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윤회를 부정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1. 08:50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윤회를 부정할까?
 
 
현재시각 오전 일곱 시,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반이다. 이 시간 내에 글을 하나 완성해야 한다. 오늘 쓸 것은 윤회에 대한 것이다.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44일째이다. 한달 보름이 다 되어 간다. 오늘 서울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에서 탁발법회가 있다. 열두 분의 상가 스님을 모시고 포살법회가 열리는 것이다. 글쓰기에 속도를 내야 한다. 속도전이다.
 
며칠전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했다. 전생에 연속으로 스님이 되어 산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꿈에서 보았다고 했다. 똑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는데 전생에 대한 것이었다고 써 놓았다.
 
어느 비구니 스님은 전생에 스님이었다고 써 놓았다. 그런데 글을 보니 계속 스님으로만 산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전생에 대하여 모른다. 설령 전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억 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다.
 
스님은 꿈에서 전생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전생은 네 번째 선정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이는 니까야에 정형구로 수도 없이 나온다. 또 어떤 스님은 계속 스님으로만 태어났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싶지 않다. 왜 그런가?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생에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축생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생, 노, 병, 사의 삶을 보면 행복 했던 때 보다 불행했던 때가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전생에 좋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천상에 태어났다면 최상의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업으로 살기 때문에 지옥에도 태어났을 것이고, 축생이나 아귀의 세계에도 태어났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전생을 부정한다. 특히 스님이 부정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B스님은 전생에 대하여,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간주 한다. 그래서 윤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B스님은 윤회가 있다고 생각하며 있는 것이고, 윤회가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는 스님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중법회를 하는 스님 입장에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B스님은 이른바 ‘스타스님’이다. 즉문즉설 법회는 일반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언젠가 예능프로를 보았는데 출연자는 B스님의 법문을 이야기했다. 또한 B스님은 타종교인들도 인정한다. 스님이 즉문즉설에서 말한 것을 인용해서 말하는 것이다.
 
스타스님은 자신의 지위와 명성과 칭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님이 전생이나 윤회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님이 즉문즉설 시간에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됩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스님을 따르는 대부분 사람들은 떠날 것이다.
 
김해에 B스님이 있다. 테라와다 가사를 두른 스님이다. 스님의 BTN강의를 유튜브에서 보았다. 그런데 스님은 테라와다 스님답지 않게 윤회를 부정했다. 스님은 “부처님은 윤회설을 말하지 않았지만 연기설은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해 B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있다고 말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말하면 단견에 빠진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존재론적으로 윤회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존재론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해 B스님은 경전적 근거를 들어 윤회를 부정했다. 맛지마니까야 36번경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을 예로 들었다. 마음(識)이 윤회하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싸띠 비구의 윤회관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을 자세히 보면 조건 발생하는 식에 대한 것이다.
 
B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스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는 스님이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윤회가 있다고 말하면 상견에 빠지고, 윤회가 없다고 말하면 단견에 빠진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마치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이와 같은 양도논법으로 윤회를 부정한다.
 
전남대 L교수가 있다. 일주일전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았다. 이전에 수도 없이 많은 영상을 보아 왔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알 수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쌍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말룽끼야뿟따의 이야기를 이용하여 윤회를 부정했다.
 
쌍윳따니까야에 형이상학적 질문이 있다.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같은 류의 질문이다. 또한 맛지마니까야에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번뇌를 야기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L교수는 이런 경전의 말을 교묘히 이용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세 사람의 예를 들어 보았다. 이들은 초기경전을 다 읽었을까? 사부니까야 또는 오부니까야를 읽었다면 윤회를 부정하는 말은 못할 것이다.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수도 없이 윤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윤회를 말했다. 부처님은 집성제에 대하여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라고 했다. 여기서 미래의 존재는 윤회하는 존재를 말한다.
 
부처님의 제자도 윤회를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 윤회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존자는 “벗이여, 뭇삶들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여기 저기 환락을 즐기며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나 윤회합니다.”(M43)라고 분명히 말했다.
 
불교인들에게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묻는 것은 우문에 불과하다. 윤회는 당연히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한국의 스님들이나 학자는 윤회를 부정한다. 아마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제 실상사에서 있었던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의 토론을 유튜브로 보았다. 불교개혁운동을 하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어느 여성 재가자는 “저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검증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윤회를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는 윤회를 믿을 수 있을까? 즉문즉설의 B스님이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타스님의 명예와 이득과 칭송 때문일 것이다.
 
윤회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내세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초기경전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D23)이 그것이다.
 
빠야씨 왕자는 윤회를 믿지 않았다. 이는 경에서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D23)라고 말했다. 이어서 “저는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D23)라고 말했다. 유물론자의 주장과 같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유물론자이기 쉽다. 특히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현대판 유물론자’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유물론자가 있었다. 이는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대표적이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사대로 흩어질 뿐이라고 했다. 정신은 물질에서 나왔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를 설했다.
 
오늘날에도 유물론자들이 있다. 철저하게 물질에 기반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과학의 시대에서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물질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이를 과학적 유물론자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한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말한 사대로 흩어진다는 말과 똑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스님들과 학자들도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세존 사이트를 운영했던 S스님도 그런 말을 했다.
 
윤회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불자들에게는 당연히 있는 것이다. 타종교인이나 일반사람들은 부정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윤회를 말했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믿는다. 이를 ‘업자성정견’ 또는 ‘업자산정견’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깜마사까딧티(Kammassakadiṭṭhi)’라고 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는 업과 업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지은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일까?
 
초전법륜경에서는 윤회 하는 원인을 갈애로 보았다. 세 가지 갈애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이 가운데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가지게 되면 윤회를 부정하게 된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비존재갈애는 ‘아무런 실천을 하지 않아도 죽은 뒤에는 생이 끊어져 버린다’라고 말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이 견해를 가진 이들은 좋은 행위도 하려 하지 않고 나쁜 행위도 삼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행한 악행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뒤에 새로운 생에 태어난다고 하면 자신들의 악행들이 나쁜 결과를 줄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뒤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완전히 끊어져야 마치 나무판을 다 지우고 칠해서 칠판을 만들 듯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비존재갈애는 죽은 뒤에 끊어져 버리 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죽기 전에 잘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누리는 것을 매우 심하게 좋아하고 갈망합니다. 이렇게 좋아하고 갈망하며 지내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찾고 구해서 행합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새로운 생에 태어날 업형성들이 생겨납니다. 또한 현재 생과 관련해 즐기고 애착하는 것이 생겨날 때마다 그 갈애의 힘들이 마음상속에 따라 포함됩니다. 그래서 업형성 의식(abhisa
ńkhāra viññāņa)이라는 죽음 직전 속행 마음이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이라는 대상을 강하게 집착해서 대상으로 취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대상으로 해서 거머쥐고 있는 동안 그 생에서 마지막 죽음마음으로 죽을 때, 그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을 대상으로 해서 새로운 생에 재생연결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단견을 가진 이가 새로운 생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새로운 생에 태어나게 하는 갈애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날 때도 단견을 가진 이들에게는 주로 불선업들이 많기 때문에 악처의 생에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비존재갈애도 ‘ponobhavikā 다시 태어나게 하고’라고 설하신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329-333쪽)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가 두려운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육사외도의 스승의 주장에 대한 것이 자주 나온다. 이들 견해를 보면 동의 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이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을 보면 무자 행진이다. 마치 반야심경에서 “없고, 없고,..”라는 무자 행진을 보는 것 같다. 유물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 들도 없다.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시체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서 조사를 읊조리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제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
 
 
유물론자의 견해를 보면 모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당연히 내세도 없고 윤회도 없다. 이렇게 내세를 부정하는 것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이미 행한 악행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죄가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죄가 많은 자들은 다음 생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은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전쟁의 시대에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은 유물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 스님들이나 학자 가운데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죄가 많은 시대를 반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죄업의 시대라면 윤회부정론은 환영 받을 것이다. 단멸로 끝나 버리게 되면 애써 노력해서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을 때 최대한 쾌락을 누려야 한다.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는 죽어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없기에 내세가 있는지 윤회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윤회가 있다고 확실히 말씀 하셨다. 윤회가 있다고 믿는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믿는 다면 없는 것이라는,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전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과 같이 일체지자나 삼장에 통달한 자나 도와 과를 이룬 성자는 단정으로 말할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단정적으로 윤회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문제라 여겨 회피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과 윤회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동물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동물이 되는 이야기도 있다.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싶지 않다.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천상에서 삶도 있었을 것이다. 수행자로서의 삶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윤회를 끝내고 싶다. 그래서 불교공부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 시각 8시 37분이다. 글 쓴지 1시간 37분 되었다. 정리하고 나면 1시간 50분 걸릴 것 같다. 법회에 갈 시간이다. 오늘도 신나게 자판을 두드렸다. 속도전했다.
 
 
2024-09-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