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떻게 해야 오온의 생멸(生滅)을 볼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30. 14:04

어떻게 해야 오온의 생멸(生滅)을 볼 수 있을까?
 
 
좌선을 하다가 중단했다. 좋은 생각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유레카!”라며 외치는 것과 같다. 그 동안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풀린 것이다.
 
재가수행자의 행선과 좌선은 매일 계속된다. 우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매일 밥 먹듯이 매일 아침 행선과 좌선을 한다. 그리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매일 글을 쓴다. 오랜 세월 해 온 것이라 습관이 되었다. 매일 밥 먹듯이 매일매일 글을 쓴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늘어나는 것은 글이고 또한 늘어나는 것은 책이다.
 
명상을 마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진실된 것이기 쉽다. 더구나 뉴스에 오염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영상단말기의 ‘한줄뉴스’의 유혹도 뿌리친다. 애써 모른 채 눈길을 피하는 것이다.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알면 좋고 몰라도 좋은 정보는 취하지 않아도 된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지식 역시 취하지 않아도 된다. 일체 타인의 주장이나 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유튜브 보지 않은지 네 주가 되어 간다. 유튜브를 보지 않아도 살만하다. 무엇보다 ‘가스라이팅’당하지 않는 삶이다.
 
세상에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 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 역사적인 이야기, 철학적인 이야기 등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들어도 그만이고 듣지 않아도 그만이다. 이런 경우 듣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담마(Dhamma)에 대한 이야기는 귀를 기울인다.
 
서 있을 때 신체부위를 새기는 방법
 
행선을 하다 좋은 생각이 떠 오르면 메모해 둔다. 행선대 앞 탁자에 노트와 연필을 갖추어 놓았다. 언제든지 기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행선 중에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이다. 초기불교를 접하고 아비담마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상식에 속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주선(住禪)과 비교했을 때이다.
 
서 있는 수행을 주(住禪)이라고 한다. 내가 만든 용어이다. 행, 주, 좌, 와, 이렇게 네 가지 몸관찰 행동양식에 있어서 머무는 수행, 즉 주선을 말한다.
 
행선할 때는 세 가지 양식이 있다. 걷는 것과 멈추는 것과 방향전환이다. 이 가운데 멈추어 서 있는 것도 수행이다.
 
행선할 때 방향을 바꾸어야 할 때가 있다. 멈추자마자 “획”하고 돌아서면 안된다. 방향을 바꿀 때는 바꾸려는 의도를 새기면서 전환해야 한다. 서 있을 때는 전신을 스캔하듯이 새겨야 한다.
 
행선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것을 시도해 본다. 서 있을 때 스캔하는 방법에 대하여 나름대로 하나의 방법을 만들어 보았다. 전신스캔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전신스캔할 때 모래시계처럼 선형적인 스캔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래서 부분 스캔하기로 했다. 신체의 특정부위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은 두기 나름이다. 마음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서 머물 수 있다.
 
서 있을 때 마음을 눈으로 가게 하면 감은 눈의 촉촉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스캔의 시작이다.
 
마음은 원하는대로 내려 앉는다. 이번에는 마음을 코로 두었다. 코에서는 바람이 나온다. 코라는 개념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라는 실재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차례대로 가슴이 벌렁이는 것, 배가 불룩하는 것, 골반부위가 훵한 것, 허벅지가 뻐근한 것, 장딴지가 뻣뻣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바닥이 차갑고 딱딱한 것을 새긴다. 이렇게 신체의 여덟 부위를 새김으로 인하여 전신스캔하는 것이다.
 
행선은 움직이는 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주선은 고정된 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새기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서 있을 때 움직임 없는 신체부위를 새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움직이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가슴은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벌렁임’이라는 실재를 보면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눈은 어떠할까? 눈으로 형상을 볼 때 눈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의 감성물질은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말과 변화한다는 말은 동의어이다.
 
물질이 생겨나는 다섯 가지 원인
 
오토바이폭음으로 스트레스 받고 있다. 불쾌를 야기하는 파열음과 폭발음을 듣다 보면 마음 속에서 “저런 나쁜놈!”이라고 저절로 욕설이 튀어 나온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배달문화가 발달해서 일 것이다. 오토바이소음 스트레스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오토바이폭음을 들을 때 소리는 연속으로 들린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지 연속은 있을 수 없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생멸의 지혜’에 대한 항목에 따르면 ‘찰나생멸’의 연속이다.
 
오늘 새벽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다가 마음이 밝아 졌다. 생멸의 지혜에 대한 설명을 읽자 그 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해소 되는 것 같았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생겨남을 볼 때의] 다섯 가지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생에서 업을 행할 때 포함되었던 무명이 있다는 것이 하나, 갈애가 있다는 것이 하나, 업이 있다는 것이 하나, 지금 생에서 먹는 음식이 있다는 것이 하나, 새겨 알고 있는 현재 물질의 생겨남이 하나, 이러한 다섯 가지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67쪽)
 

 

 
 
물질이 생겨나는 다섯 가지 원인에 대한 것이다. 무명, 업, 갈애, 음식, 그리고 현재물질의 생겨남이 물질이 생겨나는 원인이 된다. 처음에는 이런 말의 의미를 몰랐다. 논서를 두 번째 읽으면서 이해 하게 되었다. 특히 “새겨 알고 있는 현재 물질의 생겨남이 하나”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하나가 이해 되면 나머지 것들도 이해된다. 마치 고구마 줄기가 넝쿨 채로 뽑히는 것과 같다. 오늘 새벽에 본 ‘현재물질의 생겨남’에 대한 것이 그렇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논서 보는 것을 병행 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 재가우안거에서도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머리맡에 두고서 읽었다. 그리고 읽은 것에 대하여 행선과 좌선에 적용해 보고자 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한번 읽어서는 알 수 없다. 두 번째로 읽으니 약간 보이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체험 하지 않으면 읽을 때 마다 새롭다. 청정도론을 처음 읽었을 때나 이후 수 차례 읽었을 때나 늘 새로웠는데 이는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은 어떻게 생겨날까?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물질이 생겨났다고 말할 것이다. 우연론자는 원인도 이유도 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조건발생의 법칙, 연기법을 설했다.
 
무애해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위빠사나 수행은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 길로 가는 것이다. 먼저 가 본 자가 간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논서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실제 수행과 관련하여 설명되어 있다.
 
경서 중에 빠띠삼비다막가가 있다. 이를 무애해도라고 말한다. 쿳다까니까야 계열에 있는 경전이다. 경서라고 하지만 논서에 가깝다.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은 이 무애해도애 근거하여 저술되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청정도론과 함께 무애해도의 가르침도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무애해도에 따르면, 물질이 생겨나는 원인으로 무명(avijjā), 업(kamma), 갈애(taṇhā), 음식(āhara), 물질의 생겨남(rūpa)으로 보고 있다. 처음 이 부분을 접했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패스 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읽다 보니 와 닿았다.
 
물질은 무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경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수행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업에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도, 갈애에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 음식에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도 추론해서 알 수 있다.
 
물질은 무명, 업, 갈애, 음식, 물질에서 온다. 그런데 물질에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제외하고 추론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숙고하여 아는 것은 생멸하고 있는 물질 무더기가 실제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192쪽)라고 했다.
 
물질이 무명, 업, 갈애, 음식, 물질에서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수행체험 없이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무명이나 갈애 등이 다 없어질 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이해하여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라한이 되어서나 알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하여
 
오늘 새벽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이는 수행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행선할 때 발을 든다. 발을 들어서 밀게 된다. 발을 들어서 미는 과정은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물질을 원인으로 해서, 물질을 조건으로 해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발을 드는 것을 조건으로 발을 밀게 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좌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알 수 있다. 배가 부풀 때 부품을 원인으로, 부품을 조건으로 멈춤과 꺼짐이 있게 된다. 그런데 배의 부품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창조주가 만든 것도 아니다. 하나의 신진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는 누구나 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서 음식도 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된다. 음식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음식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구나 몸속에서는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는 몸 속에서 화학반응에 따른 연쇄반응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 번 가량 진행된다고 한다.
 
오늘 아침 좌선을 하다가 마치 “유레카!”하는 것처럼 사유가 일어났다. 그리고 30분 알람 설정 해 놓은 상태에서 7분을 남기고 좌선을 그만 두었다. 이는 “ ‘물질이 있기 때문에 물질의 생겨남이 있다. 또는 물질이 생겨난다’라고 조건이 있기 때문에 물질무더기의 생겨남을 이해하고 본다.”라는 무해해도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물질무더기(rūpakkhandha)’라는 말이 결정적이다.
 
물질은 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일반 사람은 이런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수행으로 알 수 있다.
 
배의 부품을 볼 때 한단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매가 있고 새김이 있을 때 여러 단계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강한 생멸의 단계라고 했다.
 
강한 생멸의 단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생멸의 지혜가 성숙하고 예리해졌을 때는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여러 움직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전단계는 다음 단계의 원인이 된다. 이는 전단계의 부품이라는 물질이 원인이 되어서 다음 단계의 부품이란은 물질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물질의 범주는 넓다. 초기불교에서는 몸만을 물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때, 눈만 물질로 보지 않는다. 보는 대상인 형상도 물질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소리도 물질이 되고, 향기도 물질이 되고, 맛도 물질이 되고, 감촉도 물질이 된다.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 모두 물질로 본다.
 
생성과 소멸이 없는 언어적 개념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기 마련이다. 생성만 있고 소멸이 없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빤냐띠, 즉 개념이다. 언어적 개념을 말한다.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은 생멸이 없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 너, 중생, 관찰자, 주재자, 창조주는 모두 언어적 개념이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 생멸이 없어서 누군가 이 명칭을 기억하고 있는 한 그 사람에게서 영원히 존재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이는 개념을 배제하는 수행이기도 한다. 그래서 수행문답을 하면 스승은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세요.”라며 지도한다. 느낌은 실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의 감성물질은 계속 생겨 나고
 
물질은 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는 상속개념으로 설명된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발생이다. 물질을 조건으로 해서 물질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에 대하여 물질무더기라고 했다. 이 무더기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온에 대하여 다섯 가지 무더기라고 한다. 그 가운데 물질무더기가 있다. 이를 색온이라고 한다. 눈은 눈이라는 무더기로 되어 있다. 귀는 귀라는 무더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이를 눈의 감성물질, 귀의 감성물질이라 하여 ‘감성물질’로 설명하고 있다.
 
눈의 감성물질이란 무엇일까? 이는 눈이 계속 생겨나고 있음을 말한다. 형상을 보았을 때 정지화상만 보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을 보았을 때 눈의 감성물질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정지화상을 본다고 해서 눈의 감성물질이 한번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눈을 껌벅거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눈의 감성물질은 계속 생겨 나고 있다.
 
눈의 감성물질을 조건으로 해서 눈의 감성물질이 만들어진다. 이런 것에 대하여 루빠칸다(rūpakkhandha), 즉 물질의 무더기라고 했을 것이다.
 
오토바이폭탄음으로 고통받고 있다. 파열음과 폭탄음을 들었을 때 불선심이 일어난다. 이때 오토바이 폭탄음은 귀의 감성물질에 따른 것이다. 그것도 귀의 감성물질은 연속해서 일어난다. 귀의 감성물질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귀의 감성물질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귀의 감성물질의 다발을 이룬다.
 
생멸의 지혜’라는 강을 건너야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생멸의 지혜가 있다. 위빠사나 네 번째 단계의 지혜에 해당된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 따르면 이 지혜의 단계에 이르면 수행에 있어서 큰 진전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깨달음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습니다.”(A8.19)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에도 단계가 있다.
 
위빠사나 16단계에서 고비가 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1단계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이고, 두번째는 4단계 생멸의 지혜이고, 세번째는 5단계 무너짐의 지혜라고 한다. 이후 단계는 지혜가 이끄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와 생멸의 지혜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
 
조건에 따라 이곳에서 생겨나서 바로 그 생겨난 곳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려
 
생멸의 지혜를 알면 수행의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도 확인된다. 마하시 사야도는 무애해도를 근거로 하여 명색에 대한 생멸의 지혜를 아는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방법대로 찰나현재로 생겨나는 물질과 정신을, 생겨날 때마다 사라질 때마다 일치하도록 따라서 아는 이는 다음과 같이도 결정하고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지금 새겨 알아지는, 생멸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은 아직 생겨나기 전에 어느 곳에 모여 머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생겨날 때도 어느 곳으로부터 이동하 여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라져 버릴 때도 어느 곳으로 이동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사라져 버렸을 때도 어느 곳에 모여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조건에 따라 이곳에서 생겨나서 바로 그 생겨난 곳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라고도 결정하고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예를 들 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 지혜의 단계에 아직 이르지 못했을 때는 ‘굽히려고 하는 팔이 아직 굽히기 전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라고, 또는 굽히고 있을 때도 ‘그렇게 존재하는 팔이 움직여 온다’라고, 또는 굽히고 나서 끝났을 때도 ‘그 굽힌 팔이 바로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놓은 곳에서 그대로 존재하던 대로 존재한다’라고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이 항상 존 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지금은 (이 지혜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처럼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품, 꺼짐, 앉음, 다리를 듦, 나아감, 놓음, 들음, 봄 등도 같은 방법으로, 또한 반대로 예를 들어 비교하여 알기 바란다. 이렇게 아는 모습이 생멸의 지혜 단계에서 제일 중요하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64-265쪽)
 
 
오늘 새벽 이 부분을 읽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다. 첫번째로 이 논서를 읽었을 때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읽을 때마다 충격인 것은 아직 생멸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으로 본다.
 
위 문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그것은 “사실은 조건에 따라 이곳에서 생겨나서 바로 그 생겨난 곳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번 생겨난 것은 생겨난 것으로 끝남을 말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음을 말한다.
 
팔은 내가 굽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사람들은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고도 말한다. 만약 그런 실체가 있다면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생겨난 것은 소멸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갈 것이다. 죽어서도 영혼은 계속 된다고 보는 견해가 이를 말한다.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였다. 이는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세상에서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나는 있지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그 어떤 것도 생겨나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마하시 사야도도 비유를 들었다. 팔을 편 채로 있다가 구부리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굽히려고 하는 팔이 아직 굽히기 전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팔을 굽히고 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 ‘내가 간다’고 말한다. 관행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가는 나는 없다. 있다면 명색만 있을 뿐이다. 팔을 굽히거나 펼 때도 내가 굽히거나 펴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생멸의 지혜는 수행으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학과 함께 해야 한다. 교학과 실천이 있으면 통찰이 있듯이, 담마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훌륭한 수행지침서가 된다.
 
오온에 대한 50가지 생성과 소멸
 
스승 없이 나홀로 수행하고 있다. 누군가는 선지식을 찾아가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나에게는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보다 더 훌륭한 선지식이 없다.
 
새벽에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 마음은 충만된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이렇게 마음이 충만되자 발걸음도 가볍다. 백권당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은 들떠 있었다.
 
오늘 좌선에서 하나의 사유가 일어나자 좌선을 그만 두었다. 새벽에 읽은 논서의 한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생멸의 지혜를 머리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논서를 접하면 이해는 가능하다. 오늘 읽은 것 가운데 무애해도의 다음과 같은 문장도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Pañcannaṁ khandhānaṁ udayaṁ passanto pañcavīsati lakkhaṇāni passati, vayaṁ passato pañcavīsati lakkhhaņāni passati, udayavayaṁ passanto paņņāsa lakkhha ņānaṁ passati.(Ps.53)
 
(대역)
“añcannaṁ khandhānaṁ다섯 무더기의 udayam passanto생겨남을 보는 이는, 또는 생겨남을 볼 때는 pañcavīsati lakkhaņāni passati 25가지 특성을 본다. vayaṁ passanto사라짐을 보는 이는, 또는 사라짐을 볼 때는 pañcavīsati lakkhhaņāni passati 25가지 특성을 본다. udayavayaṁ passanto생겨남과 사라짐을 보는 이는, 또는 생겨남과 사라짐을 볼 때는 paņņāsa lakkhhanānaṁ passati 50가지 특성을 본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66쪽)
 
 
이 문장은 오온에 있어서 25가지 생성과 25가지 소멸에 대하여 50가지 특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위 문장에 대하여 연이어 소개 되어 있는 무애해도에 대하여 대역해 놓았다. 그리고 오온에 대한 25가지 생성과 25가지 소멸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처음 무애해도의 문장을 보았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첫번째로 논서를 읽었을 때도 그랬다. 오늘 새벽 두번째로 읽을 때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마치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 인양 마음이 들뜨게 되었다. 좌선을 하다가 50가지 오온의 생멸에 대한 것을 사유하고 숙고했는데 도중에 좌선을 그만 둔 계기를 만들어 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오늘 새벽 파악한 오온의 50가지 생멸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물질에 대한 생성과 소멸은 무명, 갈애, 업, 음식, 그리고 현재물질로 인한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모두 합하여 열 가지이다.
 
2) 느낌에 대한 생성과 소멸은 무명, 갈애, 업, 접촉, 현재느낌으로 인한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모두 합하여 열 가지이다.
 
3) 지각에 대한 생성과 소멸은 무명, 갈애, 업, 접촉, 현재지각으로 인한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모두 합하여 열 가지이다.
 
4) 형성에 대한 생성과 소멸은 무명, 갈애, 업, 접촉, 현재형성으로 인한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모두 합하여 열 가지이다.
 
5) 의식에 대한 생성과 소멸은 무명, 갈애, 업, 명색, 현재의식으로 인한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모두 합하여 열 가지이다.
 
이와 같은 오온에 대한 생성 25가지와 소멸 25가지를 합하면 50가지가 된다. 여기서 느낌, 지각, 형성이 물질과 다른 것은 음식 대신에 접촉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 지각, 형성이라는 무더기가 생겨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의식이 물질과 다른 것은 음식 대신에 명색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라는 무더기가 생겨나기 때문일 것이다.
 
오온에 대한 50가지 생성과 소멸이 있다. 그런데 오온에는 공통적으로 무명, 갈애, 업이 있다. 무명과 갈애와 업이 소멸되지 않는 한 생성과 소멸은 계속된다.
 
색온의 경우 무명, 갈애, 업, 음식, 그리고 현재물질을 조건으로 생성과 소멸이 계속 된다. 수온과 상온과 행온의 경우 무명, 갈애, 업, 접촉, 그리고 현재의 느낌, 지각, 형성을 조건으로 해서 생성과 소멸이 계속된다. 식온의 경우 무명, 갈애, 업, 명색, 그리고 현재의식을 조건으로 해서 생성과 소멸이 계속된다.
 
생멸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오온에서 생성과 소멸하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의 물질, 현재의 느낌, 현재의 지각, 현재의 형성, 현재의 의식에 대해서는 행선과 좌선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러나 무명, 갈애, 업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는 번뇌 다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야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Yo ca vassasataṃ jīve, apassaṃ udayabbayaṃ;
Ekāhaṃ jīvitaṃ seyyo, passato udayabbayaṃ.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생멸(udayabbaya)에 대한 게송이다. 여기에 머묾은 없다. 왜 그런가? 오온의 생성과 소멸은 찰나지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住)에 대하여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고 했다.
 
생멸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도로 집중해야 할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순간포착해야 한다.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는 명상도구를 이용하여 명색을 새기는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이 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스물다섯 가지의 방식으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 pañcakkhandha]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DhpA.II.270)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이 관찰대상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는 것이다.
 
주석에는 스물다섯 가지에 대한 설명도 있다. 이는 “물질[色 : rūpa], 느낌[受: vedanā], 지각[想: saññā], 형성[行: sarikhārā], 의식[識: viññāna]의 다섯 가지가 무명[無明: avijjā], 갈애[愛:tanhā], 행위[業: kamma], 자양분[食: āhara], 접촉[觸: phassa]의 다섯 가지를 통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DhpA.II.270)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법구경에서 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법구경과 관련된 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구와 단어에 대하여 의석해 놓은 것은 보기 힘들다. 유일하게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 주석적 각주를 볼 수 있다.
 
처음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았을 때 그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생멸의 지혜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이해 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애해도에서 이미 설명된 것이다.
 
주석에서는 오온에 대한 50가지 생멸에 대하여 무명, 갈애, 행위, 자양분, 접촉을 들었다. 그러나 무애해도에 따르면 색과 수상행과 식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색온의 경우 무명, 갈애, 업, 음식, 그리고 현재물질을 조건으로 생성과 소멸이 계속 된다. 수온과 상온과 행온의 경우 무명, 갈애, 업, 접촉, 그리고 현재의 느낌, 지각, 형성을 조건으로 해서 생성과 소멸이 계속된다. 식온의 경우 무명, 갈애, 업, 명색, 그리고, 현재의식을 조건으로 해서 생성과 소멸이 계속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생멸을 보지 못하면서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멸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도를 이루면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사는 것은 똑같음을 말한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
 
여기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있다. 재산이 천억이라면 그에게 있어서 평생 먹고 살 재산만 남겨 둔다면 나머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것이다. 나머지 재산은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도를 이룬 자라면 앞으로 삶은 어떻게 될까?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더 살아도 의미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한 게송을 보면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라고 했다. 나머지 세월은 여분이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고서 기쁨이 일어났다. 생멸의 지혜에 대한 이해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애해도에 근거하여 오온의 50가지 생멸에 대한 것을 보면 생멸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오늘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수행한다고 하여 미얀마로 갔는데
 
오늘 아침 백권당 가는 길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의문했던 것이 풀렸다. 물론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깨달은 것처럼 좌선 중에 “유레카!”하는 것처럼 좌선을 그만 두었다.
 
오늘 느낀 것에 대하여 글쓰기를 했다. 글이 길어져서 점심을 먹고 나서도 계속 쓴다. 이렇게 글로서 정리해 놓으면 도움이 된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오늘 점심 먹으로 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수행한다고 하여 미얀마로 갔는데 그들은 무엇을 배워 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일년, 이년, 삼년, 오년, 십년 있다가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수행승이 되어서 남방가사를 두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알아차림 하십시오.”라든가, “싸띠하십시오.”라는 말만 하는 것 같다. 이론도 없고 방법도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서 체계가 잡히고 있다. 한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는 다르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기고 싶은 구절에 대하여 장문의 글을 남긴다. 이런 것도 수행의 과정일 것이다.
 
교학과 실천이 있어야 통찰이
 
어느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지금 당장 글쓰기를 멈추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했다. 마치 우리나라 수행자들이 미얀마에 가서 일년, 이년, 삼년, 오년, 십년 가 있는 것처럼 수행하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교학 없는 수행은 사상누각이다. 수행은 있을지 모르지만 법문을 할 수 없다. 마치 한국불교에서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뿐입니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는 이것뿐입니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과 같다.
 
교학과 실천이 있어야 통찰이 있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여 버르게 실천해야 증득이 있다.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교학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보다 더 좋은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는 없는 것 같다.
 
나로 사는 것은 이번 생 한번뿐
 
오늘도 긴 글을 썼다. 누가 보건 말건 쓸 뿐이다. 이런 글을 쓰게 된 인연에 대하여 감사드린다. 그러고 보나 현재 나는 오로지 이 순간뿐이다.
 
세상에서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나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어쩌다가 모태에 들어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개의 태에 들었다면 오줌으로 영역표시나 하는 존재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오로지 지금 이순간뿐이다. 이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팔을 폈다가 굽힐 때 굽히기 전과 굽힌 후의 팔은 같은 것은 아니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 이었던 때는 오로지 이번 한번뿐이다. 이전 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이전 생의 나를 조건으로 해서 현재의 나가 있게 되었지만 이전 생의 나를 현재의 나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나는 이 얼굴과 이 성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지금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주가 시작된 이래 나로 사는 것은 이번 생 한번뿐이다.
 
점심 밥값 한 것 같은
 
지금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나가 아니다. 명색에 지나지 않는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알게 해 주었다.
 
오늘 새벽 이해 한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가벼웠다. 점심 때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자 새롭게 보이는 것 같다. 오늘 글 쓴 것으로 인하여 점심 밥값은 한 것 같다.
 
 
2024-10-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