 아는 앎이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배가 부푸는 것은 배가 부푼 것을 아는 조건이 된다. 배의 부품이 원인이 되고 이를 아는 것은 결과가 된다. 또한 배의 부품을 조건으로 앎이 있게 되는데 이는 조건발생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물질도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배가 부푸는 것은 나의 의지와 의도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신진대사작용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배가 부풀 때 이를 아는 앎이 있고, 배가 부푸는 것을 조건으로 다음 명색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어떤 자아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발생하는 명색의 흐름만 있을 뿐
어떤 이가 강물 가에 앉아 있다. 강물은 흘러간다. 그런데 한지점에서 강물은 이전 겉과 똑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번 흘러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새로운 강물이 흐른다. 명색의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순간에도 명색의 강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한번 생겨난 것은 즉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건너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조건발생할 뿐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발생한다. 이렇게 명색의 강은 끟임없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 재생을 해서도 흘러간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명색의 강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흐름을 보다 보면 하나의 통찰이 있게 된다. 그것은 단 한번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단 한번도 똑같았던 때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단한번도 똑같았던 때가 없었다. 나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를 하면서 단한번도 이번 생과 똑같았던 때가 없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매순간 나는 태어나고 또한 매순간 나는 죽고 있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발생하는 명색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매순간 없던 것이 생겨 나서 사라지는데
매순간 없던 것이 생겨난다. 그리고서는 재빠르게 사라진다. 틈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삶을 살아 오면서 이제까지 단한번도 똑같았던 때는 없었다. 매순간이 새롭듯이, 이 인생 역시 윤회하는 삶의 과정에서 지금 이 모습 이 성향과 똑 같은 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 유일한 것이다.
지금 이시각 11시 16분이다. 글을 쓴지 2시간 54분이 지났다. 글을 다시 한번 읽고 교정해야 한다. 소제목을 다는 등 교정작업이 끝나면 점심시간이다. 이렇게 또 오전이 지나간다.
2024-10-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