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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인가 '기부'인가 '보시'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8. 5. 11. 09:39

 

'나눔'인가 '기부'인가 '보시'인가

 

 

 

 

 

아름다운 '보시'라는 말을 놓아두고

 

나눔과 기부, TV와 라디오 신문등 메스콤에서 자주 요즘 부쩍 자주 나오는 말이다. 연말이면 유명 텔런트가 나와 '나눔'에 대해서 공익광고 형태로 이야기 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기부'라는 말을 써서 불우이웃돕기를 하자고 TV로 캠페인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매체에서 '보시'라는 말로 방송 하거나 광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도대체 나눔과 기부와 보시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인터넷으로 사전을 찾아 보았다.

 

 

나눔

나눔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다만 동사형으로 나누다가 있다.

 

나누다

1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다.

2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하여 분류하다.

3 나눗셈을 하다

 

 

기부[寄附]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음.

 

 

보시[布施]

1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풂.

2 불가에 재물을 연보함.

 

 

사전에서 나눔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둘이상으로 가르는 의미 또는 구분 하는 의미로만 나와 있다. 그러나 언제 부터 인지 불우한 이웃을 돕자는 의미로 변질 된 듯 하다. 아마 메스콤의 영향이 크리라 생각 한다. 또 한가지는 기독교에서는 나눔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도 한 요인 일 것이다.

 

기부라는 말은 돈 많은 사람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 주거나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는 뉘앙스가 있다. 김밥집 할머니가 번돈을 말년에 학교에 장학금으로 희사 한다든지 빌 게이츠가 거액을 사회에 환원하는 장면이 연상 된다.

 

보시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메스콤에서는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를 기피 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용어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듯이 보시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굳이 '기부'나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특정교파에서 쓰이는 '나눔'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보시라는 말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도움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비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시가 반드시 재물을 말하지는 않는다. 말이나 글로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법보시'도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무외시'라는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자신이 어려움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보시가 있다.

 

주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일까

 

보시의 진면목은 무주상보시에 있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의 공덕에 이야기하고 있다.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라는 것이다. 다른말로 티내고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복덕은 불가사량 하다고 하였다. 즉 남서북방사유상하의 허공이 헤아릴 수 없듯이 그 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듯이 크다는 것이다. 가히 우리의 상상력을 불허 한다.

 

보시에는 크게 재보시와 법보시 무외시가 있다고 하였다. 그 보시중에서 가장 최고로 치는 보시는 단연 법보시이다. 우리의 상식은 재보시가 의뜸일 것 같으나 금강경은 우리의 의표를 찌른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냐 하면 비유을 들어 설명 하는데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 한다고 해도 금강경의 한구절을 말한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나 재물로 보시 한다고 해도 부처님이나 스님의 말 한마디에 비하면 한참 아래에 해당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점이 불교와 타종교의 근본적인 차별일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주어도 댓가를 바라고 주는 경향이 있다. 즉 주는 것만큼 받을 것을 생각 하는 것이다. 설령 그냥 주었다고 해도 주었다는 마음을 언제나 내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눔이고 기부이고 보시라고 보면 틀림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보시라는 말보다는 뒤에 '바라밀'을 붙여서 '보시바라밀' 하라고 말한다. 즉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라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다. 금강경에서는 수도 없이 이런 사항을 강조 한다. 그리고 그 복덕은 불가사량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고 주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일까.

 

보시라는 훌륭한 말이 더 많이 쓰일 날도 있을 것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는 지혜의 종교라고 말한다. 지혜가 생기면 자비는 저절로 생겨 난다는 것이다. 지식만 쌓는 다고 자비가 저절로 생겨 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식은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시골의 촌로들이나 도시의 빈민들에게 있어서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들이 베푸는 자비가 어떤 댓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서 많이 배풀지는 못하지만 한마디 말로써 또는 따뜻한 인정으로서 베푸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무주상보시를 하고 있고 보시바라밀을 실천 하고 있는지 모른다.

 

TV에서 요란 하게 '기부'라는 이름으로 생방송을 하면서 불우 이웃돕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부처님오신날을 즈음 해서이다. 이왕이면 기부라는 이름 대신에 아름다운 '보시'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하면 어뗏을까 생각 해 본다. 요즈음은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자비라는 말이 더 친근감 있고 많이 쓰이고 있다. 심지어 타종교에서도 차용해 가는 것을 보면 자비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알 수 있다. 나눔, 기부, 보시 모두 거기서 거기 같지만 보시라는 훌륭한 말이 더 많이 쓰일 날도 있을 것이다. 그 것도 단순한 보시가 아닌 '무주상보시''보시바라밀'과 같이 더 상위 개념의 말이 쓰일 날을 말이다.

 

 

 

 

 

2008-05-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