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새기는 삶
평온한 백권당의 토요일 아침이다. 왜 평온한가? 일체 뉴스를 보지 않기 때문에 평온한 것이다. 일체 유튜브를 보지 않기 때문에 평온한 것이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평온한 것이다.
오늘 아침 물청소를 했다. 오피스텔에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대자루가 있다. 누구나 써도 좋은 것이다. 일인사업자는 무엇이든지 혼자 한다. 청소도 혼자 하고 커피도 혼자 타 마신다.
물걸레 청소를 하고 나면 마음이 산뜻해진다. 아마 청소효과일 것이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면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다.
어제 오후에는 오후 내내 화분정리를 했다. 화분이 너무 많다. 난화분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화분이 서른 개가 넘는다. 일부는 말라 죽은 식물도 있다. 자리만 차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애착의 동물인 것 같다. 아끼는 것을 버리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쓸모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과거 추억을 생각해서인지 쌓아 두는 삶을 산다. 백권당에 있는 화분도 그렇다.
백권당에는 크고 작은 도자기 화분이 열 개 이상 있다. 대형화분은 무게가 상당해서 잘못 들면 허리를 다칠 수 있다. 실제로 수년전 화분을 옮기다가 허리를 다친 적 있다.
커다란 도자기화분에 인도고무나무가 있었다. 옮기는 과정에서 허리에 무리가 갔다. 무게가 거의 삼사십키로에 달하는 화분을, 단지 식물이 다칠 까봐 힘을 썼더니 허리에 충격이 온 것이다.
한번 허리를 다치면 좀처럼 낫지 않는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아 보았다. 시간이 약이다. 몇 달 지나니 허리통증이 없어졌다. 그러나 무거운 것을 들면 재발하는 것 같다.
식물사랑도 일종의 집착이다. 이를 애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재물이나 가족에 대한 애착만 못하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걸이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착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한 수행승의 무리가 감옥에서 족쇄 등에 묶여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수행승들은 부처님에게 “이러한 속박보다 더 강한 속박이 있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감옥의 죄수는 형틀을 목에 차고 있다. 감옥에 있는 한 누구도 풀 수 없는 족쇄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재산, 곡식, 자식, 처 등 가운데 갈애라고 불리는 번뇌의 속박을 생각하라. 이것이 우리가 본 속박보다 백배 천배 강한 속박이다.”(DhpA.IV.53-57)라고 말했다.
죄수의 형틀은 강력한 족쇄가 아니다. 그러나 현자는 그런 족쇄를 강력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와 같은 족쇄는 언제든 칼로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끊을 수 없는 것은 재물이나 처자식과 같은 족쇄이다.
누구나 재물에 대한 애착이 있다. 돈만 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익이 된다면 지옥에라도 갈 것이다. 이러한 재물에 대한 애착은 칼로 끊기 힘들다.
처자식에 대한 애착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뛰어 넘는다. 그런데 처자식에 대한 애착은 갈애에 기반한다는 사실이다. 재물은 잃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처자식만큼은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한다. 처자식에 대한 애착과 갈애는 너무나 강력해서 칼로도 끊어 버릴 수도 없고 또한 포기할 수도 없다.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로 살던 때 이야기가 있다. 어느 가난한 집에 남편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남편은 출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임신했으니 출산할 때까지만 기다려서 아이를 보고 출가하시오.”라고 말했다. 남편은 이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이가 출산 할 때까지 출가를 미루었다.
남편은 아이가 생기자 출가하고자 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말했다. 남편은 이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남편은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이에 남편은 “이러한 것을 받아 들이면 갈 수 없다. 말없이 도망가서 출가하자.”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밤중에 일어나 도망갔다. 남편은 히말라야 산으로 들어가 신선의 삶을 살았다. 그는 거기서 “나는 끊기 어려운 것인 처자의 속박, 번뇌의 속박을 끊었다.”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이와 같이 자신이 보살로 살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감흥어로써 다음과 같이 말했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걸이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착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현명한 님은 그 족쇄는 강하다고 말한다. 끌어내리고 느슨하면서도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소망을 여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이것을 끊고 그는 출가한다.” (DhpA.IV.53-57)
남편은 처자식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 출가 했다. 그러나 인연담에서는 ‘도망간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도망 가듯 떠나지 않으면 처자식에 대한 애착과 갈애를 도저히 끊을 수 없음을 말한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출가를 꿈꾼다. 그러나 지켜야 할 재산이 있고 또한 함께 해야 할 처자식이 있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자는 출가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내려 놓기 전에는 칼로도 끊기 어려운 강한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이다.
어제 백권당에 있는 화분을 정리 했다. 커다란 도자기 화분을 무려 여섯 개나 부수었다. 당근마켓에 내놓을까도 생각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만 두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쓰레기 분리순거 하는데 있어서 ‘불연성페기물’ 마대자루도 있다는 것이다. 20리더 들이 하나에 천원이다. 도자기 화분을 깨서 마대자리에 담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제 오후 내내 화분정리를 했다. 도자기 화분에서 나온 흙이 아홉 더미나 되었다. 이를 오피스텔 바깥에 있는 공원에 뿌렸다. 이렇게 화분을 줄이니 사무실 공간이 넓어 졌다.
사람들은 좀처럼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한번 집에 들어 오면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꾸만 쌓여만 간다. 언제 쓸지도 모르는 것을 쟁여 두는 것이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버릴 줄 모른다. 언젠가 써먹을 그날을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책은 벽장 가득히 되고 창고에는 쓸모 없는 물건으로 넘쳐 난다.
버리고 나면 개운하다. 아깝다고 여기는 것도 버리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하다. 그러나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재물은 버릴 수 없다. 평생 일군 재산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버릴 수 없는 것은 처자식이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래서 “거미가 스스로 만든 그물에서 지내듯, 탐욕에 물든 자들은 스스로의 흐름에 떨어진다.”(Dhp.347)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재물과 처자식은 지켜야 할 것들이다. 이런 삶을 살게 되면 스스로 족쇄에 갇혀 사는 삶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다.
여기 큰 길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큰 길로 간다. 모두 다 그 길로 가니 나도 그 길로 같다. 탐, 진, 치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에 붙잡히고, 성냄으로 부패하고, 무명으로 미혹된 자들은 스스로 만든 갈애의 흐름속에 떨어진다.”(DhpA.IV.60)라고 했다. 그 길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죽음’이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모두가 다 가는 그 길로 주욱 가다 보면 모두 다 죽게 된다. 또한 그 길은 다름 아닌 ‘절망의 길’이다. 죽어서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모른다.
지난주 일요일 11월 3일에 천장사에 갔었다. 천장사에 갑자기 고양이가 늘어 났다. 천장사는 두세 달에 한번 가는데 이번에는 네 달 만에 가게 되었다. 그 사이에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일까? 무려 아홉 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요즘 공원에 가면 ‘개산책’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목줄한 개를 끌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개는 아무 곳에나 오줌을 누고 똥을 싼다는 것이다. 똥을 싸면 주인은 준비된 비닐 봉지를 이용하여 치워 준다. 만약 사람이 공원에서 오줌을 눈다거나 똥을 싼다면 어떻게 될까?
애완견은 아무리 보아도 혐오를 유발한다. 주인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이다. 나만 그런지 모른다. 아마 나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어쩌다가 개로 태어났을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업생(業生)이기 때문에 그렇다. 과거에 지은 업이 있어서 그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죽어서 개의 태에 들어갈 수도 있고 고양이의 태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같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에게도 귀하거나 천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업이 뭇삶들(衆生)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중생은 업생이다. 업생이기 때문에 개의 태에 들 수도 있고 사람의 태에 들 수도 있다. 사람의 태에 들어도 고귀한 자로 태어날 수도 있고 천한 자로 태어날 수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능하면 인연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재물에 대한 족쇄, 처자식에 대한 족쇄는 끊기 힘들다. 오히려 지켜 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재물에 대한 애착과 처자식에 대한 갈애는 버리고 없애는 삶에 장애가 된다.
버리고 없애는 삶의 궁극은 열반이다. 불사(不死)가 되면 불생이 된다. 법구경에 이런게송이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서도 벗어나라.
존재의 피안에 도달하여
마음이 일체에서 벗어나면, 그대는
결코 다시 태어남과 늙음에 다가가지 않는다.”(Dhp.348)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있게 된다. 마음을 현재에 두면 어떠할까?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과거나 미래, 현재의 집착다발(五蘊)과 관계된 애착, 소망, 욕망, 소유, 망상, 집착, 갈애에서 벗어나라.”(DhpA.IV.63)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사람이다.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 설령 마음이 현재에 와 있을지라도 탐, 진, 치로 산다면 갈애로 사는 것이 된다. 가다 보면 결국 죽음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절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분명히 방법을 말했다. 부처님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M131)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흔히 현대인은 지금 이순간을 즐기라고 말한다. 과거와 미래 보다는 지금 이순간이 소중함을 말한다. 이는 지금 이순간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하며 현재를 잡으라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재는 즐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tatta tatta vipassati)”(M131)라고 했다.
현재는 새겨야 한다. 어떻게 새기는가? 명색을 새기는 것이다. 명색을 싸띠(sati)하는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는 것을 말한다.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세상에는 오로지 정신적 과정과 물질적 과정만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명색이 생겨나는 ‘명색의 흐름’만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어떤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명색과정을 알게 된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생겨나는 흐름만 있음을 알게 된다. 부처님이 현재를 즐기지 말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한 것은, “각각의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바로 일어나는 곳에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해야 한다.”(Pps.V.1)라는 뜻이다.
늘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다. 재가불자로서 생업이 있어서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경전을 보고 수행을 하는 것은 향상하는 삶, 성장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어제와 오늘에 이어 백권당 화분 정리를 했다. 그리고 비로 바닥을 쓸고 마대걸레로 바닥을 구석구석 닦았다. 청소를 해놓고 보니 몸도 마음도 산뜻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현실의 삶을 자에게 근심, 걱정, 슬픔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보해 해야 할 것도 많다. 언제까지 계속 될지 알 수 없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것인가?(ko jañña maraṇaṃ suve)”(M131)라고 말했다. 이 말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같다. 오늘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당장 한시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매일 긴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린다. ‘자O심’이라는 페이스북친구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법문이 따로 없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이런 글에 힘 받는다.
무엇이든지 영원한 것은 없다. 어제 도자기 화분 여섯 개를 망치로 깨서 버렸다. 십여년 동안 아끼던 것이다. 나흘 전에는 ‘티스토리블로그’가 불능이 되어 버렸다. 계정을 읽어 버려서 들어갈 수가 없다. 블로그도 무상한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새로운 ‘제2의 블로그 인생’이 시작되었다. 마치 생명처럼 아끼던 불로그가 불능 되었을 때 낙담 했다. 마치 애착하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아쉬웠다. 그러나 어느 것도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애착과 갈애에 지배당한 것이다.
언제나 현재를 살고자 한다. 그렇다고 “카르페 디엠”하면서 현재의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새기는 삶이다.
2024-11-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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