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만 보면 가슴이 뛰어, 인터넷에서 인도보리수를 구입하고
보리수만 보면 가슴이 뛰어, 인터넷에서 인도보리수를 구입하고
보리수가 죽었다. 페이스북친구가 선물한 귀한 보리수를 지켜 내지 못했다. 작년인 2023년 6월에 받은 보리수가 올해 2024년 7월경에 완전히 시들어 버렸다. 일년 조금 더 선 것이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보리수를 잘 키워보고자 무척 노력했다. 햇볕 좋은 곳에 두고 매일 상태를 살폈다. 보리수에 예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리수는 생각대로 자라지 않았다. 성장은 더뎠다. 새잎이 나오기가 무섭게 말라 버렸다. 이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보리수는 겨울이 되었을 때는 잎이 모두 다 떨어져 버렸다. 죽었는줄 알았다. 그런데 겨울이 끝날 무렵 잎이 나왔다.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여름을 넘지 못했다. 보리수는 완전히 생명을 다한 것이다. 대체 무엇이 잘못 됐을까?
보리수는 불자들의 식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밀린다팡하 주석에 따르면 불자들은 보리수를 잘 관리할 의무가 있다. 이는 보리수를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보리수가 잘 자라도록 잘 살펴함을 말한다.
보리수가 죽었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무엇보다 보리수를 선물한 페이스북친구 박영빈 선생에게 미안했다. 보드가야 보리수 가지에 나온 것을 삽목해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평소 내 글을 보고서 아름다운 마음을 낸 것이었다.
보리수를 두 번 실패 했다. 처음 보리수를 접한 것은 2017년도의 일이다. 그때 미디어붓다 대표기자 이학종 선생으로부터 미디어붓다 사무실에서 받았다. 보드가야보리수 열매에서 싹을 틔어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내 글을 보고 있는 어떤 독자가 이학종 선생에게 전달요청한 것이었다.
첫번째 보리수는 오래 가지 못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시들더니 잎이 모두 떨어졌다. 더 이상 새잎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동시에 받았던 이학종 선생은 보리수를 잘 키웠다. 매우 잘 자라서 천정을 뚫을 기세였다. 감당하지 못하자 절에 기증한 것으로 알고 있다.
보리수 키우기 두 번은 실패했다. 보리수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다. 키우는 방법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보리수가 사라지자 허전했다. 마치 불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선물한 사람에게 보리수를 달라고 하기에는 염치가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궁리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는 것이다.
인도보리수도 인터넷에서 살 수 있을까? 화원에서 인도보리수를 보지 못했다. 불교인들이나 가치를 알아 개인적으로 키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터넷 검색을 하자 검색이 되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인도보리수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거의 취급을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 곳이 검색 되었다.
한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품절된 것이라고 했다. 삼사년전에 올렸던 것인데 지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군데에 전화 걸었다.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올려 놓은 것이다.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나 감감무소식이다. 한군데는 어렵게 찾아 내었다. ‘심폴’이라는 식물사이트에서 검색한 것이다. 인도보리수 사진과 함께 금액이 올려져 있다. 전화를 걸었더니 딱 하나 남았다고 한다.
이제까지 보리수는 선물 받아서 키웠다. 모두 다 죽었다. 이번에는 인터넷 검색해서 구매하기로 했다. 마침 세 번째로 전화 걸었을 때 가능성을 보았다. 가격은 4만5천원이다. 택배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택배 도중에 다칠 수 있다. 직접 찾아가서 수령해 오기로 했다.
인도보리수 금액은 선입금 했다. 이제 가서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 어제 2024년 11월 4일 보리수가 있는 고양으로 향했다.
마침내 보리수가 있는 농원에 도착했다. 자유로 옆에 있는 곳으로 일산신도시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다. 너른 평지에는 이곳저곳에 원예작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주인은 젊은 청년이다. 삼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데 키가 크고 온화하게 생겼다. 식물을 키우기 때문일까 섬세해 보이기도 한다.
온실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출하대기 하는 곳처럼 보이고, 또 한 곳은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보는 것 같은 화원은 아니다. 아마 오로지 인터넷 판매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사이트에 가보면 온실에 있는 갖가지 진귀한 식물이 가격과 함께 올려져 있다. 그 가운데 인도보리수도 있었던 것이다.
온실에 있는 인도보리수를 보았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그 보리수이다. 딱 하나 남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던 보드가야보리수와는 약간 달랐다. 보리수 잎파리의 꼬리가 긴 것은 같지만 하트 형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리수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이 있다. 보리수 잎파리는 하트모양에 긴꼬리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제까지 두 번 선물 받은 보리수는 모두 하트모양에 긴꼬리였다. 또한 인도성지순례 갔었을 때 성지에서 보리수도 하트모양에 긴꼬리였다. 또한 미얀마 선원에 있는 보리수도 하트모양에 긴꼬리였다. 그런데 고양 온실에 있는 보리수는 하트모양이 아니었다.
보리수는 하트모양에 긴꼬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산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 마하위하라에 있는 보리수도 완전한 하트모양은 아니다. 고양의 온실에 있는 모양과 같았다. 또한 장충동에 있는 향천선원 보리수도 온실에 있는 것과 같이 하트모양이 아니었다.
(아산 마하위하라 보리수)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한 것 같다. 오늘 새벽 고양 온실의 보리수가 보드가야 보리수처럼 하트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혹시 잘못 산 것 아닌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보리수에 대한 열정이 식어 버리는 것이었다.
보리수에도 품종이 있을 것이다. 같은 식물이라도 종이 다른 것이 있듯이 같은 인도보리수라고 해도 잎이 하트모양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하트모양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한다면 태생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같은 편이면 끌어 당기고 같은 편이 아니면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혈연, 지연, 학연, 심지어는 직연까지 작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 하여 끼리끼리 노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나는 어떠할까?
불교인으로 살다 보면 인정받지 못할 때가 있다. 특히 학술대회 같은 것이다.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불교를 전공하지 않았고 불교에 대한 높은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자영업자에 지나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학술대회가 있을 때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밥을 같이 못 먹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후로 학술대회에 참가하는 일은 없다.
보리수도 혈통이 있다. 인도 보드가야보리수를 최고로 쳐 준다. 스리랑카에 있는 보리수는 부처님 당시의 보드가야 보리수 가지를 꺽어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스리랑카에 있는 보리수는 모두 인도 보드가야 보리수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보드가야 보리수의 특징은 하트모양의 잎에 긴꼬리를 특징으로 한다. 스리랑카 어느 사원에 가든지 이런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미얀마의 국제선원에서도 하트모양의 잎에 긴꼬리의 보리수를 볼 수 있다. 모두 하나의 나무에서 나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고양 화원 주인에게 보리수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보리수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주인은 먼저 커다란 온실로 안내 했다.
온실에는 갖가지 진귀한 열대식물로 가득했다. 이제까지 화원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또한 서울대공원식물원에서 보았던 열대식물보다 훨씬 더 풍부했다. 마치 식물원처럼 넒은 온실이다.
온실에 커다란 인도보리수가 하나 있다. 판매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용도인가? 일종의 어머니 보리수라고 볼 수 있다. 보리수 가지를 잘라서 또 다른 보리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보리수는 환경만 잘 갖추어지면 잘 자란다고 한다.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수십미터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모본보리수의 가지를 쳐 주는 것 같다.
보리수를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씨앗을 발아시켜서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지를 꺽어서 수경재배하고 삽목하여 만드는 방식이다.
한국은 인도보리수 역사가 짧다. 인도보리수를 관상용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씨앗을 발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가지를 잘라서 만든 다고 한다. 하나의 모본이 되는 보리수가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온실에서는 두 개의 어린 보리수가 자라고 있다. 모본보리수에서 가지를 꺽어서 수경재배 하여 만든 것이다. 이 두 어린 보리수가 자라면 아마 판매용으로 인터넷에 나올 것이다.
초기불교를 접하고서 보리수를 알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는 보리수가 불상 보다 더 중요시 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2년전인 2022년 스리랑카 순례 갔었을 때 확인한 사항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나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보리수신앙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신앙의 대상이다. 특히 무불상시대 오백년 동안은 보리수는 부처님과 동격이었다.
테라와다전통에서 보리수는 왜 불교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까? 더구나 재가불자의 의무 중의 하나로 보리수를 정성껏 관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까? 그왜 테라와다전통에서는 보리수를 살아 있는 부처님 대하듯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남인도특별전이 국립용산박물관에서 열렸다. 무불상시대에는 거룩한 부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거룩하고 존귀한 모습을 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이 결정적이다.
(무불상 시대의 보리수)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다. 만약 어떤 불자가 부처님의 아름다운 삼십이상만 쳐다 보고만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만 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S22.87)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자신의 형상을 보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이 설법한 것에 집중해야 함을 말한다. 아마 이런 이유로 부처님 열반후 오백년 동안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담마를 접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불상시대 오백년 동안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거룩하고 존귀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 수는 없지만 부처님을 상징하는 팔정도의 원륜, 족적, 그리고 보리수 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 가운데 생명이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으로는 보리수가 유일하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은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보리수는 지금까지 불자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테라와다불교 종주국이라 일컬어지는 스리랑카에 가면 확인된다.
스리랑카 사원에 가면 어디나 보리수가 있다. 그리고 보리수 사방에는 불상이 있다. 사람들은 불상에 예경하기 보다는 보리수에 예경한다. 이런 보리수가 시든다거나 말라 죽게 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테라와다불교에서 보리수는 잘 가꾸어야 할 신앙의 대상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살아 있는 부처님을 대하듯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리수가 시든다거나 죽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보리수와 부처님 가르침을 동일시 하는 것 같다. 보리수가 시들면 부처님 가르침도 시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리수가 죽게 되면 불교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스리랑카와 같은 테라와다전통에서 보리수를 신앙화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보리수와 가르침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이는 살아 있는 보리수와 관련이 있다. 보리수가 살아 있으면 가르침도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속 되기를 바란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때 정각을 이룰 때 보리수가 있었다. 보리수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법(正法)도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불교인들이 보리수를 신앙화 하는 이유라고 본다.
백권당에 새로운 식물식구가 생겼다. 인도보리수이다. 학명은 ‘휘커스 렐리지오사(ficus religiosa)’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에는 “신성한 무화과는 무화과 또는 뽕나무과인 모리과에 속하는 인도 아대륙과 인도차이나가 원산지인 무화과 종입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신성한 나무(sacred fig)’라는 말이 눈의 띈다.
인도보리수는 인도에서는 흔한 나무이다. 우리나라 느티나무처럼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키우기가 쉽지 않다. 영상 5도 이하가 되면 손상 된다. 그래서 주로 실내에서 키운다.
백권당은 창이 ‘북동향’이다. 겨울에는 이른 아침 한두 시간 햇볕이 들고 만다. 여름에는 두세 시간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창 측에 놓고 키우고자 한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고자 한다.
인도보리수의 잎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잎이 하트모양이 아니라서 보드가야보리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차별화 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차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리수가 깨달음의 나무라는 것이다.
보리수는 가르침을 상징한다. 보리수가 시들면 가르침도 시든다. 보리수가 죽으면 가르침도 사라진다. 보리수가 잘 자라도록 관리하는 것은 불교인의 의무이다.
이번에 세 번째로 인도보리수를 갖게 되었다. 앞서 두 번 가진 보리수는 관리 잘못으로 모두 죽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관리를 잘 할 수 있을까? 고양 화원 주인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가장 주의 해야 할 것은 ‘과습’이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탈이 난다. 과식하면 배탈이 나고 설사가 난다. 식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을 지나치게 자주 주었을 때 뿌리가 썩는다. 뿌리가 썩으면 잎이 쳐지고 떨어지게 된다. 결국 죽게 된다.
무엇이든지 적당하게 해야 한다. 약간 부족한 듯 하면 좋다. 먹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가?”(S35.239)라며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 하셨다.
두 번의 보리수 키우기 실패 경험이 있다. 결국 ‘과습’이 문제이다. 차라리 물이 부족한 상태로 있는 것이 더 낫다. 손으로 흙을 만져 봐서 말라 있으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 고려 없이, 또한 일조량 고려 없이, 일주일에 한번 물주기 식으로 흠뻑 주었을 때 견뎌 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방법을 알았다. 마치 수행승이 음식절제를 하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기본이 되듯이, 식물에게 물을 주는 것도 절제해야 한다.
새로 들어온 반려식물 인도보리수는 화분을 그 상태로 두고자 한다. 이는 고양 화원 주인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 모양 내기 위해서 큰 도자기 화분에 담아 놓는 것을 지양한다. 화원에서 가져 온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리고 물은 말랐을 때 주면 된다.
화분은 과습 되면 죽는다. 과식이 죽음의 길로 가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창측 햇볕 잘 드는 곳에 두고 영상 5도 이하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햇볕이 부족하면 ‘식물등’을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선풍기라도 돌려서 인공으로 바람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나는 보리수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이번만은 실패하지 않으려 한다. 매일 보리수 상태를 점검하고자 한다. 보리수를 크게 키워서 보기 좋게 하기 위한 마음은 버리고자 한다. 보리수가 있는 그 자체로 좋다.
보리수가 있으면 가르침도 있다. 보리수가 시들면 가르침도 시든다. 보리수가 죽으면 가르침도 죽는다. 만일 보리수가 죽는다면 다시 사면된다. 고양에 있는 화원에 가면 구입 가능하다.
백권당에는 불상이 없다. 그 대신 경전이 있다. 빠알리 니까야 번역된 것은 다 갖추어 놓았다. 번역된 경전은 부처님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보리수이다.
보리수만 보면 가슴이 뛴다. 보리수를 부처님 보듯 보고자 한다. 매일 아침 보리수를 보는 것으로 하루일과가 시작될 것이다. 보리수가 살아 있으면 가르침도 살아 있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성공하고자 한다.
2024-11-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