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정말 나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5. 05:34

나는 정말 나일까?

가능하면 엄지치기 하지 않으려 한다. 피곤한 일이다. 스마트폰 작은 글씨를 치다 보면 눈도 침침하고 에너지도 소모된다. 글이 긴 것이 큰 이유이다.

오늘 아침 엄지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백권당에 갈 수 없다. 오늘 정오 이전에 조카 결혼식장에 가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한시간이다.

요즘 밀린다팡하 읽기에 푹 빠져 있다. 교정본을 보는 것이다. 두 달 이내에 다 보아야 한다. 800페이지에 달한다. 생업도 하면서 글도 쓰면서 좌선도 하면서 이것저것 의무적으로 하는 것을 하면서 동시에 봐야 한다.

밀린다팡하를 보면 새겨 두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이제까지 의문했던 것이 모두 풀리는 것 같다. 마치 불교가 한권으로 총정리된 것과 같다.

밀린다팡하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교정작업에 참여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좀더 일찍 봤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시절인연이다. 전재성 선생이 지금 번역했기 때문에 보게 되었다. 더구나 금요니까야모임 멤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세 명이 교정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체험영역이기 때문이다. 체험한 것을 언어로써 전달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말로 표현해야 한다.

부처님은 진리를 언어로써 표현했다. 개념화된 진리이다. 이런 것도 진리라고 볼 수 있을까? 깨달은 자가 말했으므로 진리로 간주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깨달은 자는 진실만을 말한다. 깨달은 자가 말하면 진리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깨닫지 못한 자, 즉 범부가 말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당연히 진리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개념화 된 것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범부가 진리에 대해서 말 했을 때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때 이는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왜 그런가? 진리에 진리 아닌 것이 섞이면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깨닫지 못한 자가 진리를 말하면 진리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깨달은 자만 진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범부들은 깨달음의 메세지를 잘 이해 하지 못한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비유로써 설명한다. 밀린다팡하에서 나가쎄나 존자의 설명이 이를 말해준다.

밀린다팡하를 읽으면 감탄의 연속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1장 대품을 보면 시설에 대한 질문이 있다. 밀린다왕은 초면의 나가쎄나에게 "존자께서는 어떻게 불립니까? 존자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며 도발적 질문을 한다. 나가쎄나는 어떻게 답했을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대왕이여, 나는 나가쎄나라고 합니다. 대왕이여, 나를 나가쎄나라고 도반들이 부릅니다. 또한 부모가 '나가쎄나' 혹은 쑤라 쎄나혹은 비라쎄나 또는 씨하세나라고 이름을 짓던지, 대왕이여, 명칭이고 통칭이고 시설이고 언설로서, 나가쎄나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고 거기서 개아(個我)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Mil.25)

이름은 시설된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처한 상황에 따라 갖가지 명칭이 있다. 주민등록상의 이름이 있지만 회사에서는 직책으로 불리우고 집에서는 아빠 또는 엄마로 불리운다. 별명으로도 불리운다. 어느 명칭이 나일까? 그래서 나가쎄나는 나가쎄나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고 거기서 개아(個我)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Mil.25)라고 답한 것이다.

밀린다왕은 계속 질문한다. 이번에는 "존자여, 오백 명의 요나까인들과 팔만 명의 수행승들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이 분 나가쎄나께서 '거기서 개아(個我)은 발견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몰아 부친다.

"존자 나가쎄나여, 개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대의 의복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의약을 조달하고, 누가 그것 을 사용하고 누가 계행을 지키고 누가 수행을 하고, 누가 길과 경지와 열반을 실현시키고, 누가 살생하고 누가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누가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행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취기있는 것을 마시고, 누가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짓습니까? 그러므로 착하고 건전한 것이 없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없고, 선악업의 행위 자도 행위하게 하는 자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의 과보와 이숙이 없다면, 당신을 죽이는 자에게조차도 살생은 없습니다. 존자 나 가세나여, 당신에게는 궤범사도 없고 친교사도 없고 구축도 없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나를 나가쎄나라고 도반들이 부른 다.'라고 말한다면, 여기서 어떤 것이 나가쎄나입니까? 어떻게 머리카 락이 나가쎄나입니까?"(Mil.25)

밀린다왕은 신체 일부를 예를 들어 이것이 나가쎄나인지 묻는다. 나가쎄나 존자는 그때마다 아니라고 답한다. 왕은 최후로 이렇게 묻는다.

[밀린다 왕] “존자여, 내가 그대에게 묻고 또 물어도 나가쎄나를 보지 못합니다. 존자여, 단지 나가쎄나라는 말이 나가쎄나입니까?"

[나가쎄나] "대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밀린다 왕] “여기서 누가 나가쎄나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진실이 아닌 거짓말을 말합니다. 나가쎄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Mil.26)

나가쎄나가 존재하지 마침내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가쎄나라는 존재가 엄연히 있음에도 시설된 명칭을 부여하자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나가쎄나는 수레의 비유를 든다.

[나가쎄나] "대왕이여, 만약에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수레를 나에게 보여주시오, 대왕이여, 수레나룻이 수레입니까

[밀린다 왕]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쎄나] "굴대가 수레입니까?"

[밀린다 왕]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쎄나] "바퀴가 수레입니까?"

[밀린다 왕]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쎄나] "차체가 수레입니까?"

[밀린다 왕]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Mil.27)

이하 계속된다. 중간에서 끊은 것이다. 나가쎄나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수레를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왕이여, 나도 머리카락을 조건으로, 몸털 등을 비롯해 서 뇌수를 조건으로, 물질을 조건으로, 느낌을 조건으로, 지각을 조건으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을 조건으로 나가쎄나라는 명칭, 통 칭, 시설, 언설, 이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승의의 의미로는 개인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수행녀 바지라는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은 싯구를 읊었습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통칭이 있을 뿐이다.'"(Mil.27-28)

주어진 한시간 이내에 이렇게 길게 쓴 것은 구글번역기 덕분이다. 텍스트를 카메라로 촬영하여 메모앱에 붙이면 된다.

밀린다팡하 읽기를 잘 했다. 수백가지 질의응답에 불교가 있다. 삿된 교리는 타파 된다. 출간되면 누구나 봐야 할 필독서라 본다.

2024-05-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