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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권 담마짝까법문 독후기, 각각의 생에서 자기 삶을 즐기는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29. 10:30

140권 담마짝까법문 독후기, 각각의 생에서 자기 삶을 즐기는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책 읽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 책에서 얻을 것이 그다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에 대한 것, 세상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흥미가 없다. 이런 것도 나의 자만일지 모른다.
 
책을 즐겨 읽지 않지만 예외도 있다. 경전은 즐겨 읽는다. 그것도 새기며 읽는다. 논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근에는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을 즐겨 읽는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완독했다. 법문을 읽으면서 느낀 것에 대하여 글로 표현 했다. 모두 23개의 글이다. 이 글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다. 책 제목은 ‘140 담마짝까법문 독후기’이다. 140번째 책으로 315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담마짝까법문 읽기 시동을 걸고
2.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3.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붙어 있는 것처럼
4. 담마와나선원 가는 날에
5. 새김은 전천후 수행용어
6. 허물을 지적해 주는 이에게 감사하자
7. 위빠사나 찰나삼매에 대하여
8. 이제 들어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9. 위빠사나 지혜에 이르는 자는 만명 가운데 하나
10. 위빠사나 하다가 피곤하면
11. 자신이 존경스러울 때
12.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13.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가 있어서
14.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등불로 삼아
15. 오늘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날
16.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윤회를 부정할까?
17. 괴로움의 진리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파악해야
18.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19. 행선을 하면 겟투(Get Two)가 되어
20.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더니
21. 아무 의미 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바보처럼
22. 어떻게 해야 죽음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23. 새기고 또 되새김하며 읽은 담마짝까(初轉法輪經) 법문
 

 

140 담마짝까법문 독후기_241024.pdf
2.02MB

 

 

 
담마짝까법문을 읽기 시작한 것은 2024년 7월 27일이다. 완독한 날자는 2024년 9월 15일이다. 읽는데 한달 이십일 걸렸다. 머리맡에 놓고서 읽었다. 책을 읽은 기간은 ‘재가우안거’와 겹친다.
 
마하시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의 존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출판사 ‘행복한 숲’에서 ‘초전법륜경’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김한상 선생이 영역판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피디에프(pdf)파일을 입수해서 읽어 보았다.
 
이번에 읽은 담마짝까법문은 한국마하시선원에서 출간된 것이다. 그것도 미얀마어로 되어 있는 원본을 일창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초판 인쇄연도를 보니 2019년이다. 그러고 보니 담마짝까법문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 된 것은 이제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영역판 번역본과 미얀마어판 번역본은 차이가 크다. 전자는 생략된 것이 많다. 더구나 빠알리원문은 실려 있지 않다. 또한 빠알리대역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는 모두 갖추고 있다. 더구나 ‘번역허가증’에 따른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빠른 속도로 읽는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책읽기는 지양 되어야 한다.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경서와 논서는 한줄한줄 새기며 읽는다. 그리고 감명 깊은 구절에 대해서는 사유하고 숙고하며 글쓰기 소재로 활용한다.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느낀 감동과 감탄에 대하여 23개의 글로 남겼다. 논서 한줄에 글이 하나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구절에 대하여 글로 쓸 수 없다.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읽는다면 그때 한줄에 대한 글을 남길 것이다. 그때는 아마 ‘담마짝깝법문 독후기 II’가 될 것이다.
 
담마짝까법문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논서를 아직 보지 못했다. 사성제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 이렇게 책으로 한권이다. 그것도 500페이지가 넘는다.
 
한국불교 종단에서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다. 글자수 5,249자에 달하는 경 하나를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금강경에만 있지 않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든 그날밤에 이르기까지 ‘구분교’로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것이 팔만사천법문이다.
 
진리는 본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팔만사천이나 되는 법문을 남겼다. 정확하게는 팔만이천법문이다. 나머지 이천법문은 제자들이 설한 것이다. 이러한 팔만사천법문은 진리를 설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비유로서는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니까야의 수많은 비유가 이를 말해 준다. 그런데 부처님이 설한 방대한 팔만사천법문은 사성제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코끼리 발자국은 매우 커서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섭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사성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해설해 놓은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금강경에 대한 해설서는 수십종으로 넘쳐 난다. 그러나 사성제에 대한 것은 보기 힘들다. 이런 때 한국마하시선원에서 ‘담마짝까법문’이 출간 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게 할 좋은 소식임에 틀림 없다.
 
담마짝까법문은 감동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머리맡에 놓고서 새벽에 읽을 때 한줄한줄 사유하고 숙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남는 말은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tatratatrābhinandinī)”라는 말이다. 이 말은 ‘여기저기서 갈애를 즐긴다’라는 뜻이다.
 
사성제에서 갈애는 미래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 여기저기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을 즐기는데 있어서는 남녀노소가 없고 빈부귀천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축생도 감각을 즐긴다. 그래서 “그 처지에 이르게 되면 그 도달한 생에서 즐깁니다.”(277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공원에 가면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개의 목에는 목줄이 있다. 개가 똥을 싸면 주인은 치워 준다. 그런데 개는 개의 본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오줌을 누어서 영역표시를 하는 것이다.
 
개를 보면 불쌍해 보인다. 연민의 마음으로도 보지만 때로 혐오도 일어난다. 그러나 개에게는 잘못이 없다. 어쩌다 보니 개의 태에 들었을 뿐이다.
 
개는 다음 생에서 어디에서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개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이는 “그 처지에 이르게 되면 그 도달한 생에서 즐깁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즐길거리가 없으면 사람은 심심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남자에는 남자의 즐길거리가 있고, 여자에게는 여자의 즐길거리가 있다. 노인에게는 노인의 즐길거리가 있고 아이에게는 아이의 즐길거리가 있다.
 
아이들이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는다. 어른이 보았을 때는 아무 의미 없는 짓으로 보이지만 아이는 모래놀이 하는 것을 즐긴다. 이런 것도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에 해당된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즐길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자들이 한우에 와인을 먹을 때 예산이 부족한 자는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다. 각자 처지에 맞게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에 대하여 “각각의 생, 각각의 대상들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277쪽)이라고 한 것이다.
 
담마짝까법문을 읽다 보면 업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죽은 이는 자기 업에 따라 다른 생에 태어나기 마련입니다.”(279쪽)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존재는 ‘업생(業生)’이 된다.
 
요즘 어느 스님은 윤회를 부정하는 법문을 했다. 부처님이 연기법은 말했지만 윤회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윤회는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을 고착화하기 위해서 흰두교도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는 윤회를 말한다. 그것도 사람이 축생이 되고, 축생이 사람이 되는 윤회이다.
 
한국의 어느 스님은 왜 윤회를 부정할까? 아마 그것은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일반국민은 물론 타종교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스님이라면 ‘국민스님’이나 다름 없다. 국민스님이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된다’라고 말하면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칭송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 하셨다. 팔만사천법문을 포괄하는 사성제 역시 윤회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이 가르침은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S56.11)라는 뜻이다. 갈애를 일으키면 그에 해당되는 업을 짓게 되어서 그 업에 해당되는 세계에 재생하게 됨을 말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삼장에 통달한 사람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제6차 결집 당시에 ‘최승대현자’의 지위로 질문했다. 이처럼 삼장에 통달하고 수행의 경지가 있는 사람이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왜 그럴까?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수행으로 경험한 것도 이유가 된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 윤회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삼장을 읽어 보지도 않았고 도와 과의 경지에도 이르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법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윤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회의론자가 되는 것이다.
 
담마짝까법문을 보면 수많은 윤회이야기가 있다. 대부분 갈애를 일으켜서 윤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띳사라는 비구가 죽을 때 가사에 집착해서 죽은 뒤에 그 가사속의 이로 태어난 것”(283쪽)이라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죽어서 벌레와 같은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어느 종교학 C교수가 환생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그 교수에 따르면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축생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60년 전에 마하시 사야도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비판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환생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떤 변치 않는 자아를 가정한 것이다. 티벳불교의 환생론도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현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매우 분명하게 존재하는 시기조차도 ‘사람이 죽어서 사람보다 저열한 생이 될 수 없다’라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283쪽)라고 비판했다. 마치 현재 한국적 불교현실을 질타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사람 아래로는 태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서양의 환생론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가 되기 전에는 인간의 생에서도 사악처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니까야에서도 수 없이 볼 수 있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불선업으로 인하여 죽을 때 마음을 잘못 기울인 것에 따라 악처의 중생들로 속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283쪽)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성스러운 도를 얻기 전에는 저열한 생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소똥구리가 되어 소똥을 굴리는 삶을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똥구리는 소똥을 굴리는 삶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라 하여 “각각 도달한 생, 얻는 대상에서 좋아하고 즐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늘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이는 벌레로 태어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벌레로 태어나면 그렇게 태어난 곳에서 즐기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예전에는 부유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사는 자가 있다. 예전에는 그랜저를 타고 다녔는데 지금은 걸어 다닌다. 이런 삶을 사는 자에게 낙(樂)은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가 도달한 생의 상황에서 즐깁니다.”(287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각자의 삶이 있다. 부자에게는 부자의 삶이 있고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삶이 있다. 각자 처한 상황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자기 삶을 자기가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라 하여 “도달한 생, 얻는 대상에서 즐긴다.”(287쪽)라고 말하는 데 바로 이것이 미래 다시태어남을 일으키는 갈애라는 것이다.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우리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속담이 있다. 하느님으로 복과 수명을 누리던 중생이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의 삶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범천에서 막바로 축생으로 떨어질 수 없다. 인간을 거쳐서 축생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선정을 얻은 생에서는 선정의 근처에 생겨나는 근접삼매의 선업의 힘으로 사람의 생이나 욕계천상의 생에만 태어날 수 있습니다.”(292쪽)라고 했다. 삼매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부처님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였다. 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존재 자체가 괴롭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욕망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른바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오취온적 존재는 근본적으로 욕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욕계, 욕망의 세계에서 산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끊임 없이 재미를 추구한다. 감각적 욕망이기 쉽다. 마음이 늘 감각의 대상에 가 있다 보니 갈애를 일으켜 미래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담마짝까법문을 읽어 보면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아직까지 한번도 접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한국불교에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이것이 미얀마불교의 힘일 것이다. 결집을 두 번 주도한 저력일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불교에 대하여 수행의 나라라고도 하지만 교학의 나라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접하면 안목이 넓어지는 것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 그리고 아리야와사법문과 담마짝까법문을 읽었다. 이 밖에도 사야도의 저서는 많다. 약 백권 가량 될 것이라고 한다.
 
담마짝까법문을 읽으면서 법의 진수를 맛 보았다. 비록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논서를 읽은 경험이 영향을 줄 것 같다. 이번 2024년 재가우안거는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을 등불로 삼아, 또한 스승으로 삼아 행선과 좌선을 했다. 이런 기회를 준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에게 감사 드린다.
 
2024-10-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