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1188

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 사람에 대한 자애의 마음이 생겼다. 여기서 자애는 사랑의 마음이라기 보다는 우정의 마음이다. 사랑의 종교가 있고 자애의 종교가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사랑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애를 말한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신의 사랑은 일방적 사랑이기 쉽다. 신의 피조물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 대표적이다. 피조물 또한 신에 대해서 조건 없는 사랑을 한다. 유일신교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연상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들끼리 사랑이기 쉽다.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내리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불교에서도 사랑을 얘기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자애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는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서..

담마의 거울 2022.11.28

산냐(相)의 척파에 대하여

산냐(相)의 척파에 대하여 여전히 의문이 있다. 불교에 대해서 아는 사람, 불교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은 니까야를 왜 읽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왜 이런 의심을 하는가?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니까야는 완역되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의 경우 쿳따까니까야 서너권만 번역하면 5부 니까야 번역은 모두 끝난다. 그런데 KPTS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한 니까야를 사보는 사람은 일년에 2백명가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부니까야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이들 니까야의 초판이든 개정판이든 한번 출간하면 천부가 세상에 나온다. 그런데 천부가 소진되는데는 5년 걸린다고 한다. 일년에 2백권 판매되는 것이다. 한국불자들은 지독히도 경전 사보는 것에 인색..

담마의 거울 2022.11.26

내가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시각은 새벽 4시 47분, 딱 적당한 시간이다. 3시대면 이르고 5시대면 너무 늦다. 4시대 정도가 되어야 내시간이라 볼 수 있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몸살 기운이 있다. 노인이 다 된 것 같다. 노인은 오늘 건강하다가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타이레놀 하나를 먹고 잤다. 그러나 잠의 질이 좋지 않다. 몸과 마음이 몹시 무겁다. 몸과 마음이 찌뿌둥한 것이다. 누워 있어도 힘들고 앉아 있어도 힘들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기분전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기분전환하는데 있어서 행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좁은 방을 왔다 갔다 보면 비틀거린다. 이럴 때는 암송해야 한다. 경을 ..

담마의 거울 2022.11.24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 께밧다의 경(D11)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 께밧다의 경(D11) 사람들에게 15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할까? 대부분 에스엔에스를 할 것이다. 페이스북을 열어 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15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페이스북이 최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아침 에어프라이어로 수제 소세지를 구웠다. 설정조건을 190도 15분으로 해 놓았다. 15분 후에는 노릇노릇 익은 달콤하고 바싹한 맛의 소시지를 맛 볼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페이스북에 마음이 갔다. 페이스북을 열어 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별로 남는 것이 없다. 경전에 손을 댔다.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디가니까야를 머리맡에 놓고 읽고 ..

담마의 거울 2022.11.23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과 무심도인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과 무심도인 지금 시각은 오전 7시이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동녘은 밝다. 하늘과 구름과 도시의 조화가 신비롭다. 이른 아침이 되면 늘 새로운 기분이다.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할까? 아침부터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는 등의 소극적 행위는 허망한 것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 아침에는 정신이 맑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머리맡에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19번경 뽓따빠다의 경을 읽었다. 이전에도 읽은 적이 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아마 완전히 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 없이 경전만 읽는 다면 겉핳기 식이 되기 쉽다. 뽓따빠다의 경은 심오하다. 모르기 때문에 심오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선정체험과 관련된 것이..

담마의 거울 2022.11.20

부처님은 발을 어떻게 씻었을까?

부처님은 발을 어떻게 씻었을까? 발로써 발을 씻는다. 이 말을 접했을 때 유년기 농촌에 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날 농부가 논도랑에서 발 씻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담배를 피면서 발로 발을 씻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발을 다른 한쪽 발로 쓱쓱 씻어내는 것이었다. 발가락 사이의 진흙까지 남김없이 씻어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았다. 처음 본 것이었을까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농부는 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발을 씻었다. 오늘날 현대화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설령 농촌에 산다고 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논에 들어가 김을 메고 나올 때 뻘과 같은 흙이 잔뜩 묻었을 때 콸콸 흐르는 도랑에서 발로 발을 씻는 모습을 이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담마의 거울 2022.11.09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어느 스님의 에스엔에스에 전도선언문이 올라 왔다. 설명문도 있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도선언문에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S4.5)라는 문구에 대한 것이다. 스님에게 "왜 둘이서 가지 말라고 했을까요?"라고 물어 보았다. 어떤 이가 댓글을 달았다. 혼자 가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유일신교 전도사들은 둘이서 함께 다니는데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왜 둘이서 가지 말라고 했을까요?"라며 역질문 했다. 이에 "일당백"이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일기당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강연을 듣고 올린 글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왜..

담마의 거울 2022.10.29

영원한 저 세상과 자아가 있다는데

영원한 저 세상과 자아가 있다는데 불교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의심의 여지 없이 스님과 학자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은 수행을 전문으로 하고 학자는 학문을 전문으로 한다. 수행과 교학에 있어서 스님과 학자를 따라 갈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보기 힘들다. 스님과 학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 등 커뮤니티에서는 그들을 볼 수 없다. 페이스북, 카톡방, 밴드 등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도 그들의 글을 볼 수 없다. 그들은 글을 쓰지 않는 것일 것? 그들은 쓸 줄 모르는 것일까? 이 글은 보통불자에 지나지 않는다. 최고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행경력이 깊은 것도 아니다. 매일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

담마의 거울 2022.10.21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글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때가 있다. 스님에 대한 글이다. 스님들이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 때 침묵해야 할까? 할 말을 하면 비방이 되고 비난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불교에서는삼보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스님은 승보로서 부처님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쓰지 않을 수 없다.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물(施物)을 받았을 때 스님의 언어가 있다. 천인사,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스님은 말을 할 때 신중해야 한다. 신도들로부터 시물(施物)을 받았을 때 “고맙습니다.”라든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축원을 해 주어야 한다. 법구경에 “아유 반노 수캉 발랑”(Dhp.109)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

담마의 거울 2022.10.20

주기만 하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주기만 하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만안구청 앞에 구두 수선 부스가 있다. 오래 되었다. 아마 내가 이 지역에 있기도 전에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15년도 더 전에 있었을 것이다. 구두 수선 부스는 한평도 되지 않는다. 매우 작은 철제 박스이다. 아마도 시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딱 두 번 가 보았다. 한번은 구두 뒷굽을 교체할 때 가 보았고 한번은 구두를 닦을 때 가 보았다. 구두수선 하는 남자는 발에 장애가 있다. 오른쪽 발에 장애가 있어서 뒷뚱뒷뚱 걷는다. 그럼에도 구두수선도 하고 구두도 닦고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래 그 자리에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종종 찾는다. 오늘 아침 구두수선 부스를 지나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두수선을 하는 자는 주기만 하는 사람 ..

담마의 거울 2022.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