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오토바이 소음
이대로 명색이 끊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시간 좌선을 마치고 난 다음 생각해 본 것이다. 편하게 누워서 정신과 물질의 사라짐에 대하여 숙고해 보았다. 또 한편으로 이상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오늘 재가우안거 66일째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행선과 좌선을 하고 후기를 쓴다. 여행 갈 때는 가능하지 않다. 하루나 이틀 국내여행은 예외이다.
오늘 아침은 상쾌했다. 잠을 잘 잔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날씨이다. 이제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되었다. 바람막이 점퍼를 입어야 할 정도로 선선했다. 이제야 계절이 제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다.
이 좋은 날에 중병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 본다. 장기가 망가져서 가망 없는 사람에게 괴로움과 절망만 있을 뿐이다. 누구나 이런 날이 온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성과를 내야 한다.
재가우안거라 하여 재가자가 안거를 나고 있다. 본래 선원에서 팔계를 받아 지니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안거를 나다 보니 계를 받아 지니지 못한다. 오후불식을 제외하고 나머지 계는 모두 지킨다고 보아야 한다.
안거에 힘을 실어 주는 사람들
안거에 힘을 실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능행스님은 글로서 격려한다. 페이스북에 엄지모양의 ‘좋아요’나 하트모양의 ‘최고에요’ 이모티콘은 없지만 종종 글을 남긴다. 아마 내 글을 시간 나는 대로 보는 것 같다.
글에 흔적을 남기는 스님들이 있다. 세상에서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이 ‘좋아요’를 눌렀을 때 힘을 받는다. 이렇게 신도들의 존경을 받는 큰스님도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스님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보는지 보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명사들은 대체로 공감표현에 인색한 것 같다. 이모티콘 하나 누를 힘이 없는 것일까? 글이 길어서 그럴까? 공감하지 않는 내용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나의 그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봐서 한번쯤 관심 표명해 줄 것도 같은데 무심한 것 같다.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공감 표시한다. 심지어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내 글을 통해서 수행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글을 받았을 때 힘을 받는다. 마치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인기에 사는 것처럼 분발하는 것이다.
바라밀공덕을 짓는 사람들
매일매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그리고 두세 시간 후기를 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오전일과가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런 것도 수행공덕일 것이다.
세상에 공덕짓기 쉽다. 그것은 남의 글에 ‘좋아요’나 ‘최고에요’ 이모티콘을 남기는 것이다. 댓글로 “사두! 훌륭합니다.”라는 문구를 남기면 상대방이 지은 공덕은 모두 내 것이 된다. 수희찬탄하여 공덕짓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공덕짓기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몇주전 담마와나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 법문을 들었다. 공덕짓기에 대한 것이다. 수행을 하다가 장애를 만났을 때 바라밀공덕이 있다면 차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다나밥차의 스님은 매일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 스님이 매일 배식봉사하는 것도 바라밀공덕을 짓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주변정리가 잘 되어 있어야
앉아 있는다고 해서 수행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이 잘 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먼저 주변정리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재가안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거를 위한 준비는 되어 있다. 명상공간이 확보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크다. 장소가 없으면 선원이나 절의 법당에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무공간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곳이 사실상 선원이나 다름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선다. 백권당에는 늘 혼자 있기 때문에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다. 스마트폰 카톡이나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는다. 당연히 페이스북도 보지 않는다. 어떤 언어적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된다. 뉴스에 마음이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 탐욕이나 분노, 흥분, 회한, 의심과 같은 마음의 장애는 없다. 이와 같이 주변정리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행선과 좌선에 임한다.
떠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아침에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지만 예외는 있다. 경전과 논서를 보는 것이다. 머리맡에 놓고 본다. 그리고 경전적 지식을 떠올린다. 이는 행선이나 좌선 중에도 떠올린다. 더 나아가 메모도 한다.
아파트에서 백권당까지 가는 길은 사색의 길이다. 주로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이다. 좋은 생각이 나면 메모해 둔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키워드만 기록해 둔다. 요즘에는 종이노트에도 기록한다.
기록하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말을 하면 삼매는 깨져 버린다. 그러나 노트에 연필로 메모하는 것은 가능하다. 떠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록해 둔다. 후기 쓸 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다. 행선할 때 좋은 생각이 나면 잠시 멈추고 기록한다. 그러나 좌선 때는 힘들다.
나는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
재가우안거를 하기 위한 조건은 갖추어졌다. 명상공간이 있고 뉴스를 보지 않고 홀로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어도 명상이 저절로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잠을 내 마음대로 잘 잘 수 없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는다고 해서 삼매가 스스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잘 되지 않는다면 바라밀공덕이 부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을 보면 아무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로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이 세상에서 선정에 들 수 있고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전생에 한번도 수행을 해 보지 않은 자는 이번 생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 다음 생을 위한 선업공덕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 나는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
삼매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기 위한 현미경
오늘 아침 컨디션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숙면을 취한 것이 큰 이유가 된다. 날씨도 선선하다. 이런 조건은 수행하기에 최상의 조건이 된다. 나는 오늘 잘 달릴 수 있을까?
행선은 십여분 했다. 행선에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갈 수 있다. 약하게 형성된 집중과 함께 좌선에 임했다.
오늘 좌선은 잘 될 것 같았다. 처음부터 배에 집중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었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다. 인내를 가지고 새겨야 한다.
좌선 중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치 누군가 옆에서 코치 해주는 것과 같다. 어제 저녁에 본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새기는 방법에 대한 구절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새기면서 새김, 삼매, 지혜가 예리해지고 힘이 구족되면 ‘배의 부품’이라고 하는 물질과 ‘부푼다’하며 새기는 마음, ‘배의 꺼짐’이라고 하는 물질과 ‘꺼진다’하며 새기는 마음, 앉아 있는 물질과 그것을 새기는 마음, 굽히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펴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발을) 드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나아가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내려놓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이러한 등으로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계속해서 쌍을 이루면서 마치 붙어 있는 것처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8쪽)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배의 부품’이라고 하는 물질과 ‘부푼다’하며 새기는 마음”이라 한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이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삼매의 힘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매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기 위한 현미경과 같은 것이다.
명칭 붙여서 새기면 천하무적
좌선하는 것만 수행은 아니다. 행선하는 것도 수행이다. 이는 “(발을) 드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발을 드는 것은 물질적 과정에 대한 것이고, 이를 아는 것은 정신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이 두 가지 과정을 새기는 것이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음식을 손에 댈 때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잡음, 잡음”이라고 명칭 붙이듯이 대야 한다. 음식을 씹을 때는 “씹음, 씹음”이라 해야 하고,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는 “넘김, 넘김”이라고 해야 한다.
명칭 붙여서 새기면 천하무적이 될 것 같다. 오토바이소음으로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하나의 해법이 될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오토바이 소음
오토바이소음을 참을 수 없다. 소음기를 달지 않는 것이나 일부로 소음을 유발하는 장치를 단 것을 보면 불선심이 절로 일어난다.
대부분 오토바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부가 문제이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파열음이나 폭탄음을 내며 달리는 것은 대단히 이기적인 행위이다.
오토바이소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들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힘도 없다. 이럴 때는 내가 변해야 한다. 내가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세상사람들도 청정해지는 것이다.
오토바이 타는 자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갖는다. 만용은 언젠가 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악업으로 인한 악처에 떨어지는 것이다.
대부분 오토바이는 생계형이다. 배달업이 발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사치로 타는 사람, 취미로 타는 사람, 재미로 타는 사람이다. 남에게 폐를 끼친다면 악업을 짓는 것이 된다.
여기 사치로 오토바이 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선업공덕을 짓지 않는다. 오로지 즐기는 삶만 살다 보니 악업만 늘어난다. 오토바이 소음으로 타인에게 폐 끼치는 삶을 살았다면 ‘원망의 마일리지’는 높아만 갈 것이다.
무전유죄와 유전무죄처럼
어떤 사람은 작은 잘못에도 악처에 떨어진다. 반면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떤 차이일까?
업을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지옥으로 이끈다.”(A3.99)라고 했다. 죄질이 가벼우면 훈방조치 등 가볍게 처벌 받을 것이다. 그런데 중죄가 되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옥의 비유를 들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재물이 없고 재산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반 까하빠나 때문에 감옥 에가고, 일 까하빠나 때문에 감옥에 가고, 백 까하빠나 때문에 감옥 에 간다.”(A3.99)
마치 ‘무전유죄’를 보는 것 같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다. 마치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쳐서 감옥에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끄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지 않고 계행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 협소하고 작은 도량을 지니고 있어 작은 것에서 유래한 큰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A3.99)라고 했다.
오토바이 타는 자들이 모두 악인은 아니다. 오토바이를 사치로 타는 자가 파열음이나 폭탄음을 내며 질주할 때 폐 끼치는 삶이 된다. 이런 자가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악처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선업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작은 잘못도 악처로 이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계, 정, 혜 삼학을 닦지 않은 자가 협소한 도량을 가진 것과 같다고 했다.
무전유죄가 있다면 유전무죄가 있다. 빵 하나 훔쳤다고 해서 감옥에 가지 않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똑 같은 죄를 저질렀어도 감옥에 가지 않고 훈방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재물이 많고 재산이 많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반 까하빠나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고, 일 까하빠나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고, 백 까하빠나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는다.” (A3.99)라고 했다.
똑 같은 죄를 저질러도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가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이를 무전유죄와 유전무죄로 말할 수 있다. 부유한 자가 감옥에 가지 않고 가난한 자가 감옥에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공덕의 유무로 설명했다.
공덕이 적은 자는 조그마한 잘못을 해도 악처에 떨어진다. 반면 공덕이 많은 자는 똑 같은 잘못을 해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똑같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협소하지 않고 큰 도량을 지니고 있어 무량한 삶을 산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은 똑같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A3.99)
수행공덕을 지으면 똑 같은 죄를 지었어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정신적 재산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 재산이 없는 자, 즉 수행공덕이 없는 자는 아주 작은 잘못에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성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될까? 수타니파타 ‘라따나경(寶石經)’(Sn2.1)에 이런 게송이 있다.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0)
게송에서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Kiñcāpi te honti bhusappamattā)”라는 말이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말이 이해 되지 않았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에 떨어질 정도의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는다. 살생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등 오계를 어기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탐, 진, 치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잘못이다.
수행자는 일반사람과 다르다. 그래서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네.”(S9.14)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의 작은 잘못은 구름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어느 수행승이 있었다. 수행승은 탁발이 끝난 다음에 연못에 가서 연꽃향기를 맡았다. 그것도 매일 맡았다. 이런 행위를 지켜보던 천신은 향기도둑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지 않은 것을 취한 것도 도둑질로 본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는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어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일반사람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사소한 것이다. 연꽃향기가 좋아서 연꽃향기를 맡은 것은 주지 않은 것을 취한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이 틀림 없지만 악처에 떨어질 정도는 아닌 것이다.
조건을 만들면 운명도 극복
선업이 없는 자의 작은 잘못은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마치 돈 없는 가난한 자가 빵 하나 훔치면 감옥에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같은 잘못이라도 돈이 있는 부자는 감옥에 가는 일은 없다. 오히려 더 큰 소리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사가 반드시 행위한 대로 과보를 받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 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된다.”(A3.99)
과보에도 차별이 있다. 마치 소금덩어리를 작은 물에 넣는 것과 큰 물에 넣는 것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말하면 숙명론이 된다. 숙명론적 삶을 살게 되면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조건발생을 말했다. 이는 “업을 지으면”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어떠한 업을 짓던지”라는 말과 대비된다. 이는 미래의 가능성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운명 극복의 종교이다. 조건을 만들면 운명도 극복할 수 있는 다. 더 나아가 윤회도 끝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된다.”(A3.99)라고 했다.
소리를 분해해서 새기면
오토바이로 인하여 스트레스 받고 있다. 소음기를 떼어 버리고 질주하거나 폭음장치를 하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욕이 나온다. 이럴 때 양자의 악업이 된다.
어떻게 해야 오토바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살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 도시에서 사는 한 어쩔 수 없다. 이런 때 방법을 생각해 본다.
연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만용으로 산다면 언젠가 사고 날 것이기 때문에 연민하는 것이다. 모르고 죄를 짓고 알면서 죄를 짓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질 것에 연민한다.
선업이 없을 때 작은 잘못에도 악처에 떨어진다. 돈이 없는 자가 작은 잘못에도감옥에 것과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괴롭다. 소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해법을 찾는다.
“의도적으로 (소리를 들으면 ‘듣는다, 듣는다’하며 새기고 나서 원래 새기던 대상만을 계속해서 새겨 나가라. 대화 소리, 노랫소리, 매우 큰 소리, 개나 새, 닭의 울음소리 등이 분명하게 들릴 때는 ‘들린다. 들린다’하며 두 번이나 세 번 새기고 나서 원래 새기던 대상만을 계속해서 새겨라.”(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4-75쪽)
오토바이 소리가 났을 때 “들림, 들림”이라고 새겨야 한다. 소리를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는 물질이고, 소리를 아는 것은 정신으로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소리가 분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토바이 소리를 새기다 보면 불선심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오토바이 파열음과 폭탄음은 여전히 짜증을 유발한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숙명적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새김이 저절로 되었을 때
오늘 좌선은 성공적이었다. 좌선을 시작한지 20분 정도 지났을 때 삼매가 형성되었다. 근접삼매 비슷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있을 때 마음이 밝아진 것이다.
마음이 밝아지면 잘 보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때 배의 모양을 보아서는 안된다. 단지 마음으로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면 명상이 쉬워진다. 마치 저절로 되는 것 같다. 몸은 마치 목불처럼 꼼짝 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단지 지켜만 보면 된다. 이럴 때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새김이 특히 좋을 때는 ‘부푸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 꺼지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 이러한 등으로 물질과 정신을 나누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새겨 아는 것이 부품, 꺼짐 등의 대상 쪽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가면서 달라붙어 버리듯 드러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4쪽)
새김이 좋을 때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물질 따로, 정신 따로 새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대상과 달라 붙듯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근접삼매와 유사한 찰나삼매로 가능한 것이다.
세상에 정신과 물질 두 가지만 존재
오늘 좌선은 한시간 했다. 이번 안거에서 몇 번 있지 않은 일이다.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그러나 똑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좌선을 시작한지 삼십분 정도 지났을 때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했다. 이런 맛에 좌선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건은 자꾸 바뀐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나기 시작했다. 한시간에 거의 이르렀을 때는 고행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좋았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부품과 꺼짐을 자동으로 새겼을 때 정신과 물질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물질과 정신 두 가지 외에 다른 어떠한 여자, 남자, 개인,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없다. 새길 때 새겨 알아지는 물질과 새겨 아는 정신,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2권, 79-80쪽)라고 말했을 것이다. 근접삼매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근접삼매의 힘으로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새김이 있기 때문이다. 새김이 있는 한 인간 이하 악처에 떨어질 수 없다.
범천에서 복과 수명이 다한 중생은 아래 세상으로 떨어진다. 그렇다고 바로 지옥이나 아귀, 축생과 같은 악처에 나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범천의 생에서 죽은 뒤에 바로 암퇘지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선정을 얻은 생에서는 선정의 근처에서 생겨나는 근접삼매 선업의 힘으로 사람의 생이나 욕계천상의 생에만 태어날 수 있습니다.”(담마짝까법문, 292쪽)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 있다. 범천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축생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보면 한단계를 건너서 떨어진다. 인간을 경유해서 축생이 되는 것이다. 이유는 근접삼매 때문이라고 했다.
범천은 선정의 힘으로 태어난 세계를 말한다. 죽을 때 선정삼매의 힘은 약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근접삼매의 힘은 있을 것이다. 선정수행한 자의 업과 같은 것이다.
일상에서 늘 새김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누구든지 죽을 때 근접삼매 정도의 집중력이 있다면 결코 악처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인간 이상의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가 악처에 떨어지는 일이 없는 것은 아마도 근접삼매의 힘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상에서 늘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당연히 오토바이 소음에도 새김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 소음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다.
2024-09-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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